소설리스트

구원은 셀프입니다 (69)화 (69/172)



<69>

“어머니? 수도까지 연통도 없이 어쩐 일이십니까?”

“어쩐 일이냐고? 너는 그걸 정말로 몰라서 물어보는 게야-!”

대부인의 야윈 체구에서 나왔다고는 믿기지 않는 노성이 집무실을 가득 채웠다.

그에 백부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어머님! 미리 연락을 주셨으면 저희가 준비를 했을 텐데요.”

어느새 멜비나 백작 부인도 대부인의 방문 소식을 전해 들은 것인지, 허겁지겁 집무실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나는 집무실의 한쪽 귀퉁이 구석에서 아무런 말 없이 얌전한 척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어차피 이건 어른들이 해결할 일.

내가 나서야 할 상황도 아니었기에, 그저 대부인이 가주 부부를 질책하는 장면을 느긋하게 구경하기만 하면 됐다.

‘이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대부인은 여전히 머리끝까지 화가 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너희가 네리아에게 결혼을 명령했다고 들었다.”

“아. 뭔가 했더니, 겨우 그것 때문에 수도까지 오신 겁니까?”

“겨우? 내 손녀와 관련된 가문의 중대사가 겨우라고? 그 아이가 귀족이 된 지 1년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벌써 결혼이라니!”

“어차피 네리아도 귀족가에서 태어난 이상, 언젠가는 의무적으로 해야 할 일입니다.”

백부가 뻔뻔한 태도로 응수하자 옆에 있던 멜비나 백작 부인 역시도 이야기를 거들었다.

“라일라도 귀족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오래전부터 황태제비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네리아만 예외일 수는 없는 법이지요.”

“뭐라고? 비교할 걸 해야지! 남편감으로서 황태제 전하와 그 난봉꾼이 비교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난봉꾼이라니요, 어머니……. 토르네 백작가는 부유하고 권력도 가진 좋은 곳입니다.”

“네리아는 장차 그런 가문의 안주인이 되는 것이고요.”

“그래? 그렇게 좋은 곳이면 라일라를 토르네 영식과 결혼시키고, 황태제비는 네리아에게 준비시키도록 하면 되겠구나.”

“어머님-! 라일라를 토르네 영식과 결혼시키라니, 어떻게 그렇게 심한 말씀을 하실 수가!”

대부인의 날카로운 지적에 멜비나 백작 부인이 솔직하게 반응했다.

역시 알면서 그런 거구나?

너무 우스운 나머지 풉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집무실 중앙에서 이야기 중인 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은 것 같았다.

들었어도 상관은 없지만.

“내 말이 심하다고? 그런데 너희는 딸을 보낼 수 없는 곳에 조카를 보내려고 해? 이 괘씸한 것들! 너희가 사람이야?”

“어, 어머님? 제가 드린 이야기는 그런 뜻이 아니오라…….”

“긴말하지 않겠다! 이번 혼담은 없던 것으로 해!”

연례 회의 때야 가신들이 지켜보고 있었으니, 대부인도 가주의 체면을 위해 별말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곳은 직계가족 외에 듣는 사람이 없었고, 그런 만큼 대부인의 입담에도 거칠 것이 없었다.

“어머니! 이미 진행되고 있는 혼담을 어떻게 엎습니까?”

“어떻게 엎기는? 귀족가에서 혼담이 무산되는 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의견 차이로 혼례 전날에도 엎어지는 게 결혼이거늘!”

“그렇지만 이건 가문을 위한 일입니다! 네리아의 결혼으로 취할 수 있는 가문의 이득이-”

“레고트-!”

또다시 대부인에게서 매서운 불호령이 떨어졌다.

“너는 조카에게 미안하지도 않아? 저 아이가 불쌍하지도 않아? 너도 양심이 있다면 네리아를 자유롭게 살게 놔둬! 죽어서 카터의 얼굴을 어떻게 보려고 그래-!”

“불쌍한 건 조카가 아니라 평생을 카터에게 눌려 살았던 접니다!”

“이것이 아직도-! 혼담을 엎어!”

