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발렌티스 저택에 때아닌 소란이 일었다.
바로 저택을 찾아온 귀빈, 니나렛 다리스 황녀의 존재 때문이었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다리스에 영광이 있기를.”
백작가의 일원들과 고용인들이 저택 입구에 양쪽으로 늘어선 채, 황녀에게 깍듯이 인사했다.
가장 앞쪽에 자리한 자는 가주인 레고트 백부였지만, 니나렛은 그를 지나쳐 나에게로 달려와 안겼다.
“네리아 선생님!”
“전하, 오시는 데 불편한 부분은 없으셨어요?”
“전혀-! 빨리 보고 싶었어!”
니나렛이 나에게 매달려 볼을 비볐다. 애정과 친밀함이 한가득 느껴지는 행동이었다.
그 모습을 보는 백부 가족의 표정은 당연히 좋지 않았다.
특히 니나렛에게 인사를 무시당한 레고트 백부의 얼굴이 썩은 감자처럼 변해 가고 있었다.
‘내가 튜터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반응도 대단했었지.’
그럴 리 없다는 얼빠진 얼굴이 얼마나 볼만하던지. 그때를 생각하며 니나렛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흠흠, 황녀 전하.”
니나렛이 계속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자, 레고트 백부가 나섰다.
“계속 이러고 계실 것이 아니라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응. 알겠어요, 백작.”
앞장선 백부를 따라 향한 곳은 저택의 응접실이었다.
나와 니나렛이 나란히 앉았고, 맞은편 좌석에 백작 부부가 착석했다.
그들은 이 상황이 달갑지 않은 것이 분명했지만, 황족을 소홀히 모실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얼굴에 억지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방문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전하.”
“저희 발렌티스 가문의 아이가 황녀님을 모실 수 있게 되어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하고 있답니다.”
“네리아, 황녀님을 똑바로 잘 모시도록 하렴.”
“물론이지요, 백부님.”
하하 호호 웃음소리와 함께 가식적인 대화가 오갔다.
니나렛이 가끔 백작 부부에게 예의에 어긋나는 발언을 내뱉기도 했지만, 원래 그런 아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지적 없이 넘어갔다.
“황녀님은 네리아를 만나러 오신 것이지요?”
“편하게 시간 보내시도록 저희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인사치레에 부족함이 없을 시간이 흐른 후, 백작 부부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니나렛이 일어났다.
“알겠어요! 네리아, 우리도 가자.”
“전하, 벌써 돌아가시는 건가요?”
“선생님의 방으로 갈 거예요.”
“그러셨군요. 먼저 나가시지요.”
백작 부부가 한 발짝 물러서며 니나렛에게 길을 양보했다.
그들은 아직까지 억지웃음을 잃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잠깐, 네리아의 방이라면?”
한 박자 늦게 멜비나 백작 부인이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 그녀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스쳤다.
‘찔리는 게 있겠지만 어차피 처음부터 늦었거든요.’
미소를 숨긴 채 니나렛과 손을 잡고 응접실을 빠져나가자, 백작 부인이 그 뒤를 재빠르게 쫓아왔다.
“황녀 전하! 응접실에서 마저 이야기 나누시는 게 어떠실는지요?”
“굳이 왜요?”
“하녀들을 시켜 응접실로 다과를 더 가져오게 했거든요.”
“으음, 성의는 고맙지만, 선생님의 방이 더 편할 것 같아요.”
“그렇지만 전하, 황녀님께 드릴 디저트를 만들겠다고 저희 하녀들이 애쓰고 있는데 성의를…….”
“그럼 선생님의 방으로 가져오게 하면 되잖아요?”
“아니요, 그런 것이 아니라-”
내 방까지 걸어가는 동안, 백작 부인이 뒤를 따르며 니나렛의 걸음을 필사적으로 만류했으나 그것이 통할 리가 없었다.
달칵, 내 방의 문이 열렸고.
“…설마 방이 이게 다야?”
니나렛이 좁아터진 손님방을 바라보며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아이가 방 안으로 들어가 구석구석을 살펴보았지만, 특별히 가려져 있는 공간은 더 없었다.
