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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셀프입니다 (58)화 (58/172)



<58>

“그래서 저는 네리아 양의 생각 이상으로 당신께 감사하고 있답니다.”

“백작님께서 단순히 그림 하나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실 리가 없잖아요? 그동안 줄리아 양이 이룬 성과들이 누적된 결과겠지요.”

그렇게 답하는 내 입가에도 미소가 걸렸다. 응접실이 훈풍이 불어오기라도 한 것처럼 훈훈한 분위기로 가득 찼다.

“어쨌거나 저도 네리아 양에게 보답하고 싶었답니다. 그래서 얼마가 필요하신가요?”

“이 정도 되는 금액인데요.”

줄리아에게 액수를 알려 주자, 그녀가 어렵지 않다는 듯이 곧바로 긍정을 표시했다.

“제가 독단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범위 내네요. 그런데 어디에 사용할 것인지 여쭤보아도 되나요?”

“물론이죠. 시도해 보고 싶은 사업이 있거든요.”

“네리아 양이… 사업을요?”

어느샌가 그녀의 상체가 눈에 띄게 앞으로 기울어졌다.

줄리아 역시도 델프 가문이 운영하는 사업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어서인지, 사업이라는 말에 호기심을 보이는 것 같았다.

“혹시 어떤 분야인지도 여쭤봐도 될까요?”

“어떤 분야라고 물으신다면.”

나는 그녀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차피 대출을 부탁할 때 사업 계획을 설명할 생각이었고, 다른 사람의 객관적인 의견도 함께 들어 보고 싶던 차였다.

“도자기와 관련된 쪽이에요.”

“도자기라면 잔이나 접시를 말씀하시는 거죠? 솜씨 좋은 도공을 확보하기도 어렵겠지만, 이미 자리 잡은 공방이 있어서 뒤늦게 경쟁에 끼어들기가 힘들 텐데요.”

줄리아가 내 이야기에 우려를 나타냈다. 타당한 반응이기는 했다.

수도에는 이미 고품질의 도자기를 생산하는 공방들이 존재했는데, 그들의 기술력이나 생산 체계는 개인이 단기간에 따라잡을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기존 공방들과 차별화가 가능한 요소가 있어야 할 거예요. 혹시 구체적인 계획은 있으신가요?”

“계획이라면 일단, 제가 도자기로 만들고 싶은 건 그릇이 아니에요.”

나는 가져온 목걸이 하나를 줄리아의 앞에 내밀었다.

시장조사 겸 공부를 위해 듀이와 번화가에 갔던 날.

찻잔의 깨진 조각을 가져온 적이 있었는데, 조각의 날카로운 가장자리를 둥글게 다듬고 거기에 목걸이 줄을 달아 놓은 것이었다.

“저는 도자기로 장신구를 만들 생각이에요.”

“장신구요?”

줄리아가 예상하지 못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목걸이를 받아 들었다.

적당히 만든 시제품이라 품질은 조악했지만, 조각에 그려진 파란색 장미꽃이 상당히 예뻐서 장신구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도자기는 일반적으로 그릇을 가리키는 말이었고, 액세서리는 주로 보석을 이용해 만들어진다.

나는 그 두 가지를 섞은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 도자기로 만든 장신구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유행이 되거나, 사람들이 보편적인 장신구로서 인지하고 있을 만큼 주류였던 적도 없었다.

그렇다면 이 부분의 특이점을 살릴 수도 있지 않을까?

“작은 도자기 조각을 만들어 그림을 그린 뒤, 보석을 장식하거나 주변에 금속 테두리를 두르는 거예요. 고급스럽게 만들기만 한다면 귀족들에게도 통하지 않을까요?”

“…작은 조각이라서 상대적으로 만들기는 쉬울 텐데, 도자기의 비싸고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가져올 수 있다는 장점도 있겠네요.”

“그 점을 노린 것도 있어요. 게다가 그림에는 한계가 없잖아요?”

“한계라고 한다면요?”

“지금 가져온 건 꽃 그림이지만, 손님이 원하는 걸 뭐든 그려 줄 수 있어요. 풍경이 될 수도 있고, 초상화가 될 수도 있겠죠. 그렇다면 한 명이 그림에 따라 여러 개의 수량을 구매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렇군요.”