“그러지 않겠습니다! 가주는 접니다! 어머니도 가주로서의 제 권위를 존중해 주십시오!”

대부인과 백부의 대립에 응접실이 난장판이 되어 가고 있었다.

물론 나는, 여전히 여유로운 마음으로 이 싸움을 구경했다. 어차피 백부는 대부인을 못 이기니까.

“아, 그래? 내 말을 못 듣겠다 이거지? 알겠다. 레고트 네 마음대로 하려무나.”

“예! 어머니께서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셔도 당연히 그럴 겁니다!”

“대신!”

대부인이 엄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내가 친정의 오라비에게 상속받을 자작 작위와 영지는 네리아에게 물려주도록 해야겠구나.”

“어머니! 그게 무슨!”

“어머님!”

대부인이 내뱉은 충격적인 이야기에 두 사람이 사색이 되었다.

대부인의 친정 오라비.

그는 가주이지만, 첫사랑이었던 배우자와 일찍 사별한 후 재혼하지 않았기에 자식이 없었다.

그랬기에 가주의 사후에 작위와 영지를 하나뿐인 동생인 대부인이 상속받을 예정이었다.

‘그 뒤로는 대부인의 장남인 레고트 백부가 그것들을 물려받는 순서가 되었겠지만…….’

대부인은 작위와 영지를 나에게 주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작위도 작위지만, 그녀의 친정 영지는 비옥한 곡창지대를 끼고 있어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곳이다.

백작 부부는 그 모두가 머지않아 자신들의 소유가 될 거라 생각했을 텐데, 지금 와서 이런 말을 듣는다면 당황스럽겠지.

역시나 백부가 대부인에게 다급하게 반발해 왔다.

“그건 말도 안 됩니다! 지금 저를 협박이라도 하시는 겁니까?”

“협박? 네가 나를 어머니로 존중하지 않으니 나도 너에게 맞춰서 행동하는 것 아니겠느냐?”

“어머니! 제발!”

“나는 내 뜻을 꺾을 생각이 없다.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백부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대부인이 유산 상속 문제를 꺼내든 이상, 결론은 이미 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내 결혼으로 얻을 수 있는 이득과 그로 인해 잃게 되는 것.

두 가지를 굳이 저울에 매달아 보지 않아도, 어느 쪽의 가치가 높은지는 명확했으니까.

결국, 백부는 이를 갈면서도 어쩔 수 없이 억지로 입을 열었다.

“…말씀 따르겠습니다.”

“이후로도 네리아를 억지로 결혼시키려는 생각 따위는 하지도 말아라! 그랬다가는 내 재산을 너에게 한 푼도 물려주지 않을 것이니!”

“…….”

나는 미소를 숨겼다.

‘뭐, 예상했던 결말이지만.’

이제 이걸로 앞으로는 백부네가 결혼 문제로 나를 건들 수는 없게 되었다.

백작 부부 두 사람이 구석에 있던 나를 노려보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아가, 이제 나가자꾸나.”

“네, 할머니.”

뒤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백작 부부를 놀리기라도 하듯, 대부인의 팔짱을 끼고서는 유유히 집무실을 벗어났다.

***

대부인은 수도에서 더 머무를 줄 알았건만, 목적을 이루자마자 곧장 그녀의 저택으로 돌아갔다.

“당분간은 레고트와 멜비나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구나!”

…라는 이유에서였다.

타당한 사유였기에 그녀를 모셔다 드리기 위해 다시 동행했고, 나는 대부인의 요청에 따라 그녀의 저택에서 3일을 더 머물렀다.

대부인은 그동안 네리아에게 해 주지 못한 것들을 보상이라도 하듯 나를 지극정성으로 돌봤다.

‘예전 세계에서도 가족에게는 잘해 주는 분이셨으니까.’

같이 식사하거나 주변 풍경이 예쁜 곳을 산책하는 등. 백부 가족과 부딪치는 일 없이 오랜만에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내가 다시 수도의 저택으로 돌아가는 날.

“아가… 네 집이라고 생각하고 언제든지 놀러 오려무나.”

