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그리고 며칠 뒤, 레고트 백부가 나를 찾는 호출이 있었다.
이미 로이엔 경을 통해 소식을 접한 바 있었기에, 나는 별다른 의문 없이 백부의 집무실로 향했다.
“네리아, 네 혼처가 정해졌단다.”
책상에 앉아 있던 백부가 어울리지도 않는 근엄한 표정을 짓고는 그렇게 말했다. 옆에서는 백작 부인이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역시나, 그 이야기였다.
별로 의외는 아니었지만, 나는 생각하지 못했던 척 고개를 갸웃거리며 백부에게 되물었다.
“제 혼처요……?”
“그래. 결혼도 귀족의 의무다. 가문을 위한 일이니 군말 없이 따르도록 해라. 너도 지금까지 키워 준 값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
“백부님께서 언제 저를 키워 주셨다는 말씀이세요? 저는 귀족이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요?”
“뭐……? 어른에게 말대답이라니, 어디서 배워 먹은 버릇이더냐!”
찔린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지르는 백부를 보며 웃음을 삼켰다.
그러자 옆에 있던 백작 부인이 자애로운 표정을 짓고서는 나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네리아,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렴. 우리도 너를 이렇게나 빨리 보내려니 진심으로 섭섭하단다.”
저 인간들이 섭섭할 리가 있나.
하지만 그녀의 얼굴만은 진심으로 아쉬운 듯 보였다.
“그렇지만 너무 괜찮은 혼담이 들어와서 거절할 수가 없었단다. 그동안 네리아가 고생했던 만큼 좋은 짝을 만들어 주고 싶었거든.”
“상대가 누구인가요?”
“토르네 백작가의 후계자인 필립스 영식이란다. 토르네 가문이 굉장한 부자인 것은 알고 있지?”
“필립스 토르네라면…….”
레비의 친구 중 하나다. 그리고 레비와 어울리는 사람답게 그 역시 쓰레기로 유명한 자였다.
‘불법 약물을 취급해서 큰돈을 벌고 있다든가, 몸을 함부로 굴리기로 유명한 자였지?’
특히 손버릇이 나쁘며, 성병에 걸려 있다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퍼져 있기도 했다.
만약 그런 사람과 결혼이라도 하게 된다면, 내가 어떻게 될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필립스 영식과 결혼한다면, 네리아는 장차 토르네 가문의 안주인이 되어 풍족하고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을 거란다!”
“감사하게 생각하거라. 가문의 방계인 너를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어쨌거나 그렇게 알고 있으렴. 네 결혼을 준비하느라 당분간은 우리도 많이 바빠지겠구나.”
하지만 백작 부부는 나에게 대단한 은혜라도 베푸는 것처럼 이야기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나를 보내고 대가를 챙기는 건 그들일 거면서. 하여간 오늘도 예외 없이 뻔뻔한 인간들이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심부름을 보냈던 사샤가 방으로 돌아왔다.
“아가씨, 베른 경을 뵙고 왔어요.”
“뭐라고 하셨어?”
“토르네 가문에서 라일라 아가씨를 황태제비로 지지하겠다고 해요. 또, 결혼식 후에는 필립스 영식이 운영하는 사업의 지분을 넘겨받기로 했다네요. 무려 절반을요.”
“그래?”
베른 경은 내 추천을 받아 장남이 황녀의 수학 교사로 들어간 일로 반쯤은 내 편이 된 가신이었다.
내 결혼을 대가로 백부네가 무엇을 챙겼을까?
그것이 궁금하여 사샤를 보냈는데, 역시나 소문이 빠른 베른 경은 구체적인 답변을 보내왔다.
“그 사업, 돈이 많이 될 텐데 날 데려가겠다고 거금을 투자했구나?”
“그 정도는 되어야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가씨잖아요?”
당연한 거 아니냐고 반문하는 사샤를 보며 잠깐 웃었다.
“그 정도면 내 혼사가 무산됐을 때 백부님의 실망이 크시겠네?”