어쩐지 줄리아가 심각한 표정을 짓고서는 내가 가져온 목걸이를 한참동안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왜 다른 말이 없는 거지?’

나는 그 반응을 지켜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내가 말한 계획이 별로여서? 아니면 반대로 괜찮아서?

장점을 언급해 준 걸 보면 아예 부정적으로 판단하지는 않은 것 같건만.

“네리아 양.”

그러다가 어느 순간, 줄리아가 진지한 얼굴로 내 이름을 불렀다. 그녀의 목소리가 확신에 차 있었다.

“이 도자기 액세서리, 대출이 아니라 투자를 하고 싶어요.”

“네?”

“상품 가치가 확실해 보이거든요. 저와 동업하지 않겠어요? 네리아 양에게도 나쁜 제안은 아닐 거예요. 어떤 의미인지 아시죠?”

모를 리 없지. 나는 줄리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건물을 매입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도공이나 점원을 채용하거나 재료를 수급하는 문제까지.

작은 공방을 만드는 일이라도 그 과정이 절대 간단하지는 않았다.

‘예전 세계였다면 내가 명령만 해도 그걸 실행해 줄 가신들이 넘쳤지만, 지금은 사람이 없으니…….’

만약 줄리아에게 자본금을 빌리게 되면, 기초적인 일부터 배워 가면서 작업을 시작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녀와 손을 잡는다면 그 과정이 매우 간단해진다.

줄리아의 거점은 동부이지만, 그녀의 가문은 수도에도 상단을 보유하고 있기에 그들이 보유한 정보와 실무 능력으로 빠르고 효율적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다.

그녀의 말처럼, 나에게 나쁜 제안이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계약 조건은… 좋아요, 수익금을 6:4로 나누죠. 하지만 제가 수익금을 가져가는 건 투자 비용을 전량 회수하는 시점까지예요.”

“네?”

“투자금 회수가 끝난다면 제 지분을 모두 네리아 양에게 넘길게요. 대신 동부에서의 판매권을 제가 가져가겠어요. 어떤가요?”

“제안은 감사하지만, 저에게 너무 유리한 조건 아닌가요?”

로이엔 경에게 굳이 조언을 받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이 거래에서 나는 손해 보는 일이 전혀 없었으니까.

투자를 하겠다는 말은 사업이 실패해도 그 위험을 줄리아가 전부 부담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녀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말씀드렸다시피, 델프 가문의 사람은 은혜를 확실하게 갚는답니다. 그리고 이 목걸이, 정말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 말씀은 진심으로 기쁘네요.”

“게다가 제가 수도에 머무는 동안에도 무언가 성과를 냈다고 아버지께 어필할 수도 있잖아요? 저에게도 손해 보는 일은 아니에요.”

줄리아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대신 네리아 양은 저희가 만든 장신구를 착용하고 최대한 많은 사교 모임에 참석해 주세요. 그 얼굴이 최고의 홍보 수단이니까요.”

“그거야 당연하죠.”

성공을 다짐하며, 나 역시 그녀의 손을 맞잡고 악수했다.

“저에게 투자하신 것에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어요.”

***

줄리아와 공방을 만드는 일은 최대한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만약 내 계획을 백부네가 알게 된다면, 어떻게든 방해 공작을 펼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번거롭겠지만, 양해 부탁할게요. 줄리아 양도… 아시죠?’

‘아주 잘 알죠. 라일라 영애의 부하 노릇을 하느라, 네리아 양의 드레스와 목걸이에 수작을 부리려고 했던 사람이 저 아니었던가요.’

다행히 줄리아도 내 상황을 이해해 주었다.

그렇게 델프 가문 상단의 협조로 공방을 만드는 일이 빠르고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바로 오늘.

“아가씨! 완성품이 도착했어요!”

사샤가 상자 세 개를 방으로 가져왔다.

장신구 사업을 준비하느라 고생한 건 사샤도 예외가 아니었기에 그녀의 눈 밑에 그림자가 져 있었다.

