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은 셀프입니다 (45)화 (45/172)



<45>

“잠깐 생각할 시간을 줘요……!”

알렉사가 당황한 얼굴로 고민에 빠졌다. 남의 물건에 손을 댄다고?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난…….’

알렉사는 로닐 남작의 조카로서,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백부인 로닐 남작에게 거둬졌다. 그러나 백부 가족은 그녀를 반기지 않았다.

그나마 로닐 가문의 형편이 좋을 때는 괜찮았으나, 2년 전에 사업에 크게 실패하며 상황이 변했다.

그들은 알렉사를 쓸모없는 군식구 취급하며 하녀나 다름없는 일을 시키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올해 수확제의 페어 레이디가 되거라. 너도 그동안 키워 준 값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

로닐 남작이 그렇게 통보했다.

페어 레이디가 될 희생양은 형편이 어려운 귀족 가문에 보상금을 제안하며 선발하는 것이다.

알렉사가 그 보상금을 받아 낼 도구로 사용된 것이었으나, 거절할 방법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중간에 페어 레이디가 바뀐 덕분에 사교계에서 퇴출당하지는 않았지만, 이대로라면 자신의 인생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더는 친척들에게 그런 취급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라일라 발렌티스의 파벌에 속할 수만 있다면, 친척들도 더는 자신을 무시할 수 없게 될 테지만.

‘하면 안 되는 일이잖아? 네리아 영애는 무슨 잘못이 있다고?’

알렉사가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데, 라일라의 추종자가 그녀의 갈등을 눈치채고는 입을 열었다.

“싫은가 보네요. 권유는 없던 일로 할게요. 굳이 로닐 양이 아니어도 상관없으니까요. 저희는 이만.”

“잠깐만요! 하, 하겠어요!”

독촉은 마음의 여유를 잃게 만든다. 그렇기에 듣는 사람이 섣부른 판단을 내리게 만들기도 한다.

‘…어? 나 방금 뭐라고 했지?’

고민하는 동안 기회가 사라졌다는 생각에 알렉사는 저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대답을 내뱉고 말았다.

“잘 생각했어요! 로닐 양이 할 일이 어떻게 되냐면요-”

그녀들이 내뱉는 설명을 들으며 알렉사는 식은땀을 흘렸다. 없던 일로 하기에는 늦어 버린 것이다.

***

연못가는 실외지만, 주변이 나무와 수풀로 빽빽하게 둘러싸여 실내처럼 외부와 차단된 공간이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몰래 일을 벌이기에 적당한 장소지.’

그렇게 생각하며 수풀 안으로 발을 들였더니, 연못 옆에 소녀 한 명이 혼자 서 있었다.

‘…알렉사 로닐이잖아?’

의외였다. 라일라의 추종자들이 우르르 몰려 있을 줄 알았더니.

이렇게 되면 처음 생각했던 계획을 쓸 수 없게 되었지만, 상관은 없다. 계획이야 바꾸면 되니까.

나는 무방비한 모습으로 알렉사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알렉사 로닐 양이 맞으시지요? 황제 폐하께 인사드릴 때, 같은 줄에 서 있었잖아요.”

“…안녕하세요. 그랬을걸요.”

“저는 귀족 친구가 한 명도 없어서 초대장을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우리 사이좋게 지내요.”

들뜬 목소리로 재잘대며 테이블 의자에 앉았는데 알렉사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로닐 양? 얼굴색이 나빠 보여요. 어디 아픈가요? 괜찮아요?”

“죄송한데 이쪽으로 와 주실 수 있나요? 제가 두통이 생겨서요.”

“세상에! 제가 부축해 줄게요.”

의자에서 일어나 연못 옆에 선 알렉사에게 가까이 갔을 때였다.

파스슥-

둘밖에 없는 조용한 공간에 갑자기 수풀이 스치는 소리가 울렸다.

“뭐지?”

알렉사가 화들짝 놀라서는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근처에 있는 나무에서 참새 한 마리가 푸드덕 하늘로 날아올랐다.

“참새?”

그녀는 참새가 날아가는 모습을 확인하고도 경계하듯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이곳에 있는 사람은 그녀와 나 둘뿐이었다.

알렉사가 그 사실을 확인하고는 표정을 굳힌 채 나에게 다가왔다.

“네리아 발렌티스 양, 사실 동기 모임 같은 건 없어요.”

“네?”

“정말 미안해요-!”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었다.

목에서 따끔한 감각이 느껴졌다. 알렉사가 손을 뻗어 내 목걸이를 잡아 뜯어낸 것이었다.

그러고는 연못 안으로 루비 목걸이를 던져 버렸다.

