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누가 궁금하댔어? 뭘 대답까지 하고 그래?”
“질문이 아니었나요? 그렇지만 괜찮지 않을까요. 이 자리는 저희가 서로를 알기 위해 만든 거잖아요.”
“뭐, 뭐래? 그거야……!”
니나렛은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인지 그 독기 가득한 눈으로 계속 나를 노려보기만 했다.
…상당히 오래도록.
대략 십여 분이 넘는 시간 동안 나와 니나렛 사이에 대화 없는 대치가 이어졌다.
어느 순간, 발이 불편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방 안에 들어온 지 꽤 시간이 흘렀고, 아이의 맞은편에는 의자가 있었는데도 니나렛은 나에게 앉으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나한테 기 싸움을 거는 거지?’
귀족은 황족의 허락이 없으면 자리에 앉을 수 없다. 아직 예법 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니나렛도 그 정도는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캐롤린 부인에게서 예법을 전수받은 데다 몇 달간의 하녀 생활로 체력을 단련한 몸.
불편해도 미소를 잃지 않고 몇 시간 서 있는 것 정도야 나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결국, 이 지루한 대치에 먼저 지겨움을 느낀 쪽은 니나렛이었다.
“흠. 그래, 틀린 말은 아니네.”
나를 세워 두기만 하는 걸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깨달은 것인지 아이는 아무런 일도 없었던 척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아. 그러니까 널 알기 위해 한번 질문해 볼게. 넌 내 튜터가 되고 싶은 이유가 뭐야?”
“황녀 전하를 제 뒷배로 삼아 귀족 사회에서 권력을 휘두르고 싶기 때문이에요.”
“…뭐라고?”
어떤 대답이 나와도 트집을 잡을 테다. 아이는 그런 기색을 숨기지도 않은 채 물었지만, 이건 니나렛이 상상했던 범위 밖이었던 걸까.
곧바로 흘러나온 내 말에 아이가 잘못 들었냐는 표정을 지었다.
“미친 거 아니야? 날 이용해 먹겠다는 소리를 대놓고 해? 시녀장! 방금 저게 하는 얘기 들었어?”
아이가 나에게 손가락질하며 멀리 떨어져 있던 앨마 부인을 호출했지만, 그녀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오히려 면담은 나에게 전부 맡기겠다는 듯,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제 대답이 마음에 안 드셨나요? 황가에 이바지하고 싶어서, 라고 말하는 쪽이 좋았을까요?”
“굳이 고르라면 앞이 낫긴 한데!”
“황녀 전하의 마음에 들게끔 대답을 잘한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잘하긴 뭘 잘해? 전혀 아니거든? 너 짜증 나! 이익-!”
휘두르려고 하는데 휘둘러지지 않는다. 그 사실에 짜증을 내고 있던 니나렛의 시선이 문득 내가 들고 있던 상자에 닿았다.
새로운 시빗거리를 찾은 것에 아이의 입꼬리가 히죽 올라갔다.
“참, 깜빡하고 있었네. 내가 선물 가져오라고 했지?”
니나렛이 보란 듯이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기에, 나 역시 아이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저기 티아라 보여? 아까 들어왔던 클로라 에모라가 준 거야.”
커다란 에메랄드가 중앙에 박혀 있는 아이용 티아라였다. 사샤가 전해 준 소문대로 비싸고 화려한 물건이었다.
‘그런데 클로라 에모라가 아니라 클로이 에모리인데…….’
하지만 니나렛은 클로이의 이름에는 크게 관심이 없을 듯하여 정정해 주지 않기로 했다.
“어때? 대단하지?”
“대단하네요. 좋은 걸로 잘 골랐는걸요. 그런데 황녀 전하는 보석을 많이 좋아하시나 봐요.”
“좋아하지! 팔면 금방 돈이 되잖아? 당연히 좋아할 수밖에 없지!”
신나게 이야기하던 아이가 턱을 치켜들었다.
“네가 가져온 것도 빨리 꺼내 봐. 클로라 에모라가 가져온 보석이랑 큰 차이가 없길 바랄게. 넌 부모도 없는 거지라서 기대하면 안 될 것 같기도 하지만.”
니나렛의 폭언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지만, 아기 고양이가 손톱을 세우는 느낌이었기에 나에게는 전혀 상처가 안 됐다.
그랬기에 나는 아무렇지 않게 가져온 선물을 천천히 꺼냈다.
