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은 셀프입니다 (55)화 (55/172)



<55>

“안녕하세요, 로이엔 경.”

“오랜만에 뵙습니다, 네리아 님.”

로이엔 경을 만나는 일은 어렵지 않게 성사되었다. 예산이 줄어든 문제로 상의할 것이 있다는 좋은 핑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응접실 맞은편에 앉은 그가 밝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요즘 발렌티스의 가신들 사이에서도 네리아 님의 활약상이 자주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가요?”

“예. 이렇게나 빨리 자리를 잡으실 줄은 몰랐는데, 역시나 제 눈은 틀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직 자리를 잡았다고 할 단계까지는 아닌걸요. 그보다 오늘 뵙자고 한 건 다름이 아니라.”

나는 웃으며 겸손하게 대답한 뒤, 곧바로 본론을 입에 담았다.

“사업에 도전하고 싶어요. 그래서 경께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요.”

부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돈을 버는 방법이라면 역시나 장사다.

페어 레이디에 황녀님의 튜터가 되며 내 이름이 수도에 알려지기 시작한 지금이 무언가를 시도하기에 딱 적당한 시기였다.

‘게다가 투자금을 받아 낼 수 있는 곳도 있으니까.’

만약, 내가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낸다면 가문의 가신들에게도 더 내 존재를 알릴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아이템을 고르는 것이 효과적일까.

다행히도 나는 예전 세계에서의 부모님이 성공했던 사업의 내용을 대강이나마 알고 있다.

그러니 로이엔 경과 상담을 통해 그중에서 내가 할 수 있을 법한 적당한 아이템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레고트 가주께서 이미 거하게 말아먹어 그쪽은 힘들 것 같습니다.”

“알케이트 지역의 광산이요? 이미 다른 귀족이 발견하여 한창 개발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쿠로소 가죽이라면 그쪽도 이미 다른 귀족이 선점하였습니다.”

“좋은 아이디어인 것 같습니다! 다만, 최소 3년은 지켜봐야 할 장기 계획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나는 부모님이 아니었고, 내가 가진 가벼운 지식으로 시도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업을 너무 쉽게 생각했어.’

로이엔 경과 함께 다른 의견을 내 보기도 했으나 특별하게 이렇다 할 착안점은 찾을 수 없었다.

나는 결국, 1시간이 넘는 대화 끝에 별다른 소득 없이 방으로 돌아와야 했다.

‘마지막 건은 아이디어가 좋아도 최소 3년이 걸린다고 했지?’

눈을 감고 소파에 기댔다.

가문 차원에서 하는 일이라면 몰라도 나에게는 그렇게까지 긴 시간을 내다볼 여력이 없다.

그렇다면 지금의 내가 당장 성공할 수 있는 일은 뭐가 있을까?

진지하게 팔짱을 끼고 앉아 깊은 생각에 빠져 있을 때였다.

“네리아 아가씨, 캐롤린 부인의 전시회에 출발하실 시간이에요.”

사샤가 방으로 들어와서는 나에게 다음 일정을 알려 왔다.

“응?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어?”

“네, 라일라 아가씨는 벌써 출발하셨다고 하네요. 외출 준비 바로 도와 드릴게요!”

캐롤린 부인의 살롱은 많은 귀족이 모여드는 장소인 만큼 나로서도 빠질 수 없는 자리였다.

일단은 늦지 않게 출발해야겠지.

나는 사업에 관해 생각하던 것을 멈추고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

캐롤린 부인이 주최하는 살롱은 수도 귀족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귀족의 표본이라 불리는 그녀의 명성과 살롱의 높은 수준이 합쳐지니 자연스레 사람이 몰린 것이다.

거기에 고위 귀족들이 그녀의 살롱에 방문하는 빈도가 높아지자, 그들과의 인맥을 쌓으려고 일부러 참석하려는 사람까지.

인기가 인기를 불렀고 그 결과, 귀족들에게는 놓칠 수 없는 사교 모임의 장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오늘 살롱의 주제는 캐롤린 부인이 후원하는 조각가의 작품을 전시하는 것이었다.

‘원래라면 알렉사와 함께 참석할 생각이었지만…….’

입구에서부터 조각상을 감상하며, 수확제에서 내 목걸이를 버렸던 소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나는 알렉사가 사교계에 무사히 자리 잡을 수 있게끔 그녀를 데리고 사람들에게 소개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고마움과 미안함을 내비치며 내 제안을 거절했다.

