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시작은 귀족들을 상대로 최고급품을 취급하는 가게부터였다.
“요 몇 년간, 수도의 유행을 선두에서 이끄는 분이라면 아무래도 란타나 님을 꼽을 수 있겠지요.”
처음 발을 들인 공방에서, 점원이 기다란 깃털이 장식된 작은 모자를 나에게 보여 주었다.
“건국제에서 란타나 님께서 착용하신 후, 주문량이 급격히 늘어났지요. 지금까지도 많은 분께서 찾고 있으십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물건도 구경할 생각에 고개를 돌렸더니, 가장 중앙에 있는 유리 전시대에 진주로 만든 귀걸이가 있었다.
“아! 저것은 공방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품목입니다.”
눈치 빠른 점원이 곧장 내 시선이 닿은 물건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란타나 님이 자주 착용하는 것이거든요. 아마 수도 귀족분이시라면 하나씩은 가지고 계실 겁니다.”
“이것도 란타나 님이요?”
대체 몇 번째 나오는 이름이야?
이번에도 란타나가 나올 정도라니. 그녀가 수도 사교계를 휘어잡고 있다는 사실만은 알 것 같았다.
그 뒤로도 번화가의 다양한 고급 공방들을 찾아다녔지만, 처음 방문했던 가게와 획기적으로 다른 부분은 없었다.
그랬기에 다음으로는 평민들의 거리로 향해 이동했다.
다만 상대적으로 치안이 나쁜 곳이다 보니, 어디선가 불량배들이 나타나 시비를 걸어오기는 했다.
“이런, 이런. 귀하신 분께서 겁도 없이 잘도 이런 곳을-”
“듀이.”
그러나 듀이가 가볍게 제압하여 길바닥 구석에 처박아 두었다.
그 뒤로도 가끔 불량배가 등장했지만, 내 옆에 있는 믿음직스러운 견습 기사님 덕분에 불편함 없이 거리를 돌아다닐 수 있었다.
평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가게에는 장식보다는 실용성에 초점을 둔 물건들이 많았는데, 그러다가 우연히 들른 잡화점에서는 처음 접하는 특이한 물건을 발견하기도 했다.
“이건, 동물 귀 모양의 머리띠?”
각종 동물의 귀를 형상화하여 머리에 쓸 수 있게 한 것이었다.
나는 고양이 귀를 쓰고서는, 듀이에게 토끼 귀를 씌운 뒤 진지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네, 네리아 님?”
“으음.”
귀엽긴 한데, 귀족들이 공개적으로 하고 다니기에는 조금…….
아쉬워하며 머리띠를 내려놓았다.
“다른데도 가 봐야겠어. 나 따라다니려니까 재미없지?”
“아뇨! 그럴 리가요!”
절대 그렇지 않다며 고개를 휘젓는 듀이를 보며 웃었다.
그렇게 평민 거리를 걷다가 다시 귀족들의 번화가로 이동하기까지.
거의 두어 시간을 더 부지런히 돌아다녔는데, 열심히 움직여서인지 슬슬 피로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이대로 저택으로 바로 돌아갈 수도 있겠지만.’
팔짱을 끼며 고민하다가, 고개를 돌려 듀이를 쳐다보았다.
“네리아 님?”
순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대는 그는 중간에 불량배를 제압하느라 체력 소모가 컸을 텐데도 피곤한 기색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였다.
그렇지만 여러모로 고생도 많았고, 마침 번화가의 정중앙까지 들어오기도 했으니…….
“듀이는 티룸에 가 본 적 없지?”
“네? 티룸이 뭐예요?”
***
황궁 출신 셰프가 운영하는 티룸은 디저트가 맛있기로 유명해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은 곳이었다.
주 손님이 귀족들인 만큼 외부도 내부도 고급스러운 시설을 자랑했는데, 듀이는 그 모습에 기가 죽은 것 같았다.
“제가 이런 데 와도 되는 건가요?”
