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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셀프입니다 (68)화 (68/172)



<68>

응접실의 테이블 위에 마롱글라세가 담긴 접시가 놓였다.

마롱글라세는 밤을 설탕에 절여서 만든 디저트로, 밤을 좋아하는 대부인을 위해 준비해 온 것이었다.

“맛있구나! 내 입맛에 아주 잘 맞아. 내가 우리 손녀에게 좋은 선물을 받았구나.”

“정말요? 제가 할머니를 생각하면서 직접 만든 것인데 맛있다고 칭찬해 주셔서 정말 기뻐요!”

“이걸 아가가 직접 만들었다고?”

“네.”

놀란 듯이 되묻는 대부인에게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하녀 생활을 오래 했잖아요? 그래서 요리에 자신 있어요.”

“…….”

내 입에서 ‘하녀 생활’이라는 표현이 나오자, 그녀의 얼굴이 또다시 죄책감으로 어둡게 물들었다.

그랬기에 나는 설핏 당황한 모습으로 손사래를 쳤다.

“할머니? 그런 표정 지으시라고 꺼낸 이야기가 아니었는걸요……! 죄송해요! 제가 말실수를 했어요.”

“아가…….”

“저는 이제 괜찮으니까요.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네?”

사실 일부러 한 말이 맞았다.

대부인의 마음을 자극한다면, 그녀가 좀 더 적극적으로 내 편을 들어 줄 가능성이 컸기에 그 점을 노린 것이었다.

“미안하구나. 내가 오히려 아가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어. 그래, 그동안은 어떻게 지냈니?”

“음, 데뷔탕트 후에 황녀님의 예법 튜터가 되기도 하고, 장신구 사업을 시작하기도 하고…….”

연례 회의 이후로 있었던 일들에 관해 대부인에게 조잘조잘 이야기하고 있을 때였다.

저택의 하녀가 응접실로 차를 가져왔다.

하지만 완성된 차가 아니라 끓인 물과 찻잎, 그리고 차를 우려낼 수 있는 도구를 가져온 것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할머니에게 내가 직접 차를 타 드리고 싶다는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수도에서 좋은 찻잎을 가져왔거든요. 그리고 제가 차를 맛있게 우려낼 수 있는 특기가 있어요.”

나는 자신감이 넘치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는, 대부인이 보는 앞에서 차를 만들기 시작했다.

일정량의 찻잎에 물을 넣고 마음속으로 숫자를 센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약간의 설탕을 넣기까지.

예전 세계에서, 내 아버지에게 직접 배워 왔던 레시피였다.

아버지는 차를 맛있게 만드는 능력이 있었고, 나와 어머니에게 자주 차를 끓여 주고는 했다.

어릴 때부터 좋아 보이는 건 전부 해야 했던 내가 아버지에게 차 우리는 방법을 배운 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할머니, 여기. 드셔 보세요.”

나는 완성된 차 한잔을 대부인에게 내밀었다. 찻잔에서 뜨거운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손녀가 만든 디저트에 손녀가 끓여 준 차라니. 호화로운 티타임이구나. 잘 먹도록 하마.”

대부인이 입가에 미소를 띠며,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뜨여졌다.

“이 맛은… 카터의……?”

그렇게 중얼거리는 대부인의 모습을 보며 빙긋 웃었다.

이 뜨거운 차 한 잔이 바로, 대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내가 준비한 비장의 선물이었다.

내 아버지이자, 그녀의 죽은 아들을 추억할 수 있는 맛일 테니까.

“할머니의 입에 맞으시나요?”

“…….”

순진한 목소리로 물었건만, 대부인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그녀의 눈동자에서 조용히 눈물이 흘러내릴 뿐이었다.

“이렇게… 이렇게나 카터와 똑같은데, 내가 어떻게… 어떻게 너를 그렇게 오래 몰라보고…….”

차 한 잔이,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그녀의 마음속 어딘가를 건드려 버렸던 걸까.

눈물방울은 비가 되었다.

응접실이 대부인이 오열하는 소리로 가득 찼다. 그녀가 마른 두 팔을 뻗어 나를 세게 끌어안았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었어. 로즈가 그런 짓을 할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 하지만.”

“…….”

“카터와 로즈가 죽은 건 내 탓이었어. 내가 아프지만 않았어도 그 아이들이 죽지 않았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니 하루하루가 괴로워서 견디기가 힘들었단다.”

대부인의 목소리에 끔찍한 고통이 서려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 너를 일부러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어. 죽은 두 사람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어. 무서웠단다. 전부 내 탓이니까. 내 잘못이니까.”

“…….”

“그래서는 안 됐었는데. 미안하다. 미안하구나, 아가. 미안하다.”

나는 대부인의 절절한 사과에도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사과를 받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었으니까.

죽은 네리아가 이 모습을 봤다면, 어떻게 대답했을지는 모르겠다.

다만.

부모는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했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상처가 아물지 않는다고 했다.

죽을 때까지도 평생을 잊을 수 없는 아픔으로 남는다고 했다.

문득, 예전 세계에서 나를 잃었을 부모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잘 계실까? 건강하게 지내실까?

죽은 딸이 보고 싶다며 밤마다 그리워하고 계시지는 않을까?

나는 다른 곳으로 와서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다고, 새로운 사람을 사귀며 재미있게 지내고 있다고.

그러니까 두 분도 내 생각은 하지 말고 잘 지내셨으면 좋겠다고.

다시 한번 부모님을 만날 수만 있다면, 그 말을 전하고 싶은데.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이 슬펐다.

“할머니…….”

그래서 대부인을 마주 안았다. 남겨진 내 부모님이 걱정되어서. 적어도 그 아픔만은 알 것 같아서.

