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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셀프입니다 (52)화 (52/172)



<52>

재미있는 걸 더 보여 주겠다는 내 제안에 니나렛은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신이 났던 건지 잡화점을 나와서 먼저 뛰쳐나가기도 했는데, 나는 그런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니나렛에게는 아이다운 솔직한 모습이 가장 잘 어울렸다.

“전하, 그쪽 길 아니에요.”

“그, 그래? 나는 큰길로 가는 건 줄 알았지. 그럼 어디로 가는데?”

“저쪽 골목이요. 저희는 이제부터 장난감 전문 가게에 갈 거예요.”

번화가를 걷는 동안에는 황제 폐하께서 호위로 붙여 준 정예 기사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뒤를 따르고 있었다.

나는 장난감 가게를 시작으로 아이들이 좋아할 법한 장소들을 니나렛과 방문하기 시작했다.

모자 가게와 엔티크 상점, 수제 인형 만들기 체험장 등.

둘 다 지쳐 버릴 만큼 곳곳을 돌아다녔고, 황녀님과 함께하는 투어는 아이의 배 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 걸로 끝이 났다.

“나 배고파. 황궁으로 돌아갈래.”

“모처럼 나왔으니까, 밖에서 식사하고 가는 건 어때요? 맛있는 음식을 파는 곳을 알고 있거든요.”

“밖에서? 음, 좋아. 지금 당장 배가 고프니까 그렇게 해 줄게.”

허기를 호소하면서도 여전히 콧대를 세우는 니나렛을 이끌고 자신 있게 향한 곳은 샌드위치를 파는 노점상이었다.

빵에 바르는 비법 소스가 유명해 수도에서도 인기가 많은 곳으로, 예전 세계의 니나렛이 좋아하던 음식이기도 했다.

‘황후 폐하께서 자주는 못 먹게 막으셔서 더 좋아하기도 했지.’

한 가지 염려한 점은, 이쪽의 니나렛이 과연 노점 음식을 먹을까 하는 점이었다.

하지만 가판 앞에서 군침을 꿀꺽 삼키는 모습을 보니 특별히 거부감을 느끼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렇게 벤치에 손수건을 깔고 앉아 손에 들린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문 순간.

“어? 이거 진짜 맛있어!”

니나렛이 진심이 담긴 감탄사를 내뱉었다. 다행히 이곳에서도 입맛은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다만 그쪽에서는 샌드위치 2개를 남김없이 먹던 아이가 여기서는 반밖에 먹지 못하고 남기고 말았다.

그 모습에 마음이 조금 아팠다는 사실은 나만 아는 비밀로 남기기로 했다.

“졸려. 자러 갈래.”

“배가 부르니까 저도 졸린 것 같네요. 황궁으로 돌아가게 마차를 부를까요?”

“응…….”

대답하는 목소리가 희미했다.

지금까지 부지런히 움직인 덕분에 결국 체력을 전부 소모한 것인지, 니나렛이 벤치에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 것이다.

“…전하?”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눈을 빛냈다. 기다렸던 순간이었다.

니나렛이 지쳤을 때를 노려 질문해 진심을 듣는다.

물론 성공하지 못할 가능성이 더 큰 작전이었지만, 예정대로 계획을 수행할 시점이었다.

“황녀 전하께서는-”

“분홍색 눈, 오늘은 즐거웠어……. 데려와 줘서 고마워.”

약간 당황한 마음으로 입을 다물었다. 반쯤 잠에 빠진 니나렛이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온 것이다.

뜨문뜨문 흐리멍덩하게 이어지는 목소리는 집중하지 않으면 듣지 못할 만큼 작았다.

그랬기에 나는 니나렛의 이야기를 한 글자도 놓치지 않도록 예민하게 귀를 기울였다.

“튜터로… 뽑아 줄 수 없어서 미안해. 나는 네 뒷배 되어 줄 수 없어.”

“네?”

“난 황궁에서 언제 다시 쫓겨날지 모르니까…….”

“전하? 왜 그런 말씀을 하는 거예요. 황녀님이 왜 쫓겨나요.”

“그치만… 처음이 어렵지 두 번은 쉽다고, 다들 그렇게 말했는걸.”

생각했던 방향과는 다르지만, 작전에 성공한 걸까.

이건 니나렛이 잠결에 내뱉는 진심이었다. 아마도 깨어나면 말한 본인도 기억하지 못할.

‘하지만 쫓겨날지 모른다니.’

평소에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지낸 거였어? 대체 어째서? 황제 폐하께서 그렇게 아끼시는데…….

문득, 머릿속에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황제 폐하는 아이에게 원망받는 것이 두려워서 딸을 제대로 만난 적이 없다고 했다.

‘니나렛은 폐하께서 자신을 아끼고 있다는 사실을 몰라. 그래서 자신의 위치에 확신이 없는 거야.’

한 번 버려진 적이 있었으니 또다시 버려질 수도 있을 거라고, 그런 불안감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는 말로 하지 않으면 전해지지 않는 일이 있다.

역시나 아이에게 진짜 필요했던 건 물질적인 것들이 아니었다.

아버지와의 대화, 그리고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인정이었다.

“…전하, 일부러 나쁜 말을 하고 다닌 건, 언제 쫓겨날지 모르니 사람들과 정을 붙이지 않으려고 그랬던 거예요?”

“아니…….”

니나렛은 여전히 잠에 취한 상태였다.

“약하게 보였다가는… 또 굶겨질 수도 있어. 나는… 배고픈 거 더는 싫단 말야.”

“…….”

알아듣기 힘든 말이었다.

하지만 홀쭉한 뺨과 가느다란 팔, 나이보다 한참이나 어려 보이는 체구를 보며 어쩐지 짐작이 갔다.