니나렛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여기는 황녀궁의 평민 하녀 처소보다 더 좁은데……? 선생님, 그동안 이런 데서 살았어?”
“황녀 전하. 잠깐 제 이야기를 들어 주세요. 여기에는 이유가-”
“백작-! 발렌티스 백작-!”
니나렛이 소리를 지르며 레고트 백부를 호출했다.
백부 역시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는지, 헐레벌떡 뛰어 들어온 그의 이마에 땀이 흘러 있었다.
“예, 황녀 전하.”
“선생님 방이 이게 뭐예요? 발렌티스 가문은 거지였어요?”
“거, 거지라니요, 전하.”
“다른 사람들 방도 이래요?”
니나렛이 짧은 다리로 척척 걸어 방을 벗어났다.
그러고는 복도에 멀뚱멀뚱 서 있던 내 사촌 오빠, 레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공자의 방은 어딘데요?”
“저, 저쪽이기는 합니다.”
“열어 봐요.”
“예?”
“문 열어 봐요-!”
저택은 이미 난장판이 되었고, 졸지에 레비에게까지 불똥이 튀었다.
하지만 니나렛의 행동을 멈출 수 있는 사람은 없었기에 결국, 반강제적으로 레비의 방문이 열렸다.
당연하게도 그의 방은 넓고 호화로웠고, 니나렛은 또다시 떨리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너무해……! 네리아 선생님은 구박데기였어? 친딸이 아니라 조카라서 이렇게 차별받는 거야?”
슬쩍 옆을 보니, 백작 부부의 혈색이 몹시도 나빠져 있었다.
알 사람이야 전부 나와 백부 가족의 관계를 눈치껏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사실을 무려 황족에게 대놓고 지적받은 것에 심히 당황한 것 같았다.
‘니나렛이기에 가능한 일이지.’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백작 부인 쪽이었다. 그녀는 표정을 수습하고서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차별이 아니라, 네리아가 그곳이 편하다고 해서 그 방을 준 겁니다. 조카의 의견을 존중했어요.”
멜비나 백작 부인이 나를 바라보며 거의 따지듯이 물어 왔다.
“네리아! 어서 말씀드리지 않고 뭘 하고 있어? 우리가 널 구박한다고 전하께서 오해하고 계시잖니!”
“그때… 손님방이 불편하지 않았냐고 물어보시길래 제가 그렇다고 대답하기는 했었죠, 아마?”
“그렇지? 전하, 증인도 있습니다. 재무실의 로이엔 경이었던가요?”
그녀가 책임을 나에게로 넘겼다. 분명, 그들에게는 명분이 있었다.
“불쌍해! 우리 선생님 불쌍해!”
그러나 명분이란 모름지기 그것을 뛰어넘는 권력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되기 마련이다.
‘심지어 듣고 있지도 않았어.’
“불쌍한 우리 선생님. 정말로 구박데기였어? 두 사람! 어떻게 조카를 핍박할 수가 있어요……?”
니나렛이 마치 쓰레기를 보는 듯한 시선으로 백작 부부를 번갈아 보았다. 그에 레고트 백부가 허겁지겁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전하! 부인의 말처럼 네리아가 저 방이 좋다고 해서 그런 것이지, 원한다면 큰 방으로 바꿔 줄 용의가 있었습니다.”
“정말요? 거짓말 아니고요?”
“예, 예. 당연히 그렇지요! 오늘 당장 네리아의 방을 바꿀 수 있게 조치하겠습니다.”
“다행이다! 종종 선생님 집에 놀러 올 텐데, 나는 저렇게 좁은 데서는 못 있어요. 별궁에서 지낼 때도 침실만은 큰 곳을 썼거든요.”
“예, 알겠습니다. 전하께서 불편하시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고마워요! 내가 백작과 백작 부인을 오해했었네요. 미안해요.”
원하는 대답을 들은 니나렛이 나에게 쪼르르 달려왔다.
“선생님! 잘됐다. 그치?”