‘저는 사교계와 맞지 않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그래서 계속 고민해봤는데… 황궁 도서관의 사서가 되기 위해 공부해 보려고 해요.’

사서라니. 알렉사와 무척 잘 어울리는 직업 같았기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었다.

“네리아 양! 와 줬군요.”

그런 생각을 하며 조각을 구경하는데, 나를 찾는 목소리가 있었다.

뒤를 돌아보자, 살롱의 호스트인 캐롤린 부인이 서 있었다. 그녀의 표정에 반가움이 가득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부인! 다리스에 영광이 있기를.”

“네리아 양의 몸가짐은 오늘도 훌륭하군요. 보고 있는 제 기분이 좋아질 정도예요.”

“훌륭한 건 전시 중인 작품들이에요. 제 방에 전시해 두고 싶은 정도인걸요. 조각가의 실력과 후원자이신 부인의 안목에 감탄했어요.”

“네리아 양은 말도 잘하네요.”

칭찬이 유쾌한 듯 그녀가 기분 좋은 웃음을 내뱉었다.

“전시회가 끝나면 저택으로 하나를 보내 줄게요. 10년 만에 생긴 페어 레이디 후배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해 줄래요?”

“정말이신가요, 부인? 기뻐요. 감사히 받겠습니다……!”

“저기 캐롤린 부인과 레이디 발렌티스가 있네요.”

캐롤린 부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어느새 다른 귀부인들이 옆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네리아 양. 듣기로는 황녀님을 길들였다면서요?”

“소식 듣고 감탄했답니다. 역시나 제가 눈여겨본 영애다워요.”

수확제에서 대화를 나눴던 귀부인들이었는데, 그녀들은 오늘도 나에게 호의를 보이고 있었다.

“칭찬이 과하셔서 부끄러울 따름이에요. 그런데 부인의 따님께서 문관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했다고 들었어요. 정말 대단하세요!”

“소문이 벌써 거기까지 퍼졌나요? 제 딸아이가 어릴 때부터 머리 하나는 영특해서. 호호.”

“부인을 닮은 게 아닐까요?”

나는 웃는 얼굴과 빈틈없는 태도로 그녀들을 응대했다. 자고로 귀족들에게 있어 이런 친분은 귀중한 재산이 되는 법이다.

그런 식으로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며 전시회장 안을 돌아다니고 있을 때였다.

문득, 전시관의 풍경 속에서 신경 쓰이는 부분을 발견했다.

살롱을 돌아다니고 있는 몇몇 영애들의 머리카락 위에 나비가 앉아 있는 것이었다.

대다수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종종 눈에 띄는 빈도였다.

‘나비 머리핀이라면… 이건 설마 내 영향으로?’

수확제 때 페어 레이디 역할을 하며 사람들에 눈에 띄었을 테니까.

만약 그렇다고 해도 특별히 낯선 일이 아니기는 했다.

예전 세계에서 외모로 주목받는 적이 많았던 발렌티스 모녀는 자연스럽게 사교계에서 유행을 만든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혹시 여기서도 통한 건가?’

설마 우연의 일치는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할 때쯤, 마침 나에게 해답을 알려 줄 사람이 나타났다.

“네리아 양! 와 있었군요!”

“안녕하세요, 클로이 양.”

황녀궁에서 만난 이후로 친구가 된 클로이 에모리가 나를 발견하고는 반갑게 다가왔다.

“네리아 양이 있을 줄 알았으면 더 일찍 출발할 걸 그랬어요.”

“지금이라도 만나서 잘됐죠! 그동안 잘 지냈나요?”

“황녀님과의 면담 이후로 시금치에 트라우마가 생긴 것만 빼면 잘 지냈어요. 그날부터 식사 시간에 시금치를 거부하기 시작했죠.”

음? 그렇지만 내가 기억하는 예전 세계의 클로이는 편식을…….

“원래는 시금치를 잘 먹었나요?”

“…사실 싫어했는데, 먹지 않을 수 있는 좋은 핑계가 생긴 거죠.”

“역시 그랬군요.”

클로이와 나는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데 클로이 양, 궁금한 게 있는데, 나비 모양 머리핀이 영애들 사이에서 원래 인기가 많았나요?”

“전혀요. 수확제 이후로 생긴 변화에요. 제 옆에 있는 분 덕분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렇군요. 제가 너무 예뻐서 따라 하는 사람이 생긴 거네요.”