“당연하지. 내 기사님이잖아.”
맞은편 테이블에 앉은 듀이가 안절부절못하고 있기에 손으로 턱을 괴고는 미소를 지었다.
어쨌거나 오늘은 듀이에게 맛있는 음식을 먹이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동안은 공부와 검술 훈련이 너무 바빠 이런 부분에는 신경 써 주지 못했는데, 가끔은 이렇게 놀러 나오는 것도 좋지 않으려나.
테이블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으니 주문한 음식이 금방 나왔다. 따뜻한 홍차와 크렘 브륄레였다.
“어, 이건.”
처음 보는 음식에 듀이가 당황해하기에, 내가 먼저 스푼을 들어 크렘 브륄레를 한 입 떠먹었다.
내 쪽을 힐끔대던 듀이도 나를 따라서 어설프게 스푼을 움직였고, 그가 디저트를 입에 넣었을 때.
“우와.”
듀이가 작은 감탄사를 내뱉으며 커다랗게 눈을 떴다.
“맛있어? 입맛에 맞아?”
“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은 태어나서 처음 먹어 봤어요!”
듀이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차올랐다. 그 모습에 뿌듯한 감정이 느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꼭 성공해서 듀이가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게 해 줘야지.’
부지런히 접시를 비워 가는 소년을 보며 나는 진지하게 결심했다.
“부족하면 더 시켜 줄 테니까 마음껏 먹고 편하게 말해 줘, 알겠지?”
“네, 잘 먹겠습니다!”
나는 마카롱을 한입에 넣어 먹는 듀이를 흐뭇하게 쳐다보다가, 미지근해진 홍차를 마셨다.
그러고는 듀이가 음식을 먹는 동안 잠깐 다른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래서 공방 순회의 목적이었던 괜찮은 아이디어가.’
딱히 없다. 안 생겼다.
가게를 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 본 것은 많았지만, 당장 좋은 생각이 떠오른 것은 아니었다.
특이한 것이라면 동물 귀 머리띠가 있었으나 그건 품위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소품이기에 내가 추구하는 방향과는 맞지 않는다.
저택에 돌아가서 쉬다 보면 생각이 나려나. 다양한 사업을 성공시킨 부모님이 새삼스레 존경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듀이는 목이 말랐는지 홍차가 든 찻잔을 집어 들고 있었다.
티룸에서 사용하는 도자기 잔은 평민들이 사용하는 투박한 컵과는 생김새가 전혀 다르다.
듀이는 이번에도 내가 찻잔을 들고 있는 모습을 따라 하며 손을 움직였는데, 그에게는 작고 얇은 손잡이가 낯설어서였을까.
쨍그랑-
“으앗!”
“듀이! 괜찮아?”
듀이가 들고 있던 찻잔을 실수로 떨어트리고 말았다.
홍차가 쏟아졌고, 도자기 잔은 날카로운 파열음을 내며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차가 이미 식었기에 듀이가 화상을 입지는 않았다는 점이었다.
나는 허둥대며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듀이를 곧바로 안심시켰다.
“죄, 죄송해요! 제가 컵을……!”
“괜찮아. 별일 아냐. 그보다 도자기 파편이 날카로워서 손을 벨 수도 있으니까 조심해야 해.”
사고를 수습하고자 점원이 달려왔고, 나 역시 근처에 떨어진 조각을 찾기 위해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
어째서였을까, 다른 때였다면 아무런 생각 없이 치워 버렸을 텐데.
듀이가 들고 있던 찻잔은 파란색 꽃이 그려진 잔이었다. 그리고 내 눈앞에는 파란색 꽃이 피어 있는 작은 도자기 조각이 떨어져 있었다.
‘네리아 님께 꽃이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요.’
마차 안에서 그렇게 말하던 듀이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리고 여기에도 꽃이 있었다.
나는 도자기 조각을 주워 들었다. 이거, 어쩌면 꽤…….