그러자 평범한 생김새의 보석함이 바깥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줄리아로부터 드레스를 선물로 받았던 날, 사샤와 잡화점으로 가서 구해 온 것이었다.
“보석함? 안에 무슨 보석이 들었으려나. 보석함이 후줄근하게 생긴 걸 보니 크게 기대는 안 되는데.”
“안에 보석 같은 건 없어요. 그냥 이 보석함이 선물인데요?”
“농담이지?”
“일단 한번 열어 보세요.”
니나렛이 나를 못마땅한 눈빛으로 쏘아보다가 보석함을 열었다.
“어?”
안에서 맑은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니나렛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안에서 소리가 나잖아? 이런 건 처음 보는데?”
“이건 오르골이라고 해요.”
“오르골……?”
내가 니나렛을 위해 가져온 선물은 바로 마력석을 넣어 만든 음악상자였다.
황궁에서 처음 안내문을 받았을 때, 나는 긴 시간을 고민했었다.
예전 세계면 몰라도, 지금의 나는 부유한 명문가의 영애들과 재력을 경쟁할 수 없다.
그랬기에 나는 발상을 바꿔 의외성을 파고들 생각이었다.
‘니나렛 정도 되는 나이의 아이가 좋아할 법한 물건이 뭘까?’
신기한 것. 특이한 것. 어린아이가 재미와 흥미를 느낄 만한 것.
그런 요소들을 생각하다가 겨우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었던 물건이 바로 오르골이었다.
특히, 오르골은 한참 전에 유행이 지난 물건이기도 했는데 나는 그 점에 주목했다.
니나렛은 별궁에서 지낸 시간이 길었고 황궁에 귀환한 지는 아직 6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게다가 아이는 반년 동안 비싼 선물을 받았지만, 오르골은 이미 몇 년 전에 유행이 지난 물건이다.
유행이 지난 물건을 굳이 사다 준 사람은 없었을 테니, 아마도 본 적이 없었겠지.
혹시 몰라서 앨마 부인에게 편지를 보내 황녀궁에 오르골이 들어온 적이 있냐고 물어보았더니, 아니라는 답변을 받을 수 있었다.
‘어른들도 새로움에 열광하는데, 아이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어.’
처음 보는 물건에 신기해하며 흥미를 느끼는 게 당연했다.
나만 해도 오르골을 처음 접했을 때 너무 신기한 나머지 식사를 거르고 온종일 갖고 놀지 않았던가.
“우와아…….”
역시나 니나렛도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오르골이 연주하는 멜로디를 정신없이 감상하고 있었다.
하급 마력석을 이용한 보급형 제품이라서 고가품에 비교한다면 품질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살면서 오르골을 처음 접하는 니나렛은 이것만으로도 기뻐하는 것 같았다.
‘좋아해 줘서 다행이네.’
나 역시도 기쁜 마음으로 니나렛을 지켜보았다.
비싼 보석 대신 이런 장난감을 주다니. 솔직히 말해서, 상대가 어른이었다면 통하지 않았을 것 같다.
하지만 니나렛이 아직 순수함을 가지고 있는 아이였기에 먹힐 수 있었던 작전이었다.
“음악이 끊겼잖아! 고, 고장인가? 불량품이야 뭐야?”
“아니에요. 뚜껑을 닫았다가 열면 다시 멜로디가 나와요.”
“…그래?”
아이가 미심쩍어하며 보석함을 닫았다가 열자 다시 처음과 같은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와! 정말이다!”
니나렛이 처음으로 아이 같은 모습으로 웃다가 갑자기 심통 난 표정을 지었다.
좋아하는 모습을 남에게 보인 것에 자존심이 상한 것 같았다. 그래 봐야 이미 다 봤지만.
“마음에 드세요? 저한테 다른 것도 더 있어요. 절 튜터로 골라 주신다면 그것도 드릴 수 있는데요.”
“됐어! 시녀장한테 비슷한 걸 사 오라고 하면 되거든? 근데 이 안에 있는 하얀 건 뭐야?”
“제가 만든 인형이에요. 보석함만 있으면 허전할 것 같아서 같이 넣어 봤어요.”
오르골 외에도 선물은 하나가 더 있었는데, 하얀색 천을 사용해 내가 직접 만든 토끼 인형이었다.
니나렛의 눈처럼 붉은 눈에, 한쪽 귀에는 아이의 백금발과 비슷한 금색 리본까지 달아 놓은 것이었다.