“맞는 말이긴 한데, 보통 그런 말을 본인 입으로 하나요?”

“저희끼리인데 뭐 어떤가요. 다른 데서는 안 그러니까 괜찮아요.”

“오, 제가 특별한 건가 봐요.”

“그건 글쎄요.”

나는 장난스러운 말투로 대답하며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동안은 니나렛에게 집중하느라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는데 사교계에 이런 소소한 변화가 있었다니.

‘여기서도 통했어. 하기야 거기나 여기나 얼굴은 똑같이 생겼으니까.’

…그렇다면 이런 걸로 돈을 벌 수도 있지 않을까?

드레스나 장신구 등, 내가 걸치는 물건을 직접 만들어 사교계에 유행시키고 수익을 만들어 내는 것.

안 그래도 내가 당장 성공시킬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지 고민하던 차였다.

‘…하지만 쉽게 생각해선 안 돼.’

나비 머리핀이 소소하게 유행한 것과 이런 걸로 내가 본격적인 수익을 발생시키는 건 전혀 다른 문제라고 봐도 좋았다.

까다로운 귀족들의 기준을 만족시킬 수 있을 만큼 디자인이 훌륭하고 품질이 뛰어나야 한다.

그리고 한 명, 머릿속에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루체테 잡화점의 칼리 로렌스.

예전 세계에서 레오니트 대공의 후원을 받아, 수도 최고의 의상실을 만들어 낸 그녀의 재능은 여기서도 똑같을 것이 분명했다.

‘드레스를 만들어 볼 생각은 없으세요? 혹시 관심이 없으신지.’

‘드레스요? 죄송하지만, 저는 지금 하는 일이 제일 즐거워서요.’

저번에 루체테에 방문했을 때는 제안을 거절당했기에 다음을 기약하며 떠났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칼리에게 디자이너가 되도록 충분히 설득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저 나비 머리핀, 계속 보니까 저도 갖고 싶어지네요. 네리아 양은 어디서 구매했나요?”

“제가 하고 있었던 건 전문 공방에서 만든 건 아니지만-”

“네리아! 너도 왔었구나.”

그때였다. 내 목소리를 끊고서는 나타난 방해꾼이 있었다.

“라일라?”

나보다 먼저 출발했었다더니, 그녀 또한 아직 전시회장 안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너도 왔을 줄 알았으면 같은 마차를 타고 올 걸 그랬어. 그런데.”

라일라가 내 옆에 있던 클로이를 힐끗 쳐다보았다.

니나렛 황녀에 이어 에모리 공작가의 직계와도 친분을 만들다니. 그녀는 그 사실이 무척이나 분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라일라는 사촌 자매를 만나 진심으로 반갑다는 듯, 표정만은 기쁨을 가장하며 입을 열었다.

“예전에 네가 하녀로 허드렛일을 하며 지냈을 때 말인데.”

웃는 얼굴에 상냥한 목소리였지만 그녀의 목적이 눈에 훤히 보였다.

나와 클로이를 떼어 놓고 싶은데, 에모리 가문의 사람을 정면에서 공격하기는 어렵다.

그러니 악의는 전혀 없는 척 내 과거를 굳이 언급하여, 옆에서 같이 듣고 있는 클로이가 먼저 나를 싫어하게 만들려는 의도였다.

누명을 써서 평민으로 지냈다고는 해도 ‘네리아는 옛날에 이런 일까지 해 봤답니다!’ 하고 구체적인 이야기가 더해진다면 받아들이는 느낌이 달라질 수 있으니까.

‘그렇지만 하녀로 지내면서 허드렛일을 했던 과거가 딱히 내 약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게다가 클로이도 겨우 그런 걸로 나에 관한 생각을 바꿀 리가 없고.

그러나 헛소리를 듣고 있어 주기에는 시간이 아까웠다.

나는 할 말을 찾아내기 위해 라일라를 빠르게 살펴본 뒤, 그녀보다 더 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말은 빨리하는 사람이 먼저다.

“네가 구두를 닦-”

“라일라, 오늘 한 귀걸이 예쁘다!”

“응?”

“돌아가신 내 어머니의 물건이라서 더 그렇게 보이는 걸까?”

이참에 잘됐다.

라일라의 귀에 걸린 파란색 장미 귀걸이를 바라보며, 나 역시 악의 따위는 전혀 없다는 듯 빙긋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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