어느새, 내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조용한 응접실 안에서, 두 사람이 서로를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다.

***

“차가 다 식어 버렸어요. 새로 끓여 드리도록 할까요?”

“아니, 이대로 먹도록 하마. 아가가 끓여 준 건 식어도 맛있단다.”

우느라 두 사람 모두 눈이 빨개지고 말았지만, 대부인과 나는 모르는 척 다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래서 말을 듣다가 말았는데, 아가는 또 어떻게 지내고 있니?”

“최근엔… 백부님이 정해 주신 영식분과 결혼을 하게 되었어요.”

“뭐라고? 벌써? 아직 네가 귀족이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결혼이라니? 상대는 누구니?”

“토르네 가문의 장남인 필립스 영식인데, 레비의 친한 친구예요.”

“누구? 레비의 친구라고?”

마침 대부인이 대화를 텄기에, 나는 이참에 은근슬쩍 그녀를 찾아온 목적을 꺼냈다.

그러자 대부인의 표정이 불쾌하게 찌푸려지고 말았다.

손자라고 해도 레비가 어떤 사람인지는 그녀도 알고 있다. 그런데 레비의 친구가 내 결혼 상대라니.

대부인이 그 사실에 상당히 화가 난 것 같았다.

그랬기에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일부러 울먹울먹 눈물까지 글썽이면서였다.

“그런데 저, 사실은 토르네 영식과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굳이 돌려서 말할 필요도 없었다. 방금 일로 대부인은 이미 나에게 마음을 연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분의 소문이 나쁘기도 하고, 실제로도 어떤 사람인지 제 하녀에게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이야기를? 어떤 사람이니?”

“그게… 제 하녀가 예전에는 레비의 직속 하녀로 지냈었거든요. 잠깐 여기로 불러도 될까요?”

“그러렴. 나도 듣고 싶구나.”

대부인의 허락이 떨어지자,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샤가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대부인은 사샤의 얼굴을 알아본 것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이 나는구나. 수도 저택에서 레비의 뒤에 있던 얼굴이야.”

“발렌티스 대부인을 뵙습니다.”

“인사는 됐으니, 네리아의 결혼 상대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무나.”

“말씀 올리겠습니다. 저는 그동안 레비 도련님을 따라다니며 그분을 자주 만날 수 있었는데…….”

굳이 사샤를 부른 이유는, 레비의 하녀였다는 그녀의 입장을 살려 발언의 신뢰성을 더하기 위함이었다.

사샤의 입에서 내 결혼 상대에 관한 자세한 정보가 흘러나왔다.

하나같이 쓰레기 같은 일화들에 대부인의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했고, 나는 그 옆에서 가련한 척 훌쩍훌쩍 손수건에 눈물을 찍어 냈다.

“뭐라고……? 무슨 그런!”

그리고 이야기를 모두 들은 대부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나는 이번에도 분위기를 틈타, 마치 비련의 주인공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과장된 자세로 대부인의 품속에 뛰어들었다.

“할머니! 저는 이제 어쩌면 좋지요? 백부님과 백모님의 명령은 절대적이어서 어길 수가 없는데!”

솔직히 제삼자가 본다면 상당히 가증스럽게 느껴지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될 법한 행동이었다.

“저희 부모님이 살아 계셨다면, 절대로 저를 그런 사람에게는 보내지 않으셨을 거예요.”

“그래, 아가한테 그런 일이 있었구나. 이 할미를 잘 찾아왔다.”

대부인은 분노를 삭이고 있는 것인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내 등을 토닥여 주었다.

“내가 레고트를 만나도록 하마. 할미가 전부 알아서 해결해 줄 테니, 아가는 걱정 말거라.”

“할머니……!”

나는 감격한 척 대부인을 또다시 껴안았다.

***

수도의 저택으로 돌아와서 가장 먼저 마주친 사람은 라일라였다.

그녀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고는 얄미운 얼굴로 시비를 걸어왔다.

“출장을 다녀왔다고 했지? 결혼하면 이제 일은 못 하게 될 테니 아쉽겠다. 토르네 영식은 부인이 조용히 지내는 걸 바란다고 해.”

“…….”

“그래도 방계인 네가 장차 백작 부인이 되는 거잖아? 대단한 행운을 잡은 거니까, 부모님께 감사히 생각하도록 해.”

라일라의 헛소리에는 굳이 대꾸해 줄 필요조차 없었다.

조금 뒤, 발렌티스 대부인이 나보다 한발 늦게 저택 안으로 들어섰기 때문이었다.

“할머니?”

라일라는 의외의 인물이 갑작스럽게 등장한 것에 당황스러움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언제 오신 거예요?”

“네 아버지는 어디 있느냐?”

하지만 대부인은 라일라에게는 관심조차 두지 않은 채, 레고트 백부부터 찾았다.

금방이라도 불호령이 떨어질 것 같은 대부인의 서슬 퍼런 기색에 라일라를 포함한 저택의 고용인들이 그녀의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레고트는 어디에 있어!”

“아버지라면, 이 시간에는 집무실에 계실 텐데…….”

“그래? 알았다.”

대부인이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대부인을 부축하듯이 그녀의 팔에 매달려 함께 걷기 시작했다.

로비를 벗어나기 직전, 뒤를 돌아보며 라일라에게 얄미운 미소를 되돌려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대부인과 함께 저택의 가주 집무실 앞에 도착한 후.

그녀는 한 차례의 노크 후에 허락도 받지 않고는 집무실의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레고트-!”

“어머니?”

책상에서 서류를 읽고 있던 백부가 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설마, 내가 할머니를 여기까지 모셔 올 줄은 몰랐지?

나는 여전히 대부인의 팔짱을 낀 채 약 올리는 표정을 짓고는, 친애하는 백부님을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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