“네. 게다가 결혼을 주선해 주는 대가로 레비 도련님은 이미 거액을 받으셨다고 하네요. 심지어 그걸 경마장에서 탕진 중이라고…….”
“그건 레비답네.”
대가로 받은 돈을 이미 써 버렸다니. 만약 일이 잘못되면 레비가 상당히 곤란해지겠군.
“뭐, 어쨌거나 여러모로 혼담을 깰 보람이 있겠어.”
“아가씨, 어떻게 하실 거예요?”
“높은 분을 찾아가 봐야지.”
“높은 분이라면… 황녀님이요?”
“응? 가문의 일은 가문 내에서 해결해야지. 이런 일에 영향력을 행사할 권한이 있는, 집안의 더 큰 어른이 한 분 계시잖아?”
내가 신분을 되찾았었던 백작가의 연례 회의가 있던 날.
나를 보며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할머니, 발렌티스 대부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사샤, 시장에서 품질 좋은 밤을 구해 줄래? 할머니께서는 밤을 좋아하시니까 말야.”
“밤이요? 알겠습니다.”
“아! 좋은 찻잎도 같이 부탁할게.”
***
‘대부인을 모시려면 며칠은 걸릴 테니까, 황녀님께는 미리 말씀을 드리고 가야겠지.’
발렌티스 대부인이 거주하는 곳은 수도 외곽에 위치한 도시였다.
그녀는 원래 수도와는 멀리 떨어진 남부에 거주했으나, 차남인 내 아버지를 잃은 트라우마로 거주지를 옮긴 것이다.
‘남부의 저택보다는 가까워서 오가는 데는 편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이번 일로 며칠 정도는 니나렛을 만날 수 없게 되었기에, 오늘의 예법 수업을 겸해 그 소식을 전하고자 황녀궁으로 향했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다리스에 영광이 있기를.”
“어서 오세요, 선생님.”
황녀궁 내, 니나렛의 방.
니나렛이 의젓한 자세로 손등을 내밀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아이의 손등에 키스했다.
이 귀엽고 똑똑한 꼬마 황녀님은 빠른 속도로 예법을 익혀 나가고 있었다.
“전하, 예법 실력이 느셨어요.”
“응! 방금 전에 인사 왔었던 레오니트 숙부님도 칭찬해 주셨어.”
니나렛이 선생님 덕분이라면서도 자랑스러운 듯 콧대를 세웠다.
하지만 오늘의 교육 일정이 끝나고 내가 이야기를 전해 주자.
“결혼……? 선생님이 결혼을?”
다시 예법을 잊어버리고는 입을 커다랗게 벌렸다. 내 말에 상당한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네, 제 백부모님이 명령하셨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며칠만 예법 수업을 쉬어야 할-”
“아, 안 돼! 결혼은 안 돼!”
의자에서 내려온 니나렛이 내 쪽을 향해 빠르게 돌진했다.
나에게 팔을 뻗는 아이를 얼떨결에 안아서 무릎에 앉혔더니, 니나렛의 맑은 붉은색 눈동자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 있었다.
“안 돼! 절대 안 돼! 네리아 선생님은 나랑 결혼해야 한단 말이야!”
…응?
“니나렛 전하는 저랑 결혼하실 생각이셨어요?”
“당연하지! 선생님은 아니야?”
“저도 니나렛 전하를 좋아하지만, 결혼까지 하기에는 저랑 황녀님의 나이 차이가 너무 커서요.”
“나이는 상관없어! 폐하를 찾아가서 혼담을 엎어 버리게 할 거야! 이 결혼은 무효야!”
‘귀여워…….’
하지만 니나렛의 표정이 무척이나 진지했기에, 웃지 않도록 표정을 가다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거나 저도 당장 결혼할 생각은 없어요. 그래서 잠깐 할머니께 다녀올 생각이에요.”
“할머니?”
자초지종을 전부 들은 니나렛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불만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은 듯, 아이의 입술이 오리처럼 삐쭉 튀어나와 있었다.
“칫. 내가 폐하께 부탁해서 혼담을 엎어 버려도 되는데.”
“마음만 감사하게 받을게요.”