“고생했어, 사샤! 겨우 날짜에 맞췄네. 그럼 어디.”

세 개 중 하나의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목걸이와 반지, 귀걸이 등이 한 세트로 들어 있었다.

“우와! 너무 예쁜데요?”

나는 사샤의 감탄사를 들으며 내용물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작고 새하얀 도자기 조각 위에 아름다운 꽃이 그려져 있었고, 거기에 금으로 테두리를 만들었다.

도공과 화공, 귀금속 세공사의 손을 거쳐 만들어진 이 작품은, 내 눈으로 평가해도 특별히 흠을 잡을 곳이 없는 최고급품이었다.

나는 귀걸이와 목걸이를 걸고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이 정도면 까다로운 귀족들의 기준에도 부족함이 없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사샤를 불렀다.

“나한테 온 초대장들 있지?”

“네, 아가씨. 티파티랑 살롱, 각종 연회까지 다양하게 있어요.”

“좋아. 중복되는 일정만 제외하고 전부 참석하겠다고 답장을 보내.”

***

공방에서 만든 액세서리를 걸치고 가장 먼저 참석한 장소는, 에모리 공작가에서 주최하는 연회였다.

‘네리아 양이 새로운 주얼리를 선보일 계획이라고요? 마침, 추천할만한 장소가 생각나는군요.’

‘추천 장소요? 어디인가요?’

‘바로 저희 에모리 저택에서 열리는 연회랍니다!’

클로이의 모친, 에모리 공작 부인은 파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각종 이유를 붙여 가며 연회를 주최하고는 했는데, 이번 역시도 그런 자리의 일환이었다.

‘제 동생의 생일 파티예요. 다만, 동생은 없어요. 영지 시찰에 나가 있거든요. 주인공 없이 어머니가 기분만 내는 연회라는 거죠.’

어머님께서는 여전히 유쾌하시네요, 라고 대답하려다가 참았다.

물론 이유야 어찌 되었건 에모리 공작가와 인연을 맺으려는 사람은 차고 넘쳤기에 그들의 연회는 언제나 많은 방문객으로 북적였다.

그런 만큼 내가 만든 장신구를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소개하기에 매우 적합한 장소이기도 했다.

‘어머니께는 제가 말씀드려 놓겠어요. 연회가 새로운 아이템으로 화제가 되면 분명 저희 어머니도 즐거워하실걸요?’

‘부탁해요, 클로이 양. 이렇게까지 신경 써 줘서 정말 고마워요!’

‘저희 사이에 고맙기는요.’

그러한 대화를 거쳐, 연회 당일.

나는 익숙한 기분으로 에모리 공작가의 저택에 발을 들였다.

‘여기는 그대로네.’

클로이와는 어린 시절부터 교류가 잦아 서로의 집에 놀러 가는 일이 많았는데, 에모리 저택은 여기나 그곳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벽면에 걸린 초대 가주의 초상화라든가 로비를 가득 장식한 수선화도 그대로였다.

어쩐지 반갑다고 생각하며 파티가 열리는 연회장 안으로 입장했더니, 그곳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도착해 시끌벅적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호스트인 에모리 공작 부인과 클로이를 찾아봤더니, 그녀들은 이미 다른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랬기에 우선은 기다리고 있으려고 했는데 어느샌가 얼굴이 익은 영애들이 나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발렌티스 양!”

“오실 줄 알았어요! 볼 때마다 아름다우시네요. 오늘도 눈이 부셔서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어……!”

다른 가문의 티파티에서 안면을 튼 영애들이었다.

그중에서 한 명이 과도한 동작으로 눈을 가리기에 나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칭찬 고마워요! 그렇지만 부끄러우니까 너무 놀리지는 마세요.”

“놀린 거 아니고 진짠데…….”

“어? 그런데 네리아 양의 귀걸이랑 목걸이, 처음 보는 모양이에요.”

“그러네요?”

역시나 그녀들이 내가 걸치고 있는 액세서리에 관심을 보였다.

“자세히 봐도 될까요?”

“물론이죠.”

보면 안 될 리가 있나. 그게 오늘의 가장 큰 목표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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