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은 셀프입니다 (60)화 (60/172)



<60>

“네리아 님이 장신구 사업에 크게 성공하셨다면서요?”

“들었습니다. 유명하더군요.”

“저도 아내에게 줄 선물을 사느라 네리아 님의 공방에 가 봤었는데, 늘어선 줄이 대단했습니다.”

발렌티스 저택의 휴게실.

백작가의 가신들이 근래에 가장 주목하는 사람은 전 가주, 카터 발렌티스의 외동딸인 네리아였다.

그녀는 수확제 이후로 줄곧 사교계에서 화제가 되어 왔기에, 굳이 찾으려 하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네리아의 이름이 들려온 탓이었다.

“놀랍지 않습니까? 연례 회의에서 사생아 누명을 벗은 일이 불과 얼마 전의 일인데, 벌써 이렇게까지 두각을 보이다니요.”

“이번 장신구 사업도 그렇습니다. 그분은 가진 것도 없는 맨손이었을 텐데 대체 어떻게……?”

“그거야 델프 가문에서 투자를 받았다고 하니까요.”

“투자를 받은 것부터가 능력 아닙니까. 보통은 투자를 받기도 어렵지만, 성공까지 시키는 일은 더 힘드니까요.”

“맞는 말씀입니다. 여기서는 ‘카터 님의 딸답다.’라는 표현이 가장 적당하지 않겠습니까?”

카터 발렌티스의 딸.

누군가가 꺼낸 이야기에 모두가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터는 발렌티스 가문을 부흥기로 이끌 것이라는 평가를 받던 유능한 인물이었다.

그가 불행한 사고로 죽지만 않았어도 발렌티스 백작가의 위상이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텐데.

휴게실에 있던 가신들의 표정에 순간적으로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예. 네리아 님은 카터 님의 친자이지 않습니까. 피는 속이지 못한다, 바로 그런 것이지요.”

“그런 분이 어떻게 몇 년이나 사생아 누명을 썼던 건지. 돌이켜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늦게라도 그분을 발렌티스 가문에 입적시킨 것이 다행-”

“왜 말을 어중간하게 하다 마는 겁니까? 가, 가주님?”

대화를 나누고 있던 가신들이 누군가를 발견하고는 황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휴게실의 열린 문 앞에서 발렌티스의 가주인 레고트가 그들을 차갑게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에 들어온 사람 누구야?’

‘왜 문을 똑바로 안 닫아서는!’

레고트에게 카터라는 이름은 금기였다. 가신들은 레고트의 눈치를 살피며 어정쩡하게 일어섰다.

“저, 저희는 쉴 만큼 쉬어서 이만 일을 하러 가 보겠습니다.”

“…….”

가주에게서 불벼락이라도 떨어질까, 그들은 줄을 지어 재빠르게 휴게실을 빠져나갔다.

레고트는 그런 가신들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끓어오르는 화를 눌러 삼켰다.

뭐? 카터의 딸답다고? 피는 속이지 못한다고?

그깟 어린애들 소꿉놀이 같은 사업이 뭐 대단한 일이라고-!

레고트가 다시 가던 길을 걷고는 집무실의 문을 걷어찼다. 그러고는 책상에 앉아 손에 잡히는 서류 더미를 집어 던졌다.

‘그놈의 카터, 카터, 카터, 카터!’

레고트는 인생의 반 이상을 동생의 그림자에 눌려 살아왔다.

‘별로 대단한 놈도 아니었건만!’

장남은 레고트였다.

그런데도 사사건건 비교를 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나중에는 원래 레고트의 것이었던 가주 자리까지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

그나마 카터가 죽어서 자리를 되찾을 수는 있었지만, 카터 쪽이 더 나았다는 말은 레고트가 가주가 된 후에도 그의 뒤를 따라다녔다.

레고트는 진심으로 동생의 그림자를 없애고 싶었다.

‘그래서, 몇 년이 지나고서야 겨우 카터 그놈의 이름이 세상에서 지워진 것 같았었는데……!’

이제는 카터의 딸이 설치고 다닌 덕분에 그놈의 이름이 또다시 세상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거슬리는 것 같으니라고.’

요즘은 조용히 다니는 것 같았건만, 그들 몰래 뒤에서 일을 벌이고 다녔다니.

