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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셀프입니다 (67)화 (67/172)



<67>

나는 고개를 돌려 휴게실 입구를 바라보았다. 갑작스럽지만, 아예 의외인 상황은 아니었다.

언젠가 한 번쯤은 레오니트가 나를 찾을 것 같았으니까.

황족인 그라면, 명령만 해도 나를 불러낼 수 있다.

그런데도 우연을 가장하며 나를 만나려는 이유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나에게 할 말이 있다는 것.

애초에 레오니트가 오늘 니나렛을 찾은 것도, 내가 황녀궁을 방문하는 시간에 맞춘 것이겠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

‘솔직히 대충 짐작은 간다만…….’

나는 시녀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내 결정을 존중하겠다는 듯, 나를 재촉하기보다는 차분히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랬기에 나는 짧은 고민 끝에 결정을 내렸다.

“가겠습니다.”

어차피 황태제가 나를 만나겠다고 결정했다면, 지금이 아니라도 언젠가는 그렇게 만들 수 있을 테니까.

“들어갈게요. 높으신 분을 더 기다리게 만들 수는 없으니까요.”

“협조 감사드립니다, 레이디.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내 대답에 그녀가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나 또한 시녀의 뒤를 따랐다. 곧, 휴게실의 문이 열렸고 그곳에서는.

“레이디 발렌티스.”

다리스 황족의 상징이라는 백금발과 붉은 눈동자를 가진 미남자가 벽에 등을 기댄 채로 서 있었다.

레오니트 황태제, 본인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나에게로 천천히 걸어왔다.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그의 고귀한 출신을 짐작할 수 있을 법한, 고아하고 기품 있는 움직임이었다.

“제 시녀가 레이디 발렌티스의 드레스에 실수를 저질렀군요. 부디 무례를 용서해 주시길.”

“황태제 전하를 뵙습니다. 다리스에 영광이 있기를.”

“놀라지 않으신 걸 보니, 제가 레이디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이미 알고 계셨나 봅니다.”

“딱히 숨기지도 않으셨으니까요.”

레오니트가 대답 없이 웃었다.

그와 나는 자연스레 테이블에 마주 보는 형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함께 들어왔던 시녀는 곧바로 간단한 차를 내오고는 어디론가 다시 모습을 감췄다.

“전하께서는 설마 이곳에서 계속 저를 기다셨던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황녀님께 예정보다 1시간을 더 잡혀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오래 기다리시도록 만들었네요.”

“괜찮습니다. 기다림은 미덕이라고들 하니까요.”

“그런데 황녀궁에서 이렇게 오래 머물고 계셔도 되는지요?”

“예. 니나렛을 별궁에서 데려온 사람이 저였거든요. 한때, 조카의 건강을 확인하러 자주 황녀궁에 드나들었더니, 아예 편하게 사용하라고 휴게실을 하나 받았습니다. 요즘이야 조카를 찾는 빈도가 많이 줄었지만요.”

나는 레오니트의 설명에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니나렛이 있던 별궁의 부패 행위를 밝혀낸 자가 바로 그였다. 그랬던 만큼, 니나렛이 걱정도 되고 마음이 쓰였겠지.

“그래서, 오늘 레이디를 찾은 이유에 대한 것입니다만.”

그렇게 말한 레오니트가 앉아 있던 자세를 바꿨다. 본론을 말하려는 것 같았다. 나 역시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어떤 제안이신가요?”

“레이디의 목표는 발렌티스 백작가의 가주와 후계자를 몰아내고 가문을 차지하는 것이겠지요?”

맞는 말이다. 지금까지 해 온 일들 모두가 그걸 위한 기반을 쌓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타인에게 내 입으로 긍정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기에 대답 없이 모호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그 또한 나에게서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는지, 잠깐의 침묵 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역시.

“그 대신 레이디께서도 저를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말씀 중에 실례지만, 전하.”

질책받는 것을 각오하고 황족의 말을 중간에서 끊어 버렸다.

하지만 레오니트는 전혀 불쾌하지도 않았는지, 신사다운 미소를 짓고는 정중하게 말했다.

