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은 셀프입니다 (44)화 (44/172)



<44>

‘누구 머리에서 나온 계획이야?’

떨떠름한 표정으로 봉투를 접어 넣었다.

줄리아가 헤어지기 직전에 나에게 알려 주었다. 목걸이를 조심하라고.

비록 방법이 별로일지언정, 나에게서 목걸이를 빼돌리겠다는 발상만은 꽤 그럴싸했다.

머리핀은 금전적인 가치가 낮고, 귀걸이는 황가에서 내린 물건이라 감히 손대지 못한다.

남은 것은 목걸이인데, 나에게는 값비싼 루비 목걸이를 배상할 능력이 없다. 분명 난감해졌겠지.

오늘 수확제에서의 활동으로 많은 사람과 친분을 쌓았으나, 데뷔탕트를 치르자마자 돈을 빌린다?

사정이 있다고 해도 내 평판이 어떻게 될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날 믿고 호의로 보석을 대여해 준 노엘라에게도 실례가 돼.’

함정을 피하는 방법은 쉬웠다. 간단하다. 무시하고 안 가면 된다.

‘하지만.’

백부 가족들이 부지런히도 나를 공격하려 드는데, 나만 계속 가만히 있자니 아쉽지 않겠는가.

‘뭔가 좋은 방법이 없으려나.’

나는 태연한 자세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장소에 니나렛 황녀궁의 시녀장인 앨마 부인이 있었다.

그녀는 황제궁의 시녀 출신으로 황제 폐하의 신임을 받아 황녀궁의 시녀장으로 진급했는데, 나 개인적으로도 호감이 있는 자였다.

다소 고지식하지만, 공정하고 올곧은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니나렛 황녀의 튜터 후보를 선발하는 책임자이기까지.’

나는 그녀가 서 있는 장소를 향해 다가갔다. 이 엉성한 함정을 역으로 이용할 계획이었다.

앨마 부인은 초대 장소인 연못가까지 동행하기에 가장 적당한 상대였다.

***

“실례지만, 발렌티스 양.”

일부러 앨마 부인이 볼 수 있는 각도에서 잔의 볼 부분이 뾰족한 음료를 집어 들었다.

다른 의도가 있다는 걸 들키지 않게끔 그녀 쪽에서 먼저 말을 걸도록 유도한 행동이었는데, 역시나 그녀는 나에게 말을 붙여왔다.

“그 잔에는 알코올이 들어가 있어요. 미성년인 발렌티스 양이 마셔도 되는 건 바로 이것.”

그녀가 볼 부분이 둥근 투명한 잔을 나에게 건넸다.

“설마 일부러 알코올이 든 잔을 가져온 건 아니겠지요?”

“그럴 리가요! 긴장이 풀려서인지 실수를 했어요. 음료수를 구분하는 방법은 분명 외웠었는데…….”

절대 지식이 없어서 실수한 것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피력하며 앨마 부인에게 잔을 받아 들었다.

“알아요. 오늘 수확제에 참석하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했겠지요?”

“네, 아직은 많이 부족하지만요.”

“발렌티스 양은 충분히 훌륭한 레이디예요. 연회는 즐기고 있나요?”

음료수와 관련된 주제를 계기로 자연스럽게 앨마 부인과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나는 여유롭기보다는 순진함에 가까운 태도로 그녀에게 대답했다.

“네, 물론이에요! 마음이 너무 들떠서 오늘은 저택으로 돌아가도 제대로 잠들지 못할 것 같아요.”

“데뷔탕트를 치를 때는 그렇죠. 과거의 저도 그랬답니다.”

“시녀장님께서도요? 저 혼자만 그런 게 아니어서 다행이에요.”

가벼운 웃음이 터졌다.

“그렇지만 정말이지… 제가 페어 레이디 역할에 성공할 줄은 몰랐거든요. 지금도 심장이 뛰어요.”

“그 말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만큼 발렌티스 양은 완벽했어요.”

“너무 과분한 칭찬이신걸요.”

“그런데 발렌티스 양은 어떻게 기도문을 다 외운 건가요? 시간이 많지 않았잖아요.”