가만히 놔둘 수는 없다. 카터의 딸이 사업에 성공했다는 이야기가 떠도는 걸 지켜볼 수만은 없지.

“집사!”

레고트가 옆에 있던 줄을 잡아당기자, 얼마 지나지 않아 백작가의 집사가 곧바로 달려왔다.

“부르셨습니까, 가주님.”

“지금 당장 라일라와 레비를 집무실로 부르도록.”

***

라일라는 가주 집무실 테이블에 앉아 책상 옆에 서 있는 그녀의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레고트는 한눈에 보아도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상태였다. 이유는 당연히 네리아 때문이겠지. 그런데.

“…….”

라일라가 말없이 옆자리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친오빠인 레비는 언제나처럼 몸에서 술 냄새를 한가득 풍기고 있었다.

‘어제도 이상한 사람들이랑 어울려서 술을 마시다가 새벽 늦게 귀가했다던가? 진짜 한심해서.’

라일라가 한숨을 삼키며 다시 고개를 정면으로 돌리자, 지금까지 말없이 서 있기만 하던 레고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내 조카의 장난감 사업이 성황리에 호평을 받고 있다지.”

“네, 아버지.”

라일라가 표정을 찌푸렸다.

인정하기 싫지만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최근의 사교계는 네리아가 만든 도자기 액세서리로 뒤덮여 있었으니까.

꽃 그림이 유치하다든가, 생긴 게 접시 같아서 이상하다는 험담을 은근히 흘려보았지만 통하지 않았다.

사교계에서 도자기 장신구를 하지 않은 사람은 라일라와 그녀의 추종자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내가 너희들에게 옛날부터 말하지 않았느냐. 네 숙부의 자식 놈에게는 절대 져선 안 된다고.”

“…….”

“레비.”

“예, 아버지.”

“어떻게 하면 좋을 것 같으냐.”

“그… 새벽에 공방을 습격해서 가게를 부수는 건 어떻습니까?”

“그걸 말이라고 해?”

레비의 의견에 라일라가 어처구니없다는 목소리로 대신 대답했다.

“번화가에는 고가품을 파는 곳이 많아서 새벽에도 경비를 선다는 거 몰라? 그리고 델프 상단이 뒤에 있으니 망가져도 금방 복구될 거야.”

“그럼 우리도 똑같은 것을 만들어서 그쪽보다 더 싸게 파는 건?”

“황제 폐하께서 다른 도자기 장신구 가게의 신규 출점을 1년 동안 금지하셨어. 넌 그것도 몰랐어?”

라일라의 목소리가 뾰족해졌다. 네리아의 성공에 위가 뒤틀리는 건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네리아 때문에 니나렛 황녀의 튜터 후보에서 탈락하고, 얼마 전에는 죽은 숙모의 유품을 돌려주지 않았다고 비난을 받기까지.

사촌 자매 때문에 사교계에서 얼마나 웃음거리가 되었던가.

라일라의 밑에 있었던 줄리아가 네리아와 손을 잡았다는 사실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더는 자존심을 구기기 싫었고, 네리아에게 지고 싶지도 않았다.

“아버지, 의견이 있어요.”

“그래, 말해 봐라. 라일라.”

“네리아의 유행을 뒤덮을 수 있는 다른 유행을 만드는 거예요.”

지금 없애지 않으면, 네리아의 사업이 잠깐 유행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완전히 자리를 잡아 버린다.

그 대책으로 생각해 둔 방법이 있기는 했지만, 과연 가주인 레고트가 허락해 줄지. 라일라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대신, 돈이 많이 들겠지만요.”

“돈보다 중요한 것이 명예 아니겠느냐. 어떤 방법이지?”

“저희 가문이 가지고 있는 벨라오스 광산을 이용하는 거예요.”

벨라오스라면, 멜비나 백작 부인이 네리아를 페어 레이디로 만들기 위해 란타나에게 뇌물로 바친 적이 있는 분홍색 보석이었다.

“아버지, 제 의견은…….”

레고트는 라일라의 이야기를 전부 듣고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라일라, 네 말대로 해 보자꾸나. 그런데.”