조용하던 연못가에 풍덩, 물소리가 유독 커다랗게 울렸다.

알렉사는 주변에 목격자가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는 도망치듯 자리를 뜨려 했다.

나는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향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로닐 양, 미안해요.”

“…네?”

알렉사가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해 있었다.

“라일라의 짓이겠죠? 상관도 없는 사람을 집안싸움에 말려들게 했어요. 제가 대신 사과할게요.”

“왜… 왜요……?”

“로닐 양이 저한테 이런 짓을 할 이유가 없다는 걸 아니까요. 불편한 일 하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돌려 연못을 담담하게 내려다보았다.

“목걸이는 제가 찾아볼게요. 저 수영할 줄 알거든요. 그러니까 로닐 양은 걱정하지 말고 돌아가요.”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저는 괜찮으니까 죄책감 느끼지 않다고 된다고요. 아까 미안하다고 했잖아요? 그걸로 충분해요.”

“발렌티스 양……! 저는, 저는!”

알렉사가 혼란에 빠져 혼잣말을 내뱉고 있을 때였다.

“괘씸하게도 황궁 안에서 이런 짓을 벌이다니.”

“애, 앨마 시녀장님-!”

앨마 부인이 수풀을 헤치며 연못가 안으로 들어왔다. 손에는 내가 떨어트린 귀걸이를 든 채로.

알렉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알렉사 로닐 양, 누가 당신에게 이런 짓을 시켰습니까.”

나는 앨마 부인과 헤어질 때, 일부러 귀걸이 한 짝을 떨어트렸다.

만약 흘린 것이 다른 물건이었다면, 그녀는 영애들의 모임을 방해하지 않도록 지금 이 자리가 아닌 다른 곳에서 돌려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페어 레이디의 귀걸이는 아니다. 황가에서 내린 선물이다.

내가 귀걸이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다른 영애들이 알게 되면, 내가 비난을 받을 수도 있었다.

모임에는 잠깐 방해가 되더라도 나에게 곧장 돌려주려고 했겠지.

실제로도 그녀는 나를 뒤따라 여기까지 쫓아왔다.

“아, 아, 아니. 저는, 저는……!”

“저는 로닐 양을 탓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괜찮으니 말해 보세요. 이런 짓을 사주한 사람이 누굽니까?”

그 말은 즉, 연못가에서 그 어떤 일이 벌어진다고 하더라도, 황녀궁의 시녀장씩이나 되는 거물이 이 사건의 목격자가 된다는 의미였다.

***

최근, 앨마 부인이 가장 신경 쓰고 있는 일은 그녀가 모시고 있는 니나렛 황녀에 관한 것이었다.

제멋대로 행동하여 나쁜 소리를 듣고 있지만 니나렛은 본성이 나쁜 아이가 아니었다.

단지, 사람들에게 아직 마음을 열지 않은 것이다.

‘우수한 영애를 튜터로 붙이는 방법이 효과가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런 이유로, 앨마 부인은 수확제에서 처음 본 네리아 발렌티스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니나렛과 네리아는 어두운 성장 과정을 겪은 공통점이 있었으니까.

네리아 발렌티스는 기품 있는 태도를 지닌 데다 페어 레이디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8년 동안 평민으로 지냈다는 과거가 무색해질 정도였다.

‘친척들 사이에서 생존을 위해 이를 악물고 노력해 왔던 거겠지.’

니나렛과 잘 맞지 않을까?

그랬기에 그 뒤로도 네리아를 유심히 지켜보았건만, 그녀에게서는 아무런 결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 그녀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겼다. 네리아 발렌티스가 실수로 알코올이 든 잔을 집어 든 것이 계기였다. 그런데-

‘발렌티스 양, 많이 힘들었나요?’

‘…힘들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높은 귀족도, 빈민가의 고아도 다들 각자의 힘듦이 있는걸요.’

기도하며 괴로움을 견뎌 냈을 아이가 안타깝게 느껴진 나머지, 저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었다.

고의는 아니었으나 그녀의 백부모를 겨냥해 버렸다. 하지만 네리아는 능숙하게 대답을 피해 갔다.

처음에 언급했던 ‘힘듦’ 또한 그녀의 친척 때문이 아니라는 의미를 넌지시 전해 온 것이다.

‘백작가에서 무슨 대접을 받고 있는지 뻔히 보이건만.’

그런데도 네리아는 집안의 내부 사정을 바깥으로 흘리지 않았다. 가문의 명예를 지킨 것이다.

‘귀족이라면 응당 그래야지.’

온 수도에 조카를 핍박한다는 티를 내고 다니는 발렌티스 백작 부부와는 달리 품위가 있었다.