‘니나렛은 토끼를 좋아해서 황녀궁 안에서 키운 적도 있었으니까.’
여기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좋아하면 좋고 아니면 말고 식으로 가져와 본 것이다.
“난 토끼 싫어. 약해 빠진 것들은 싫거든? 난 동물도 강한 동물들이 좋아! 사자나 킹코브라 같은 거.”
니나렛이 토끼 인형을 보며 뾰로통해진 얼굴로 투덜거렸다.
수제 인형 쪽은 실패였을지도.
하지만 니나렛의 목소리나 말투가 아까와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오르골을 보고 기분이 풀려 나에게 조금이나마 마음을 열어 준 것인지, 니나렛의 행동에 처음보다 독기나 적의가 줄어든 것이었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면 알아차릴 수 없었을 미묘한 차이였다.
이건 긍정적인 변화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유쾌하게 대답했다.
“그러세요? 다음에는 킹코브라 인형을 만들어 드려야겠네요.”
“필요 없어! 내 눈이 얼마나 높은 줄 알아? 장인들이 만든 인형에 비하면 이건 허접한 쓰레기잖아!”
니나렛이 토끼 인형을 냅다 던져 버렸다.
나는 하얀 솜뭉치가 포물선을 그리며 바닥에 떨어지는 모습을 쳐다보며, 짐짓 슬픈 척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니나렛 전하를 생각하며 제가 직접 한 땀, 한 땀 만든 건데, 이렇게 버림받으니 마음이 아프네요.”
“뭘 이런 걸 가지고 마음이 아파? 내 별명이 황궁의 작은 악마인데 겨우 이 정도로 우는 소리야?”
“황궁의 작은 악마? 그런 게 황녀 전하의 별명이라고요?”
“당연하지.”
니나렛은 그 별명이 마음에 들었는지 허리에 손을 척 얹으며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나한테 딱 어울리는 별명 아냐?”
그런데 이제는 그 모습도 귀엽게 보이다니. 슬슬 이쪽의 니나렛에게도 적응이 되는 것 같다.
나는 미소를 숨기며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작은 악마라니. 왜 그런 별명이 생긴 걸까요? 황녀님은 악마가 아니라 천사님인데.”
“뭐어어? 천사? 누가? 내가?”
니나렛이 경악한 얼굴이 되어서는 양손으로 팔을 비비기 시작했다.
“낯간지러운 소리를 잘도 하네. 우웩. 우웩. 우웨에에엑.”
더욱이 허공에 토하는 시늉까지. 니나렛에 관한 나쁜 말이 많이 떠돌았지만, 역시 아이는 아이였다.
“어딜 봐서 내가 천사라는 거야? 마음에도 없는 아부까지 하면서 그렇게 내 튜터가 되고 싶어?”
“…….”
“너도 참 불쌍하다. 그렇게 살면 안 비참해? 내 비위를 맞추느라 마음에도 없는 소리나 해야 하고. 시궁창 인생이야, 시궁창 인생.”
“마음에도 없는 말 아닌데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수확제였죠? 저, 전하께서 어떤 귀족의 가발을 들고 도망가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어요.”
“오, 그래? 너도 내 활약상을 본 거구나? 대단했지?”
“그때 뛰다가 넘어지셨잖아요.”
“그, 그런 말은 왜 꺼내?”
“전하, 그때 넘어지신 이유, 꽃을 밟지 않으려고 그러신 거죠?”
“뭐?”
“저는 다 알아요. 꽃을 밟을까 봐 피하느라 넘어지신 거잖아요.”
그쪽에서도 이쪽에서도, 니나렛은 그런 아이였다.
마음이 여려서 들꽃 한 송이조차도 소중하게 여기던. 이렇게 가시를 세우고 있어도 아이의 본성은 그곳과 다르지 않았다.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럽게 느껴졌기에, 나는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니나렛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머리를 쓰다듬고 싶었지만 허락을 받지 않았다. 내 손은 니나렛의 백금발에 닿지 않은 채 허공에 그대로 멈춰 버리고 말았다.
“작은 들꽃을 아끼는 그 마음이 예뻐서, 저는 황녀님이 작은 천사인 줄만 알았답니다.”
“무, 무, 무슨 헛소리야? 나가!”
니나렛이 새빨개진 얼굴로 축객령을 내리기에, 나는 무릎을 굽히며 미련 없이 아이에게 인사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 면담 때 다시 뵙겠습니다. 다리스에 영광이 있기를.”
“나가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