“예, 말씀하십시오.”

“우선, 이런 제안을 해 주실 만큼 저를 높이 평가해 주셨다는 점. 영광으로 여기겠습니다. 그런데.”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저에게 황태제 전하의 제안을 거절할 수 있는 권한이 있나요?”

레오니트의 제안이 무엇인지는 듣지 않아도 추측할 수 있었다.

아마도, 손을 잡자는 것이겠지.

레오니트가 레고트 백부를 없애는 걸 도와주는 대신, 나는 그의 정적을 없애는 데 협력하라고.

그리고 레오니트의 적은 아마도.

‘란타나겠지.’

횡령으로 실각한 코튼 자작은 란타나의 세력이었고, 레고트 백부 또한 그녀의 사람이다.

게다가 레오니트가 란타나를 없애려는 이유는 충분하지 않나.

제위에 오를 그에게는 나날이 세력을 키워 가고 있는 란타나의 존재가 달갑지 않을 테니까.

지금도 란타나는 그녀의 사람인 라일라를 레오니트의 옆에 황태제비로 붙이려고 하고 있지 않은가.

솔직히 두 사람이 대립하는 게 당연한 입장일 수도 있었다.

‘황태제가 드러내 놓고 란타나와 싸우지 않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건, 그에게 도움을 받는다면 레고트 백부를 좀 더 빨리 없앨 수 있을 것이다.

레오니트에게는 란타나의 수족을 잘라 낼 능력이 있으니까.

…하지만 란타나를 적대하라니.

솔직히 말해서 신경이 쓰였다.

같은 음식에 알레르기를 가졌다는 점이라든가, 어디서 만난 것만 같은 묘한 기시감까지.

란타나가 나와 어떤 관계인지 확실하게 알지도 못하는 상황인데, 섣불리 결정을 내려도 되는 걸까?

그랬기에 레오니트에게 질문한 것이다. 나에게 그의 제안을 거절할 수 있는 권한이 있냐고.

만약 이야기를 전부 듣지 않은 상태라면, 안전하게 발을 뺄 수 있는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었다.

“물론, 레이디께는 거절할 권한이 있습니다. 염려하시는 부분,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레오니트는 내 걱정을 전부 알고 있다는 듯이 여유로운 목소리로 대답을 내놓았다.

“하나 약속드리지요. 만약 레이디가 어떤 대답을 내놓는다고 해도, 제가 당신에게 해를 끼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요.”

“…….”

“이미 짐작하신 것 같지만, 저는 디르케를 제거하고자 합니다.”

마치 평범한 날씨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은 평온한 목소리였다.

어쩌면 자신의 목을 걸어야 할 수도 있는 무거운 주제였는데도.

“레이디 발렌티스께서 저와 손을 잡아 주셨으면 합니다.”

“…당장 대답을 드려야 할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선택에 후회가 없으시도록, 충분히 고민하신 후에 답변해 주셔도 괜찮습니다.”

일단은 유예라는 걸까?

당장은 그걸로도 충분했다. 적어도 란타나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고 결정을 내리고 싶었으니까.

레오니트에게 알겠다고 말하려던 때였다. 그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더 덧붙였다.

“하지만.”

“전하?”

“레이디는 아마 저를 다시 찾으시게 될 겁니다. 저의 적은 당신의 적이기도 하니까요.”

“네……?”

그게 무슨 의미야?

의아한 눈빛으로 레오니트를 바라보았으나, 그는 말없이 웃기만 할 뿐. 더 대답이 없었다.

***

발렌티스 대부인의 저택으로 이동하는 마차 안에서도 레오니트가 했던 말이 계속 떠올랐다.

레오니트 황태제의 적이 내 적이기도 하다니. 그 말의 의미는.

‘…란타나가 내 적이라고?’

백부가 란타나를 따르고 있으니, 그녀가 내 적일 수는 있다.

하지만 이해관계란 언제든 변할 수 있는 법이다. 만일이지만, 란타나가 백부를 버리고 내 손을 잡을 수도 있는 일 아닌가.

게다가 레오니트도 그렇게 단순한 이유만으로 꺼낸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았다. 그럼 뭘까?

