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수도의 유명 보석상이 내 어머니께 헌정한 파란색 장미 귀걸이.
내가 이 세계에 떨어졌던 첫날, 라일라의 귀에 걸려 있던 물건이기도 했다.
라일라는 그 귀걸이가 마음에 들었는지 꽤 자주 착용하고 다녔는데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몇 년이나 가지고 있었을 테니 무의식적으로도 아예 본인 소유의 물건처럼 생각한 것 같지만.
‘내가 귀족으로 돌아온 이상, 이제는 아니지.’
나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라일라에게 상냥하게 말했다.
“그건 어머니께서 제일 좋아하던 장신구였어. 그렇지만 라일라에게도 참 잘 어울려.”
“잠깐, 네리아-”
“네? 뭐라고요? 라일라 발렌티스 영애가 한 귀걸이가 네리아 양의 돌아가신 어머니의 물건이라고요?”
클로이는 눈치가 빨랐다.
그녀가 다른 사람까지 들을 수 있게끔 일부러 커다란 목소리로 주의를 끌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이쪽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발렌티스 양의 귀걸이가요?”
“아… 듣고 보니 저도 생각이 나는군요. 로즈 백작 부인이 살아 있을 때 자주 하고 다녔지요.”
“네! 저도 기억이 나네요. 그때 푸른색 산호로 만든 액세서리가 수도에 유행했었잖아요?”
“맞아요. 그게 그 귀걸이였네요! 그동안은 의식하지 않아서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캐롤린 부인의 살롱에는 어린 영애들 외에도 부모님 나이대의 귀부인이 많았다.
꼭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그녀들은 과거 이야기를 꺼내며 내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시켜 주었다.
클로이는 이번에도 사람들이 들을 수 있게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어째서 네리아 양 어머님의 물건을 발렌티스 양이 가지고 있는 거죠?”
“에모리 공녀, 그건.”
라일라가 클로이의 말에 해명하려고 하기에 이번에도 내가 먼저 선수를 치기로 했다.
라일라가 본인에게 유리한 쪽으로 말하게 놔둘 수는 없지.
“클로이 양, 귀족들의 재산 분쟁 문제는 시효가 짧잖아요? 그러니 저 귀걸이의 소유권이 라일라에게 있는 게 맞아요. 비록… 돌아가신 제 어머니의 물건이라도요.”
마지막은 일부러 구슬픈 표정과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들의 머리가 아닌 감정을 건들 수 있도록.
그러자 주변의 웅성거림이 더 커지기 시작했다. 주로 나를 안타까워하거나, 라일라의 행동이 심했다며 비난하는 이야기들이었다.
“네리아 양, 저는 도의적인 부분을 언급한 것이지, 시효나 소유권을 따지려는 것이 아니었어요.”
클로이는 나를 안쓰럽다는 눈길로 쳐다보고 있었다. 물론, 진심은 아니고 나와 박자를 맞춘 것이다.
“그도 그럴 게 어머님의 유품이잖아요? 사이 나쁜 사람들이 다툴 때도 서로의 부모님을 건드는 건 금기일 정도인데.”
“그거야 그렇지만…….”
“발렌티스 양, 돌려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주제넘은 소리인 건 알지만, 유품이 아니라면 저도 이런 말은 하지 않았을 거예요.”
주변에서도 클로이의 말에 동의하는 쑥덕거림이 일었다. 이렇게 되니 난처해진 쪽은 라일라였다.
“…오래 가지고 있던 물건이라 제가 깜빡 잊고 있었네요.”
라일라가 억지웃음을 지으며 내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네리아, 돌려 달라고 말을 하지 그랬어. 그럼 줬을 텐데, 졸지에 내가 나쁜 사람이 돼 버렸잖아.”
돌려주기는 무슨. 내가 개인적으로 말해 봐야 소유권 문제를 들먹이며 본인이 가졌을 거면서.
“그러네. 내가 나빴어. 미안해! 그렇지만 말을 꺼내기가 조심스러워서 그랬어. 이해해 줄 수 있지?”
“…….”
하지만 내가 깔끔하게 사과해 버리자, 라일라도 더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어졌다.
이제 저 귀걸이를 나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왜 쓸데없이 또 시비를 걸어서 본전도 못 찾고 손해를 보는 건지.’
여전히 억지웃음을 짓고 있는 라일라를 보며 속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
다음 날 오후, 나는 칼리를 만날 목적으로 듀이와 함께 루체테 잡화점으로 향했다.
귀에는 라일라에게 돌려받은 파란색 장미 귀걸이를 착용한 채였다.
‘억울해하는 표정이 대단했었지.’
귀걸이를 돌려주던 라일라의 얼굴이 떠올라 또다시 픽, 웃었다.