“대단한 일은 아니었어요. 그냥-”

나는 거기까지만 말하고는 근처에 있는 시계를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시간을 확인하는 걸 보니, 다른 약속이라도 있는 건가요?”

“약속이라고 할 것까지는 아닌데, 실은 제가 데뷔탕트 동기분께 초대장을 받았거든요.”

나는 하녀에게 전달받았던 편지를 꺼내 그녀에게 보여 주었다.

“데뷔탕트 동기 모임? 요즘 어린 영애들은 귀엽네요. 발렌티스 양도 가려는 건가요?”

“네. 아무래도 저는 귀족 친구가 없다 보니, 이번 모임이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아서요.”

“제가 바쁜 레이디에게 괜히 말을 걸었군요. 지금 출발하면 약속 시간에 맞을 거예요. 잘 다녀와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약속 장소까지 가는 길을 몰라서 그런데, 하녀에게 길 안내를 부탁해도 실례가 되지는 않을까요?”

다들 바빠 보여서 개인적인 부탁을 해도 될지 모르겠어요, 하고 멋쩍게 웃자, 앨마 부인이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황궁 소속 하녀들은 그런 도움을 주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거랍니다. 당연히 실례가 되지 않아요.”

“그렇군요! 공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황궁에 소속되어 있는 건 저도 마찬가지죠. 괜찮다면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네?”

앨마 부인이 나에게 길 안내를 자처할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것 또한 내가 유도한 부분이니까.

나는 그녀가 궁금해하는 질문을 받았을 때, 바쁜 척 일부러 중간에서 대답을 끊어 버렸다.

그러니 그녀는 나머지 대답을 듣기 위해서라도 목적지까지 함께 가겠다고 나에게 제안할 것이다.

-라는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길 안내 정도는 딱히 어렵거나 번거로운 일도 아니니까.

하지만 나는 과분한 친절에 놀란 척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길 안내를 시녀장님께서요?”

“사실은 제가 발렌티스 양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답니다.”

“…그럼 죄송하지만, 실례를 무릅쓰고 부탁드리겠습니다.”

앨마 부인에게 무릎을 굽혀 인사하고는, 그녀를 따라 어디론가 걷기 시작했다.

발걸음을 옮길수록 사람들이 적어져 주변이 조용해지고 있었다.

“아까 물어봤던 주제인데, 발렌티스 양은 그렇게 긴 기도문을 어떻게 전부 외운 건가요? 저 말고도 궁금한 사람이 많을걸요.”

“재미없는 대답이라 미리 죄송하다는 말씀부터 드릴게요. 어린 시절부터 힘들 때마다 기도서를 읽었더니 저절로 외워졌어요.”

“…….”

반걸음 앞서 걸어가던 앨마 부인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았다.

“발렌티스 양, 많이 힘들었나요?”

“…힘들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높은 귀족도, 빈민가의 고아도 다들 각자의 힘듦이 있는걸요.”

“그 말이 정답이네요.”

앨마 부인이 미소를 지었다.

방금 한 대답이 마음에 들었던 것인지 그 질문 이후로 그녀의 분위기가 좀 더 친절해진 것 같았다.

“발렌티스 양을 이름으로 불러도 될까요?”

“그렇게 해 주신다면 제가 영광입니다……! 그런데 시녀장님.”

“네?”

“사실 따로 찾아뵙고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었는데, 이참에 말씀드려도 될까요?”

“편하게 말해 줘요.”

“니나렛 황녀님의 튜터를 선발한다고 들었거든요. 저도 후보가 될 수는 없을까요?”

앨마 부인은 나를 상당히 좋게 평가하고 있다.

그녀가 나를 대할 때의 태도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기에 직접적으로 말해 본 것이었다.

하지만 후보조차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닌 만큼, 말투나 목소리만큼은 조심스러웠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죠. 그런데 왜 튜터가 되고 싶은가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어째서인지 어린아이들이 유독 저를 잘 따르곤 했거든요.”

“저는 그 이유를 알 것 같네요.”

“그 말씀은 설마……?”

“글쎄요. 당장 대답해 줄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니까요. 좀 더 고민하고 결정할게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시녀장님.”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말한 것에서부터 반쯤은 긍정적인 쪽으로 결정된 것 같긴 하지만.