“음, 사실 저는 저쪽 방을 써도 괜찮았어요. 하지만 황녀님이 불편하신 것도 있고, 백부님께서 먼저 바꿔 준다고 하셨는데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으니…….”
일부러 얄밉게 말하고는 약 올리듯 뒤를 돌아보자, 백부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 있었다.
“감사히 사용할게요, 백부님.”
“아니다……. 당연한 것을.”
백부에게서 이 가는 소리가 들린 건 나만의 착각이 아닐지도.
볼일을 모두 끝낸 니나렛이 해맑은 얼굴로 내 손을 잡아 왔다.
“가구 같은 것도 당연히 좋은 걸로 들여오겠지? 아, 맞다! 그리고 아빠가 다음에 식사할 때 선생님도 한번 부르라고 했어!”
니나렛은 나를 보며 그렇게 말했으나, 실제의 목적은 백부에게 들려주기 위한 발언이었다.
눈치가 있으면 알아서 잘하라고.
어제는 황제 폐하가 아직 불편하다고 말했으면서, 여기선 태연하게 아빠라고 부르며 이름을 팔다니.
이용할 수 있는 건 이용하겠다. 그런 영악함을 한 스푼 추가한 것이 니나렛의 새로운 생존법이었다.
‘나 잘했어?’
나는 눈으로 묻고 있는 니나렛을 보며 웃음을 참았다. 정말이지 든든한 뒷배가 생기고 말았다.
***
이틀 뒤 정오.
멜비나 백작 부인이 내 방에 들이닥쳐서는 나에게 통보해 왔다.
“황녀 전하의 튜터가 되었으니 황궁에서 급료를 받게 되었지? 그러니 앞으로는 너에게 배정한 예산을 반으로 줄이려고 해.”
“아, 그러세요?”
“혹시라도 서운하게 생각하지는 말렴. 이건 다 너의 자립심을 키워 주기 위해서 내린 결정이란다.”
그녀는 인자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마치고는 용건이 끝나자마자 내 방을 빠져나갔다.
나는 그런 백작 부인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문이 닫히자마자 픽 비웃음을 내뱉었다.
“보복할 게 그게 다야?”
애초에 얼마 되지도 않는 예산을 반으로 줄여 봐야 얼마나 된다고.
콩 한 쪽은 반으로 나눠 봐야 콩 반쪽이 될 뿐. 솔직히 전혀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손해를 입었다면, 내가 아니라 백부네 쪽이겠지.’
나는 유쾌한 기분으로 내가 사용하게 될 새로운 방을 떠올렸다.
지금 있는 손님방보다 훨씬 넓어진 쾌적한 공간이었다.
니나렛이 발렌티스 저택에서 한바탕 소동을 벌이고 난 뒤, 나에게도 라일라나 레비와 비슷한 크기의 방이 곧바로 배정된 것이다.
사샤는 그 사실에 눈물까지 글썽이며 기쁨을 표현하기도 했다.
게다가 ‘가구 같은 것도 당연히 좋은 걸로 들여오겠지?’라던 니나렛의 발언 때문이었을까.
새로운 방에 놓이게 될 가구와 각종 집기도 상당한 고급품으로 주문이 들어갔다고 한다.
나에게 종종 놀러 오겠다는 니나렛에게 트집 잡히지 않겠다는 의도가 분명했다.
‘아마도 나에게서 줄인 예산보다 몇십 배가 더 들지 않았으려나?’
여러모로 마음에 들지 않았겠지.
하지만 나는 요즈음 한창 위세가 등등한 황녀님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이런 시기에 섣불리 나를 건들 수도 없을 테니, 화풀이로 그들이 그나마 할 수 있는 치졸한 앙갚음을 해 온 것이다.
“진짜 인간성하고는.”
나는 혀를 차며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하지만 어차피 백부네가 주는 예산과는 별개로 돈이 필요하기는 했다.
지금까지는 적은 돈으로도 어떻게든 잘해 왔지만, 이대로 주머니 사정이 부족한 상태로 지내기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슬슬 돈을 벌 방법이 필요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선은 상담할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