이런 식으로 돌려받게 될 줄은 몰랐는데. 어쩐지 오늘은 일이 잘 풀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듀이, 그럼 들어가 볼까?”
중요한 건 초반의 기세다. 일부러 더 힘차게 걸으며 잡화점 안으로 발을 들이려고 할 때였다.
“이런!”
문을 연 순간, 하필이면 안쪽에서 동시에 사람이 튀어나왔다.
자연스럽게 충돌이 발생했다.
듀이가 옆에서 나를 붙잡아 주었기에 넘어지지는 않았으니, 나와 부딪친 남자는 들고 있던 서류와 선물 상자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내 시선이 바닥에 떨어진 종이 뭉치로 향했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남자가 재빠르게 서류를 수습했기에, 내가 종이에서 알아본 것은 겨우 두세 개의 단어뿐이었다.
‘코튼 남작, …횡령?’
코튼 남작이라면, 란타나의 부하 중 하나로 레고트 백부와도 같은 편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실례했습니다, 레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신지요?”
어느새 눈앞의 남자가 떨어트린 물건을 전부 정리하고는 정중한 태도로 나에게 사과를 건네 왔다.
“네. 저야말로 실례했어요.”
“다행입니다. 그러시다면 이만.”
굳이 대화를 더 나눌 만한 일도 아니었기에, 남자는 나에게 묵례하고는 곧장 잡화점을 벗어났다.
…그런데 눈에 익은 저 얼굴은.
‘레오니트 대공의 부관?’
이곳의 레오니트 황태제의 부관은 다른 사람으로 알고 있지만…….
“…….”
마차 안으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뜨다가, 다시 잡화점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반가우신 분들이시네요! 오랜만에 뵈어요.”
루체테의 주인, 칼리는 오늘도 싹싹한 태도로 우리를 맞아 주었다.
“그 머리핀! 역시 잘 어울리세요. 오늘은 어떤 물건을 찾으시나요?”
“물건을 찾는다기보다는, 칼리 님과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잠시 시간을 내 주실 수 있을까요?”
“가게에 제 동생도 같이 있으니 시간쯤이야 낼 수 있지요!”
그녀의 안내를 받아 가게 안에 비치된 작은 테이블에 착석했고, 듀이가 내 뒤에 섰다.
오늘의 목표는 그녀가 드레스 디자이너가 되도록 설득하는 것.
나는 칼리의 눈을 마주 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갑작스럽겠지만, 본론부터 말씀드릴게요. 칼리 님은 드레스를 만드는 것에 관심이 없으신가요?”
“네? 드레스를요? 저번에도 그런 질문을 하지 않으셨던가요?”
“맞아요! 칼리 님께는 분명 재능이 있을 것 같거든요! 의상실을 만들 생각은 없으세요? 저와 함께-”
거기까지 이야기했을 때였다, 마침, 가게 입구에서 종소리가 울리며 새로운 손님이 들어왔다.
나는 무심결에 그쪽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손님이 카운터에 서 있는 칼라의 동생에게 곧장 다가가 말을 걸고 있었다.
“블랙 다이아몬드 장식이 있는 커프스가 있을까요?”
“네. 가게에 있는 물건을 보여 드릴 테니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방금, 블랙 다이아몬드라고?
“…….”
“레이디? 저에게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지금 일이 즐거워서요! 동생과 잡화점을 계속 꾸려 나갈 생각이에요.”
중간에 질문이 끊기긴 했지만, 칼리의 입에서 대답이 흘러나왔다.
귀족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는지 그녀는 완곡한 목소리로 대답했으나 분명한 거절의 표현이었다.
“…알겠습니다. 갑작스러운 이야기를 꺼내서 죄송했어요.”
나는 칼리의 이야기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도 최고의 디자이너를 손에 넣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우고 왔건만, 들어온 지 10분도 되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나게 될 줄이야.
“이만 실례하겠어요.”
“레이디께서 죄송하실 일은 없으니, 필요하신 물건이 있다면 다음에 또 방문해 주세요!”
용건은 이걸로 끝이지만, 빈손으로 나올 수는 없었기에 소품 하나를 사고는 잡화점을 벗어났다.
듀이는 내가 너무 빨리 가게를 나온 것에 의아함을 보이고 있었다.
“네리아 님, 더 설득하지 않으시나요? 다음에 다시 오실 건가요?”
“아니, 이제 오지 않을 거야.”
내가 아무리 설득해 봐야 칼리의 마음이 변할 일은 없을 테니까.
나는 고개를 돌려 루체테의 간판을 힐끗 쳐다보았다.
“여기, 평범한 잡화점이 아닌 것 같거든.”
“네?”
처음 이곳에 방문했던 날, 칼리가 나에게 말했었다.
루체테는 소품 등의 각종 여성용품을 판매하는 잡화점이라고.