어째서 란타나가 내 적이라고 단정하듯이 말한 거지?

‘얼굴에 홀린 걸지도 모르겠지만, 그 사람… 그렇게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는데.’

장신구 사업으로 경쟁이 있었지만, 란타나가 비겁한 수를 써서 나를 방해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렇게 고민에 빠져 있다가 문득 정면을 바라봤을 때였다.

“듀이?”

마차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듀이가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듀이, 왜 그래?”

“네리아 님, 설마… 진짜 결혼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응?”

그것 때문에 저렇게 불안하게 떨고 있는 거였어?

듀이의 모습이 몹시도 심각해 보였기에, 갑자기 웃음이 터지며 긴장이 풀려 버리고 말았다.

‘뭐, 고민한다고 당장 답이 나올 문제도 아니니까.’

그랬기에 나는 레오니트나 란타나에 대해 생각하던 것을 멈추고, 마차 안의 대화에 참여하기로 했다.

“결혼? 절대 안 하지. 그걸 위해서 할머니를 찾아가는 거잖아?”

확신을 담아 말했다. 대부인의 환심을 살 수 있는 비장의 준비물까지 챙겨가는 상황이었다.

옆에 앉은 사샤 또한, 가당치도 않다는 말투로 말을 보탰다.

“아가씨의 짝으로 필립스 토르네? 말도 안 되죠. 저는 그분을 종종 뵈었는데, 레비 도련님보다 더한 쓰레기였단 말이에요.”

장소가 달리는 마차 안이었기 때문인지 사샤에게서 가차 없는 발언이 튀어나왔다.

레비도 대단한 쓰레기인데, 그보다 더한 쓰레기라니.

그녀는 레비의 전직 직속 하녀였던 만큼, 레비의 절친한 친우인 필립스 토르네의 만행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아가씨는 아가씨께 어울리는 분을 만나셨으면 좋겠어요. 혹시 눈여겨보신 분은 없으신가요?”

“눈여겨본 사람? 그다지.”

정말이다. 수확제에서 그레이 경에게도 했던 말이지만, 지금은 집안싸움이 바빠서 그런 쪽에는 관심을 가질 겨를이 없었다.

“그럼 좋아하는 외모나 성격이라거나, 그런 건 없으세요?”

“글쎄? 살면서 그런 걸 생각해 본 적이 없었거든.”

어차피 부모님께서 정해 준 사람과 결혼할 예정이었으니까. 하지만 굳이 고민해 본다면야.

“외모는 상관없어. 예쁜 게 보고 싶으면 거울을 보면 되니까. 대신 성격은 좋았으면 좋겠는데…….”

나는 팔짱을 낀 채로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언제 어느 때든 내 편이 되어 주고, 어떤 상황에서도 무조건 나를 믿어 주는 사람이면 좋겠어.”

나를 제일 중요하게 여겨 주는 사람이면 더 좋겠고.

조금 까다로운 조건이려나?

듀이와 사샤, 두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마차는 힘차게 길거리를 달려 나가고 있었다.

***

“…아가.”

발렌티스 대부인의 저택으로 미리 전서구를 보내 두어서인지, 그녀는 미리 손님맞이를 해 둔 상태로 나를 맞이해 주었다.

하지만 친손녀를 오래도록 방치했다는 미안함이나 죄책감 때문일까, 나를 대하는 대부인의 표정이 다소 경직되어 있었다.

“할머니! 그동안 건강하셨어요?”

그랬기에 나는 대부인에게로 달려들어 그녀의 품에 안겼다.

익숙한 할머니 냄새가 났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대부인이 멈칫 몸을 굳혔으나, 그녀는 곧 손을 뻗어 나를 껴안아 주었다.

“할머니, 식사 잘하고 계신 거 맞아요? 너무 야위셨어요.”

“나보다는 네가 더 걱정이구나.”

“저는 잘 먹고 다니고 있어요. 할머니가 걱정돼서 선물로 맛있는 걸 가져왔는데, 드셔 주실 거죠?”

“내 손녀의 선물인데 당연하지. 자, 안으로 들어가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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