“거의 다 왔네요. 네리아 양이 찾는 장소는 저기예요.”

조금 더 걷다 보니, 눈앞에 목적지가 보였다.

앨마 부인이 손을 들어 가리킨 곳에 우거진 나무와 수풀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다.

“어? 연못은 어디에……?”

“바깥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지만, 수풀 안으로 들어가면 연못이 있을 거예요. 그 옆에 테이블도 있어서 차를 마시며 쉴 수 있답니다.”

“아, 그런 거였네요.”

나는 온화하게 웃고 있는 그녀를 향해 감사를 표현하고자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시녀장님과 함께 걸을 수 있어서 영광이었어요.”

“저도 이야기 즐거웠어요.”

“감사드려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렇게 이야기가 끝나고, 새로운 만남을 기대하느라 들뜬 모습으로 몸을 빠르게 홱, 돌렸다.

그 반동으로 왼쪽 귓불에서 무언가가 툭 잔디밭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나는 모르는 척 몸을 돌려 수풀 속으로 들어갔다. 안에 누가 기다리고 있을까 기대하면서.

***

알렉사 로닐은 소심하고 눈에 잘 띄지 않는 소녀였다.

원래라면 그녀는 올해 수확제의 희생양이 되어 사교계에서 퇴출당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운이 좋게도 다른 희생양이 생기는 바람에 자신에게 닥친 비극을 피해 갈 수 있었다.

‘그랬으면 뭘 해.’

그러나 알렉사는 기껏 데뷔탕트에 왔으면서도 소극적인 성격 탓에 사람들과 가까워지지 못하고 있었다.

차라리 책이나 읽고 싶어. 그렇게 생각하던 때였다.

“로닐 가문의 알렉사 양이시죠?”

알렉사를 찾아온 영애가 있었다.

친해지고 싶다기에 따라갔더니 그곳에는 라일라 발렌티스를 비롯한 그녀의 추종자들이 있었다.

디르케인 란타나 님의 파벌로 구성된 무리로, 사교계에서 나름대로 영향력이 있는 영애들이었다.

“안녕하세요, 로닐 양.”

라일라 발렌티스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더 설명이 필요 없는 유력한 황태제비 후보로, 란타나 님이 총애하는 소녀라고 했다.

먼저 말을 거는 것이 불가능한 유명한 영애 앞에 섰더니, 알렉사는 저절로 긴장이 되고 말았다.

“긴장하지 마요. 앞으로 사이좋게 지내고 싶어서 부른 거니까요.”

“네, 발렌티스 양.”

“제 친구분들과 이야기 나눠 봐요. 저는 마침 어머니가 찾으셔서 먼저 가 봐야겠지만요. 다시 또 만나요.”

라일라가 그 말을 남기고 사라지자, 남아 있는 다른 추종자 영애들이 알렉사에게 다가왔다.

“사실은 저희와 친하게 지내던 영애가 동부로 떠나게 되었거든요.”

“빈자리가 허전해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싶었는데 마침 로닐 양이 눈에 띄지 않겠어요?”

내가? 알렉사의 가슴이 쿵쿵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전에, 로닐 양이 해 줘야 할 일이 있어요. 간단한 담력 테스트인데요, 대단한 건 아니고 작은 장난이에요.”

“통과의례 같은 거죠. 라일라 영애는 황태제비가 될 분인데 아무나와 같이 다닐 수는 없잖아요?”

“제가 뭘 하면 되나요?”

하지만 알렉사는 영애들의 말을 듣고는 표정을 굳히고 말았다.

방금 뭐라고? 네리아 발렌티스의 루비 목걸이를 없애라고?

“어렵지는 않을 거예요. 방법은 저희가 알려 줄 테니까요.”

그녀들은 웃고 있었으나 알렉사는 이 제안의 의도를 알고 있다.

성공하면 무리에 받아 주겠지만 중간에 사고라도 생긴다면, 자신이 잘못을 전부 뒤집어써야 한다.

“하기 싫으면 거절해도 돼요. 다른 영애를 찾으면 되거든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