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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셀프입니다 (46)화 (46/172)



<46>

다음 날, 수확제에서의 피로 때문인지 평소보다 늦은 시간에 잠에서 깨어났다.

기지개를 켜면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더니 시원하고 산뜻한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가을이 시작되고 있었다.

“더 주무시지 않고요?”

“이 정도면 충분히 잤어.”

나는 사샤의 도움을 받아 옷을 갈아입고는 화장대 서랍을 열었다.

안에는 어제 선물로 받은 나비 머리핀과 페어 레이디 귀걸이가 들어있었는데, 나는 그중에서 머리핀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건 듀이가 힘들게 선물해 준 거니까, 들어간 돈이 아깝지 않도록 자주 하고 다녀야지.’

나비 머리핀을 머리카락에 꽂고는 거울을 보았다. 창문 밖에서 햇볕이 들어와 머리카락이 반짝였다.

‘머리핀… 자세히 보니까 객관적으로 평가해도 예쁜 것 같은데?’

왜 가게에서 봤을 때는 평범하다고 생각한 걸까? 조명이 별로여서?

“…….”

거울 속의 나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그냥 웃어 버렸다.

뭐, 좋은 게 좋은 거겠지.

***

느지막하게 식사를 끝내고는 내 방을 나섰는데, 복도에서 우연히 라일라를 마주쳤다.

“라일라, 어제는 잘 쉬었어?”

라일라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다만, 나를 관찰하기라도 하는 듯한 그녀의 눈빛을 보아하니 우연한 만남이 아닌 것 같았다.

사샤가 주방으로 내가 음식을 먹고 난 식기를 반납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일부러 나를 찾아온 걸지도.

‘어제 목걸이 일이 어떻게 끝났는지 몰라서 보러 온 거군.’

알렉사도 나도, 그 사건 이후로 곧장 저택으로 귀가했으니 그녀로서는 뒷일이 궁금할 법도 했다.

“라일라?”

나를 지켜보던 라일라의 얼굴에 실망감이 번졌다.

만약 내가 목걸이를 분실했다면 이렇게 태평하게 있을 리가 없을 테니, 어제 일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을 짐작한 것 같았다.

“용건이 있는 게 아니라면 나는 이만 가 볼게. 좋은 하루 보내.”

“잠깐 기다려, 네리아.”

발걸음을 옮기려다가 다시 멈췄다. 라일라의 목소리에 가시 돋친 비아냥이 실려 있었다.

“그동안 예법을 잘 알면서도 어설프게 행동한 이유가 뭐야? 네가 예법에 숙달한 걸 알았다면 우리가 네 데뷔탕트를 방해하기라도 할 줄 알았니?”

응, 정확하게 정답이네.

하지만 나는 모르는 척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라일라가 볼 때는 내가 예법을 잘 아는 것 같았어? 그렇게 보였다니까 기쁘다! 칭찬 고마워.”

“칭찬 아니니까 말 돌리지 마. 가족이라고 생각했던 너에게 기만당한 것 같아서 기분이 불쾌하니까.”

뻔뻔도 해라. 누가 누굴 기만해?

“기만이라니? 난 9살까지 예법을 배웠어. 단지 저택에서만 편하게 지냈을 뿐이지, 내가 예법을 잊었다고 말한 적은 없는걸.”

거짓말은 아니었다. 라일라는 내 대답에 헛웃음을 내뱉으면서도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는지 입만 뻐끔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기도문은 어떻게 외웠어? 무슨 속임수라도 쓴 거 아냐?”

“속임수? 전혀 아니야.”

“그럼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그렇게 긴 기도문을 다 외운 거야?”

“그냥 열심히 외우니까 외워지던데? 라일라는 그렇게 못 해?”

“그거야 나도……!”

물론 나도 천재가 아니기에 그렇게까지는 절대 못 한다.

하지만 라일라를 긁어 댈 목적으로 태연하게 말하자, 그녀가 자존심이 상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너 드레스는 어떻게 된 거고? 하인들이 분실했다고 했는데!”

“혹시 몰라서 의상실에 가 보니까 있던데? 그날은 노엘라 님이 실수로 하인들에게 다른 드레스를 전달하셨다고 해. 그런데 라일라.”