레고트가 한심하다는 눈길로 레비를 쳐다보며 끌끌 혀를 찼다.

“어떻게 너는 첫째라는 놈이……. 쯧쯧, 동생보다도 못해서야.”

“예?”

갑자기 가만히 있던 레비에게 화살이 날아왔다.

숙취로 소파에 기대 있던 그는 멍청하게 되묻다가 표정을 찡그렸다.

그의 부친은 카터 숙부에게 비교당하느라 고통받았다면서, 정작 장남인 레비를 둘째인 라일라에게 비교하며 깎아내리고는 했다.

“…….”

하루 이틀 일도 아니었다.

언제나 모순이라고는 생각했지만, 레비는 이번에도 반항하지 않고 레고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어차피 라일라는 결혼하여 황후가 될 것이고, 레비가 차기 발렌티스 가주가 되는 건 확실했으니까.

그의 입장은 동생이라는 경쟁자가 있었던 레고트와는 달랐다.

‘이해심 많은 내가 참아야지.’

그저 이렇게 불편한 상황을 만들어 낸 그의 사촌 동생 네리아에게 짜증이 날 뿐이었다.

***

“사샤, 그렇게 마음에 들어?”

방 안에서 매출 보고서를 검토하다가 고개를 돌리자, 머리에 도자기 머리핀을 꽂은 사샤가 거울을 아까부터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네, 당연히 마음에 들어요!”

“더 갖고 싶으면 말만 해. 얼마든지 주문해서 가져다줄 테니까.”

사샤에게는 더한 것을 해 줘도 아깝지 않지. 나는 기뻐하고 있는 그녀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동안 얼마 안 되는 예산으로 살림을 꾸려 나가느라 사샤가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던가.

필요한 물건을 조금이라도 더 저렴하게 구하기 위해 힘들게 뛰어다니기도 했었다. 고맙지 않을 수가 없지.

“아뇨, 아가씨. 저는 머리핀이 마음에 든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거울 앞에 서 있던 사샤가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제 주인님이 만든 물건을 그렇게 많은 사람이 하고 다닌다는 게 너무 신기하고 뿌듯해서요.”

“그랬어?”

사샤가 어떤 이야기를 하는 건지 알 것 같았다.

그녀는 사회의 흐름을 만드는 귀족들의 영향력을 동경한다고 했다.

그러나 평민인 본인은 할 수 없는 일이니, 귀족의 하녀가 되어 거기에 보탬이라도 되고 싶었다고.

“사샤, 네 덕분이지. 네 도움이 없었더라면 애초에 사교계에 제대로 발을 붙이지도 못했을걸?”

“하지만 굳이 제가 아니더라도 아가씨는 괜찮으셨을 것 같아요.”

“아니야, 네 덕분이 맞아.”

필요한 정보를 알려 주기도 하고, 내가 귀족 사회에 무리 없이 녹아들 수 있도록 사샤도 노력했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고마워.”

“…앞으로도 아가씨가 가시는 길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게요.”

“넌 이미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감격한 듯이 눈물을 글썽이는 사샤를 보며 웃었다.

그러고 보면 고마운 사람들이 많았다. 엔이나 비비, 씨씨 같은 동료 하녀들이나 나를 뒤에서 도와줬던 저택의 좋은 사람들.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서 돈을 벌게 된 후에 선물을 샀었다.

하지만 혹시라도 나와 사적으로 접촉했다는 사실이 하녀장에게 발각되어 그녀들이 해코지라도 당할까 봐 전해 줄 수는 없었다.

‘적당한 기회를 노려야겠어.’

똑똑-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사샤가 잽싸게 눈물을 훔치고 문을 열자, 바깥에 로이엔 경이 서류 몇 장을 들고 서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네리아 님. 저번 달 예산 내역서를 가져가지 않으셔서 가져다 드리려고 왔습니다.”

“사샤를 보낸다는 걸 깜빡한 것 같네요! 잠깐 들어오시겠어요?”

자연스럽게 로이엔 경을 방으로 들인 후, 사샤에게 문을 닫게 했다.

예산 내역서는 이미 받았는데 그가 왔다는 건, 나에게 무언가 용건이 있다는 의미였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생겼다…고 할 것까지는 아니지만, 알려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왔습니다. 가주님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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