아마도 별궁에서 지냈을 때 있었던 일과 관련이 있겠지.

‘그 사람들, 니나렛에게 음식도 제대로 먹이지 않았다고 했어.’

이 작은 황녀님이 무슨 생각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니나렛은 생존을 위해 지금까지 혼자서 외롭게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전하……?”

어느새 아이는 완전히 잠에 빠져 있었다. 나는 니나렛의 야윈 몸을 따뜻하게 꼭 안아 주었다.

허락을 받지 않지 않으면 황족을 먼저 만질 수 없다. 하지만 벌을 받아도 괜찮으니 그렇게 해 주고 싶었다. 그냥 내 마음이 그랬다.

“황녀님, 이제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돼요. 알겠죠?”

황제 폐하를 찾아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의 불안함을 없애 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을 테니까.

니나렛에게는 더는 쫓겨날 일도, 굶을 일도 없을 거라고 확신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

황제의 집무실은 ‘다리스 제국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건국 시절부터 최고의 마법사들이 시전한 실드 마법이 축적되어, 하늘에서 메테오가 떨어져도 다리스 황제의 집무실만은 무사할 거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 집무실 테이블에 앉아 무려 제국의 황제 폐하를 알현하는 중이었다.

이런 일은 예전 세계에서도 없었던 일이다.

작위가 없고 황궁 소속도 아닌 귀족 영애는 황제에게 알현을 신청하는 것조차 불가능했으니까.

다만 오늘은 니나렛 황녀라는 주제가 있었기에, 황녀궁의 시녀장이자 전 황제궁의 시녀였던 앨마 부인을 통해 황제 폐하와 비공식적으로 만남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네리아 발렌티스가 제국의 주인을 뵙습니다. 다리스에 영광이 있기를.”

정식으로 인사를 하며 고개를 들었는데, 마침 황제의 뒤에 시립해있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저 사람은……?’

얼굴이 익은 자였다. 예전 세계에서는 니나렛 황녀의 개인 호위를 맡고 있던 마법사였다.

‘여기서는 황제 폐하의 호위 마법사로 재직 중이었구나.’

잠깐 그렇게 생각했지만,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기에 나는 다시 황제에게로 의식을 돌려 입을 열었다.

“폐하, 귀하신 시간을 저에게 할애하여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아닐세. 발렌티스 양도 이렇게 나서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와 주어서 고마울 따름이야.”

“말씀 올리기에 앞서, 제가 저지르는 무례에 폐하께 용서를 구합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나는 이 자리에서 니나렛에 관해 알게 된 이야기를 입에 담았다.

어찌 보면 황제의 실수를 지적하는 발언인 만큼, 그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게끔 언행에 주의를 기울이기도 했다.

“…나는.”

그리고 내 이야기를 모두 들은 황제 폐하는 후회가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내 자리를 이어 줄 아들을 몹시도 원했다.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해졌지. 화가 났었다.”

60년 전, 글로리아 1세의 개혁으로 제국에서 여자가 후계를 잇는 것이 제도적으로 가능해졌다.

그러나 후계자로 남자를 선호하는 풍토는 여전히 남아 있었는데, 황제 폐하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내 분노는 딸에게까지 향했어. 아이를 밖으로 내보내고는 오래도록 잊고 살았었다. 그랬었는데.”

황제 폐하가 눈을 감았다.

“다시 만나게 되니, 피가 이끌린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닫게 되더구나. 어렸을 적의 내 모습을 그대로 빼다 박은 아이였어.”

“…….”

“그리고 세상에서 유일한 내 아이가 힘없이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본 순간, 내가 무슨 짓을 했던 것인지 깨달았지.”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폐하의 눈빛에는 어떠한 결심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더 늦지 않게 내가 먼저 용기를 내야겠어. 어린 영애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진심으로 고맙네.”

***

니나렛과의 정해진 면담은 전부 끝났지만, 나는 다시 한번 황녀궁을 방문했다.

“왜 또 왔어? 저번에 헤어질 때, 튜터로 뽑지 않을 거라고 했잖아.”

“그래도 방문 신청을 거절하지는 않으셨네요.”

“응? 글쎄? 그건 시녀장이 승인한 거겠지. 나는 모르는 일이야.”

니나렛이 모르는 척 발뺌하며 볼을 부풀리기에, 나는 웃으며 작은 인형 하나를 내밀었다.

“이건 뭔데?”

“저번에 전하께서 킹코브라를 좋아한다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인형으로 만들어 봤어요.”

“이 쪼끄만 게 무슨 킹코브라야? 그냥 뱀 인형이잖아!”

필요 없어! 니나렛이 그렇게 외치며 이번에도 인형을 던져 버렸다.

하지만 내가 황녀궁을 떠나면 이것도 침대 옆에 놓인 토끼 인형과 사이좋게 전시되지 않을까.

“황녀님을 생각하며 밤을 새워서 만든 건데, 이렇게 허무하게 버려지니 마음이 참 아프네요.”

“아, 아직 버린 건 아니야. 바닥에 놔둔 것뿐이니까 울지 마!”

가슴에 두 손을 얹고 슬프게 우는 척 연기했더니, 니나렛이 당황한 얼굴로 변명했다.

처음 만났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온화해진 태도였다.

“그보다 너는 왜 온 거야?”

“저를 황녀님의 튜터로 뽑아 달라 부탁드리려고 온 거예요. 참고로 저 인형은 뇌물이었답니다.”

“안 뽑는다고 했잖아! 뇌물 가져와서 부탁해도 안 돼. 돌아가.”

“전하.”

이제부터가 본론이라는 듯, 나는 표정에서 장난기를 지우고 무거운 목소리로 니나렛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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