결혼같이 사적인 문제는 가문 내에서 해결하는 것이 모양새가 좋을뿐더러, 폐하께는 이미 한 번 특혜를 받은 적도 있으니까.
대신 나는 니나렛의 머리카락을 슥슥 쓰다듬어 주었다.
“발렌티스 백작, 마음에 안 들어.”
“저도 같은 의견이랍니다.”
“어쨌거나 며칠 동안이나 네리아 선생님을 못 보는 거잖아. 그럼 오늘은 더 놀다 가면 안 돼?”
“그렇다면 노는 게 아니라 수업을 더 하는 게 어떨까요?”
“구, 굳이? 그런 것보다… 아! 그런데 네리아 선생님은 왜 호위 기사를 데려오지 않아?”
나를 붙잡고 싶지만, 수업을 더 받기는 싫다는 건가.
니나렛이 말을 돌리려고 다른 화제를 꺼내는 것이 보였지만, 모르는 척 대답해 주었다.
“황궁까지 오는 길은 치안이 좋아 위험하지 않으니까요. 게다가 제 호위 기사는 아직 견습 신분이라 황궁에는 출입이 불가하답니다.”
“그럼 내가 출입 허가증을 써 줄게! 다음에 올 때는 데려와!”
“감사합니다, 전하. 소식을 들으면 듀이가 기뻐할 거예요.”
결국, 그런 식으로 1시간을 더 황녀궁에서 머물게 되었다.
니나렛은 그러고도 더 있어도 된다며 고집을 부렸지만, 이후로는 니나렛에게 다른 일정이 있었기에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
귀가를 위해 혼자 황녀궁의 복도를 걸어가는 동안에도 나는 미소를 숨길 수 없었다.
‘계속 같이 있으려고 하는 점도 예전 세계와 똑같지 않으려나?’
귀여우신 분 같으니라고.
‘이제 저택으로 돌아가면, 백부네에게는 대충 출장을 가는 척 둘러대고 대부인이 계신 곳으로-’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복도를 계속 걷고 있을 때였다.
“아! 죄송합니다-!”
맞은편에서 트레이를 들고 오던 하급 시녀가 발목을 삐끗한 것인지 갑작스럽게 몸을 휘청였다.
나는 그녀가 넘어지지 않게끔 곧장 몸을 붙잡아 지탱해 주었다.
“괜찮으세요?”
“실례했습니다, 레이디!”
다행히 시녀가 다치거나 하는 불상사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반동으로 그녀가 들고 있던 음료수가 쏟아져 내 드레스에 얼룩을 남기고 말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레이디! 드레스를 정리해 드릴 테니, 잠깐 저쪽 휴게실로 들어가시겠어요?”
시녀가 몹시나 당황스러운 듯, 몇 번이나 고개를 조아리고는 바로 옆에 있는 휴게실을 가리켰다.
“금방 닦아 드릴게요. 만약 드레스가 망가졌다면 제가 배상을-”
“어떤 분께서 절 찾으셨나요?”
“네?”
시녀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소곤거리자, 그녀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길을 걷다가 발목을 삐끗할 수도 있고, 실수로 드레스에 음료수를 쏟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걸 이유로 나를 자연스럽게 특정한 위치로 유인하는 것이 과연 단순한 우연일까?
아마도, 저 휴게실 안에서는 그녀의 주인이 기다리고 있겠지. 나를 만나기 위해서.
나는 시녀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황녀궁 소속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주인을 추측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시녀를 데리고 황녀궁에 드나들 수 있는 신분과 아까 니나렛이 나에게 지나가듯이 했던 말.
‘응! 방금 전에 인사 왔었던 레오니트 숙부님도 칭찬해 주셨어.’
그렇다면 아마도.
“레오니트 황태제 전하이신가요?”
“…예. 레오니트 전하께서 레이디 발렌티스와 대화를 원하십니다.”
굳이 감출 생각은 없었던 듯, 시녀가 순순히 사실을 털어놓았다.
“잠시 시간을 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레이디께 절대 해가 되는 일은 아닐 거라고 약속드리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