대부인이 마른 손으로 내 두 손을 꼭 붙잡아 주었다.

그러고는 비밀 이야기를 하듯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사실, 친정의 작위와 영지는 너에게 물려줄 생각이란다.”

“네? 정말이요?”

“그래. 레고트에게는 명령하느라 그렇게 말했지만, 네가 좋은 사람과 결혼만 하면 유언장을 고칠 거란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카터와 로즈를 볼 낯이 없어.”

“할머니… 감사합니다.”

나는 거절하지 않고 냉큼 대답했다. 어른이 선물을 주시는데 거절하는 것도 도리가 아닌 법이다.

“또 올게요, 할머니. 다음에도 맛있는 차를 끓여 드리도록 할게요.”

“그래. 기다리고 있으마.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차였단다.”

그렇게 말하는 대부인의 눈빛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나 역시 떠나는 게 아쉽기는 했지만, 머지않아 듀이의 기사 시험이 있을 예정이었기에 마냥 머무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누고 마차에 올라서려던 때였다.

“잠깐! 잠깐 기다리렴. 아가!”

“네?”

“갑자기 생각난 게 있구나! 아가에게 줄 게 있어! 아직 출발하지 말고 잠깐 기다려 주겠니?”

대부인이 급하게 나를 다시 불렀기에 일단은 걸음을 멈췄다.

나한테 줄 게 있다고?

대부인이 근처에 있던 하녀에게 무언가를 지시하자, 하녀 역시 기억이 떠오른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마님. 저도 기억이 납니다. 버리지 않았으니 아직 창고에 있을 거예요. 금방 가져오겠습니다.”

지켜보고 있던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하녀가 오면 알게 되겠지.

그리고 되돌아온 하녀는 손에 작은 주머니 하나를 들고 있었다.

“이건 로즈가 죽기 한 달 전쯤에 나에게 보냈던 목걸이란다.”

“저희 어머니가요?”

“몇 년 동안 잊고 있었는데 갑자기 기억이 떠오르더구나. 이건 네가 가져가는 게 맞는 것 같구나.”

목걸이? 나는 의아해하며 주머니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입구를 열어 그 안의 내용물을 확인한 순간.

나는 믿기지 않는 기분으로 눈을 크게 떴다.

푸른색 돌멩이 같은 펜던트에 줄을 달아 목걸이로 만들어 놓은 이 물건은 바로-

‘…요정왕의 심장이잖아?’

오랜 시간, 대대로 모계로 상속되었다는 어머니의 보물이었다.

예전 세계에서 부모님이 내 사지석화증을 고칠 치료법을 찾기 위해 제국 내의 의사, 약사, 마법사를 불러 모으던 시절.

산골에 틀어박혀 연구만 하고 살던 천재 마법사 세사르를 수도까지 불러낼 수 있었던, 바로 그 귀중한 물건이기도 했다.

‘세사르는 로이엔 경의 외동딸인 셜리의 치료약을 만들었던 바로 그 마법사였지.’

그런데 이게 왜 여기에 있지?

겉보기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물건이기에 진작 처분했을 줄 알았는데 아직 남아 있었다니.

그것도 예상하지도 못한 장소에.

나는 당황스러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이걸 저희 어머니가 할머니께 보냈었다고요?”

“그래. 어린 네가 이걸 너무 갖고 싶어 해서 잠시 나한테 맡겨 둔다고 했던가? 다시 찾아가겠다고 했는데 그런 사고가 생겨서…….”

할머니의 설명을 듣고도 의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린 네리아가 이걸 너무 갖고 싶어 했다고? 내가 저 못생긴 목걸이를? 그럴 리 없잖아?

어떻게 봐도 이상한 핑계였다.

게다가 대대로 내려왔다는 귀중한 보물을 아무리 할머니라고 해도 타인의 손에 맡기다니.

단순한 기행이나 우연으로 치부하기에는 걸리는 게 많았다.

어머니가 대체 왜 그런 이상한 행동을 하셨지? 무슨 이유로?

눈을 찌푸리고는 계속 생각해 보았다. 문득, 머릿속에 떠오르는 가능성이 한 가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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