“레이디! 다치실 수 있습니다. 저희가 치울 테니 버려 주세요!”
“실례지만, 이 조각을 제가 가져가도 될까요?”
…괜찮은 아이디어가 드디어 떠오른 것 같다. 확신에 찬 미소가 지어졌다.
‘그렇다면 다음 문제는 자본금을 구하는 것인데.’
나는 머릿속으로 붉은 머리카락에 주근깨를 가진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렸다.
***
동부의 대부호, 델프 가문이 소유한 수도의 저택은 웬만한 중앙 귀족의 저택보다 규모가 더 컸다.
관리가 잘된 잔디를 걷고 있으니 새하얀 대리석 분수대에서 청량한 물소리가 들려왔다.
내부까지 직접 들어온 건 처음이라고 생각하며 저택 안으로 발을 들이자, 줄리아가 입구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네리아 양, 델프 저택에 찾아 주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해요!”
“반겨 줘서 고마워요, 줄리아 양. 방문 신청을 드리자마자 수락해 주실 줄은 몰랐거든요.”
“네리아 양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응접실로 모시겠어요.”
줄리아의 안내를 받으며 응접실로 향하자 테이블에는 이미 호화스러운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동부의 특산품인 타타르 열매로 만든 타르트를 한 입 먹고는 놀란 듯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타타르 열매에서 쓴맛을 완전히 제거하는 일이 쉽지 않을 텐데, 주방장의 솜씨가 훌륭하네요.”
“아버지께서 수도로 오시면서 본가에서 데려온 주방장이거든요.”
“아버지라면… 델프 백작님께서 벌써 수도에 도착하셨나요?”
“네. 이사벨라 님이 초상화를 그려 주시기로 했다는 연락을 받자마자 가속 마법이 걸린 마차까지 타고 곧장 수도로 오셨거든요.”
줄리아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유난이시죠? 지금은 한창 수도를 관광하는 중이시랍니다.”
“백작님께서 기뻐해 주시다니, 저도 조금은 보탬이 된 것 같아서 저까지 기쁠 따름이에요.”
“조금이 아니죠! 이사벨라 님을 소개받는다고 해도, 초상화 의뢰에 성공한다는 보장까지는 없었잖아요? 전부 네리아 양 덕분이에요.”
“저보다는 아버지를 생각하시는 줄리아 양의 마음이 통한 거겠죠.”
서로를 칭찬하는 말이 몇 번이나 더 오가며, 응접실이 화기애애한 웃음소리로 가득해졌다.
‘그렇다면.’
분위기도 좋아졌으니 슬슬 본론을 꺼내도 될 것 같다. 나는 미소 띤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실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찾아온 건, 줄리아 양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기 때문이에요.”
“어떤 부탁인가요?”
“돈을 빌리고 싶어요.”
“좋아요. 빌려 드릴게요.”
“…네?”
수확제가 끝난 후, 그녀는 나에게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연락해 달라는 편지를 보냈었다.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운을 뗐는데 줄리아가 조금의 고민도 없이 흔쾌히 대답을 내놓았다.
그 즉각적인 대답에 오히려 놀란 것은 내 쪽이었다.
줄리아와 그녀의 가문에 재산이 많은 건 맞지만, 내가 얼마를 빌려 달라고 할 줄 알고?
“금액을 듣지도 않고 바로 확답해 주셔도 되는 건가요? 적은 액수가 절대 아닌데요.”
“얼마라도 상관없어요. 델프 가문의 사람은 은혜를 확실하게 갚거든요. 아까 했던 이야기 말인데요.”
줄리아가 기쁜 얼굴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이사벨라 님을 모신 일로, 아버지께 기대 이상의 극찬을 받았거든요. ‘이 정도 추진력이면 너에게 중요한 걸 맡겨도 될 것 같다.’라고.”
“중요한 것이라면…….”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델프 가문의 차기 가주 자리겠지.
“확정은 아니지만, 칭찬에 인색한 아버지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고무적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