이미 수확제에서 완벽한 귀족의 모습을 보였는데, 지금 와서 바보인 척하는 행동은 더는 안 통한다.

나는 라일라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그 드레스를 입으면 안 됐던 거야? 나는 왜 네 말이 그런 의도로 들리지? 넌 어떻게 생각해?”

“떨어져!”

라일라가 나에게서 뒷걸음질 치고는 자신의 귀를 문질렀다.

그녀가 나를 노려보았고, 나는 그런 라일라를 보며 미소 짓기만 하는 대치가 이어지던 때였다.

“아가씨, 황궁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황녀궁에서 보내온 것입니다.”

“그래? 알았어.”

하녀가 복도로 와서 그런 소식을 전하기에, 라일라가 홱 몸을 돌려 1층의 로비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드디어 기다리던 것이 왔군.

나 역시 라일라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더니,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너는 왜 따라와?”

“나한테 편지가 왔다고 하잖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편지를 받은 건 네가 아니라 나야.”

“라일라 아가씨, 그것이… 아가씨 두 분께 편지가 각각 왔습니다.”

“뭐?”

하녀가 난감한 말투로 설명을 덧붙이자 라일라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발걸음에 속도를 붙였다.

나 역시 태연한 기색으로 라일라의 뒤를 따랐다.

1층에서는 백작 부인이 황궁의 전령을 맞이하고 있었는데, 라일라와 나는 각자의 이름이 적힌 황금색 편지를 전달받을 수 있었다.

‘어디 뜯어 볼까.’

내용은 어제 앨마 부인이 예고했던 바와 다를 것이 없었다.

나를 니나렛 황녀의 예법 튜터 후보에 추가로 선발했다는 것.

그리고 내가 잃어버린 루비 목걸이는 연못에서 건져 황궁의 장인에게 수리를 맡겼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메모가 적혀 있었다.

그녀의 세세한 배려에 고마운 마음이 느껴졌다.

“네리아, 무슨 내용이니?”

근처에 있던 멜비나 백작 부인이 나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딸이 받은 것보다 내가 받은 편지의 내용에 더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제가 니나렛 황녀 전하의 튜터 후보로 뽑혔다고 하네요.”

“뭐라고? 왜 네가…….”

“이, 이게 뭐야-!”

의아해하던 백작 부인의 목소리는 이어질 수 없었다. 옆에서 라일라가 내지른 비명 때문이었다.

“자질 부족을 이유로 나를 튜터 후보에서 제외하겠다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내가 대체 왜?”

후보에서 떨어질 줄은 알았지만, 사유가 자질 부족이라니. 사교계에 소문내기 딱 좋은 내용이었다.

“그럴 리 없어! 말도 안 돼-!”

저택에 소음이 가득 들어섰다.

황태제비 후보라고 불리는 라일라의 명예에 금이 가는 소리였다.

나는 그런 라일라를 바라보며 비웃음을 삼켰다. 그러게 왜 쓸데없는 짓을 했어?

***

편지를 들고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허락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네리아!”

멜비나 백작 부인이 크게 분노한 모습이 되어 나에게 다가왔다.

“너 수확제에서 무슨 짓을 저지른 거니? 우리는 너를 정성으로 돌봤는데,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쳐?”

정성은 무슨. 뻔뻔함은 유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모님! 제가 뒤통수를 치다니요? 말씀이 너무 심하세요!”

“너는 튜터 후보가 되고, 라일라는 후보에서 제외되었어. 네가 뒤에서 무슨 짓을 했기 때문이겠지!”

“무슨 짓을 한 건, 제가 아니라 라일라의 친구들이겠죠.”

“라일라의 친구들?”

“…….”

대답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백작 부인이 미간을 찌푸리고는 아무런 인사도 없이 내 방을 빠져나갔다. 라일라에게 직접 물어볼 생각인 것 같았다.

‘가서 물어봐야 이번 일을 해결할 방법은 없겠지만.’

열심히 움직여 봐요. 백작 부인이 사라진 곳을 보며 비웃음을 짓다가 다시 편지로 시선을 돌렸다.