그리고, 네리아가 떨어트린 귀걸이를 돌려주러 갔을 때였다.

친목 모임치고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지켜보고 있었더니, 역시나 알렉사 로닐이 사고를 냈다.

황궁 안에서 이런 일을 벌여?

괘씸함을 느꼈지만, 사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네리아의 의연하고 덤덤한 반응이었다.

아무리 타인의 사주를 받아 저지른 일이라고 해도 자신에게 피해를 입힌 상대에게 도리어 사과라니.

그릇의 크기가 다르다.

앨마 부인은 그녀라면 니나렛을 휘어잡고 좋은 길로 이끌어 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목걸이 사건의 관련자들에게는 적당한 처분을 내려야겠지.’

앨마 부인이 눈을 가늘게 뜨며 연못가 안으로 발을 들였다.

***

나는 앨마 부인이 알렉사를 추궁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괜히 알렉사를 감싸기 위해 나서지 말라는 앨마 부인의 엄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끼어들 생각 없었는데.’

라일라의 이름을 언급한 것과 알렉사에게 사과한 행동 모두가 앨마 부인을 의식한 행동이었으니까.

“로닐 양, 언제까지 입을 다물고만 있을 겁니까. 누가 시켰죠?”

“시킨 게 아니라 제가 한 짓이에요. 원래 페어 레이디는 저였는데, 발렌티스 영애에게 기회를 빼앗겨서 질투가 나서…….”

“그걸 저보고 믿으라고 하는 소리는 아니겠지요. 대답하지 못하면 목걸이값을 로닐 양이 변상해야 할 겁니다. 제가 목격했으니까요.”

변상. 그 말이 직격타였는지 알렉사의 또다시 얼굴이 희게 질렸다.

“그건……!”

결국, 알렉사는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인지 그녀의 입에서 하나씩 이름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라일라 발렌티스 영애와 함께 행동하는 영애들의 이름이군요? 라일라 영애도 같이 있었습니까?”

“라일라 영애는 없었어요. 아! 설마 그래서 중간에 가 버린 건가?”

알렉사가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중얼거리자, 앨마 부인은 더 질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라일라 영애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 말이라도 충분합니다.”

그녀는 황궁에서 여러 일을 겪었다. 이번 사건의 주모자가 라일라라는 것 정도는 진작 파악했겠지.

“황궁 안에서 벌어진 일이니, 분실한 목걸이는 시녀장인 제가 책임지고 해결하겠습니다.”

그녀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무리 네리아 양이라도 연못에서 드레스를 입고 수영하기는 어려울 테니까요.”

“…그 말도 들으셨군요.”

“목걸이는 하인을 시켜 찾아낸 뒤 파손된 부분이 있으면 고쳐서 돌려 드리겠어요.”

“감사합니다, 시녀장님.”

“그리고 내일 황궁에서 편지가 갈 거예요. 네리아 양이 기다리는 소식이 있을 테니, 오늘은 저택으로 들어가 편히 쉬도록 해요.”

앨마 부인이 그 말을 남기고는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발렌티스 저택에서 편지를 받는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닐 거라는 유쾌한 확신이 들었다.

“목걸이… 정말 미안했어요.”

마지막으로 연못가에 남아 있던 알렉사가 후회가 가득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처음은 그녀가 자의로 이곳에 온 줄 알았다. 하지만 나에게서 목걸이를 뜯어낼 때, 괴로워 보이던 표정을 보고 알게 되었다.

반쯤은 떠밀려서 온 것이라고.

게다가 그녀가 사과하지 않았다면 나도 이대로 그녀를 놔두고 떠나 버렸을지도 모르겠지만.

“알렉사 양.”

나는 알렉사에게 다가갔다.

목걸이 일로 다른 영애들과 엮이고 말았지만, 어차피 미성년 소녀들 사이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입에 올리는 것도 망신이니 가문 간의 불화로 확대될 일은 없다.

알렉사가 입을 피해가 있다면, 라일라 무리의 주도로 사교계에서 고립되는 일 정도뿐. 그러니 그 문제는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었다.

“데뷔탕트를 치렀으니 앞으로는 많이 바빠질 것 같아요. 알렉사 양도 저와 함께했으면 해요.”

그녀가 나에게 저지른 잘못을 용서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러자 알렉사가 눈물을 펑펑 쏟으며 오열하기 시작했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그런 짓을 해선 안 됐었는데……!”

“괜찮으니까 울지 마요. 저택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제 마차로 데려다줄 테니 같이 갈까요?”

나는 울고 있는 알렉사의 등을 천천히 토닥여 주었다.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새로운 친구가 생긴 걸지도. 오늘은 열심히 움직였던 만큼 수확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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