그런데 방금 들어온 손님은 ‘블랙 다이아몬드 장식이 있는 커프스’를 찾았고, 칼리의 동생은 손님에게 물건을 보여 주겠다고 답했다.
분명, 검은색 다이아몬드로 만든 물건은 ‘여성용품’이 아닌데도.
다리스 제국에서는 ‘검은색 다이아몬드는 남자들만 사용한다.’라는 유구한 관습이 있다.
그리고 그 관습은 이 세계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라 블루벨의 도나 헤런드가 내 데뷔탕트 드레스 주문을 받으며 이런 말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장식으로 블랙 다이아몬드를 달면 좋을 텐데 그건 남자분들만 사용하는 보석이니… 대신 검은색 오닉스를 써도 괜찮겠어요.’
여성용품을 판매한다는 장소에서 남자용 소품을 취급하다니.
생각할 수 있는 경우가 하나 있었다. 암호, 혹은 은어.
예를 들어, 평범한 가게로 위장한 길드를 찾아간다면 ‘암호’를 말해야지만 거래를 시작할 수 있다.
아마도 루체테에 방문해서 ‘블랙 다이아몬드’를 찾는다면 원래의 목적을 안내해 주는 게 아닐까?
‘알 사람만 아는 정보상이라든가.’
물론, 비약일 수도 있다.
여성용 가게라고 남자용 물건을 아예 팔지 말란 법은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 외에도 다른 정황들까지 같이 고려해 본다면야…….’
잡화점에 들어갈 때 부딪혔던 남자는 예전 세계에서 레오니트 대공의 아래에서 일하던 부관이었다.
그리고 칼리는 레오니트 대공의 후원을 받아 의상실을 개업했었다.
마지막으로는 수확제에서 레오니트 황태제가 춤을 춘 뒤 했던 말.
‘머리핀이 잘 어울리시는군요.’
머리핀은 루체테에서 듀이가 구매한 물건이었다.
그때는 갑자기 왜 머리핀을 집어 언급했던 것인지 몰랐었는데, 일부러 흘린 말은 아니었을까.
‘…또 만나자고 했었으니까.’
그랬기에 나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잡화점은 위장일 뿐이고 루체테는 정보상이든 뭐든 다른 목적을 가진 장소라는 것.
그리고 이곳의 진짜 주인은 아마도 레오니트 황태제이다.
예전 세계의 그는 정치에서 한 걸음 떨어진 입장이었기에 좋아하는 예술을 후원하며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차기 황제가 된 이 세계에서는 측근들을 이용하여, 휘하에 사적인 직속 조직을 만든 것이다.
‘그러니 칼리가 의상실을 만든다고 내 손을 잡을 리 없지.’
그녀는 이미 레오니트를 위해 일하는 중일 테니까.
입구에서 마주친 남자 역시도 지금은 황태제의 숨겨진 부하로서 물밑에서 일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이건, 내가 평행세계에서 왔기에 추측할 수 있었던 정보였다.
“듀이. 예전에 청소하러 다녔을 때, 시간을 지정해 줬다고 했지?”
“네,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정리를 다 끝내지 못했는데도 돌아가도록 배려해 주셨어요.”
“그랬구나. 이제 돌아가자.”
나는 듀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미련 없이 마차에 올랐다.
‘레오니트 황태제라…….’
정치에는 관심이나 의욕이 없어 보였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을지도.
‘그 사람, 뭔가를 하고 있어.’
게다가 또 만나자고 했던 그의 말이 단순한 인사치레가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코튼 자작을 어쩌려는 걸까?’
서류에서 본 이름을 떠올렸다.
일단은 지켜보는 게 좋겠지. 당장은 아니더라도, 이런 일은 알아 두면 언젠가는 도움이 될 테니까.
***
나는 마차의 등받이에 기대 말없이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의외의 정보를 얻긴 했지만, 사실 오늘의 목적은 드레스 사업을 위해 칼리를 포섭하려던 것이었다.
‘돈 버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군.’
“저기… 네리아 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맞은편에 앉아 있던 듀이가 머뭇머뭇 말을 걸어왔다.
“파는 물건이라면 지금 하고 계신 꽃 같은 건 어떨까요? 네리아 님께 꽃이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요.”
“꽃? 귀걸이를 말하는 거지?”
산호로 조각한 꽃 액세서리.
“그것도 나쁘지는 않은데.”
다만 이미 흔해진 물건이라, 의미 있는 수준의 돈을 벌기에는 다소 부족한 감이 있다.
사교계 사람들의 눈을 한 번에 잡아끌 수 있는 아이템은 없을까?
“우선은 시장조사를 가야겠어.”
종류별로 다양한 물건을 구경하고 있다 보면 괜찮은 생각이 떠오를 가능성도 있다.
나는 마부에게 지시해, 마차를 저택이 아닌 번화가로 향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