“입궁은 1주일 뒤이고.”

나는 그 외의 안내 사항들을 읽으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앨마 부인께 편지를 써야겠네.”

***

멜비나와 라일라는 재빠르게 채비를 마치고는 황궁으로 향했다.

튜터 후보 선발 책임자인 앨마 시녀장을 찾아가서 이 어처구니없는 일에 관해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자질 부족?’

라일라에게는 그런 말을 들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으니까.

“어머니, 이건 부당한 처사예요.”

“네 말이 맞다. 시녀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그런 실수를 벌이다니. 만나서 따져 물을 수밖에 없어.”

앨마 시녀장과 방문 약속을 잡아 둔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황궁 소속이 아니기에 초대장이나 방문 허가를 받아 놓지 않으면 황궁에 들어갈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은 황녀궁에서 입궁 허가를 받을 때까지 정문에서 언제까지고 버틸 생각이었다.

이번 일은 무조건 앨마 시녀장의 잘못이었으니까. 가문 차원에서 정식으로 항의할 요량도 있었다.

“안쪽으로 들어가십시오. 앨마 시녀장님께서 입궁 승인을 해 두셨습니다.”

“예?”

그러나 앨마 부인은 마치 그들의 방문을 예상했다는 듯, 미리 허가까지 내 둔 상태였다.

두 사람은 찜찜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목적지를 향해 이동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렵지 않게 앨마 부인을 만날 수 있었다.

“두 분, 반갑습니다. 오늘 안에 저를 찾으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알고 계셨으면, 왜 이런 행동을 하신 건가요. 튜터 후보 제외 건은 납득할 수도 없을뿐더러 제 딸의 명예에 흠집을 낸 일입니다!”

황녀궁의 응접실.

멜비나가 맞은편 테이블에 앉은 앨마 부인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라일라는 멜비나의 옆에 조용히 앉아 아직은 말없이 억울하다는 기색만을 비치고 있었다.

“철회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신다면 발렌티스 가문에서 이 일을 공식적으로 문제 삼겠습니다.”

“철회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부인!”

“시녀장님.”

그때, 두 사람의 언쟁을 듣고 있던 라일라가 입을 열었다.

“시녀장님께서는 어떠한 사유로 저를 ‘자질 부족’으로 평가하신 건지 질문해도 될까요?”

“됩니다만, 발렌티스 양도 이미 짐작하는 바가 있을 텐데요.”

“혹시 알렉사 로닐 영애가 제 사촌 자매의 목걸이에 손을 대었던 일을 말씀하시는지요?”

“예. 그리고 로닐 영애에게 그 일을 사주한 자들이 발렌티스 양을 추종하는 무리이지요.”

거기까지 이야기를 들은 라일라가 입꼬리를 올렸다. 앨마 부인은 스스로의 말과 행동에 모순점이 있다는 걸 진심으로 모르는 걸까.

“그 이야기는 전해 들었어요. 하지만 그건 친구들이 저 몰래 꾸민 짓일 뿐, 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에요. 로닐 영애가 저를 범인으로 지목하기라도 했나요?”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친구들의 일을 어째서 제가 책임져야 하나요?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조차도 오늘에야 알게 되었는데요? 저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어요. 이건 부당해요.”

라일라의 주장에는 틀린 부분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추종자들에게 그런 짓을 하게 만들도록 그녀가 분위기를 조장한 것은 맞다.

그러나 라일라는 직접적인 명령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실제로 직접 일을 저지른 로닐 영애 본인도 그렇게 증언하지 않았던가.

귀족 사회에서는 물증이 없다면 공식적으로 상대방을 처벌할 수 없다. 그것이 귀족들의 규칙이었다.

이 일이 외부에 알려지게 된다면 비난을 받는 쪽은 라일라가 아니라 앨마 부인이 될 터였다.

“네, 그 말도 맞습니다. 목걸이 사건에서 발렌티스 양은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째서 제가-!”

하지만 앨마 부인은 라일라의 주장에도 아무런 동요 없이 태연한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이건 니나렛 전하의 튜터 후보를 뽑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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