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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셀프입니다 (43)화 (43/172)



<43>

중앙 정원에 마련된 휴게 공간 안에 까다로운 인상의 여자가 홀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녀는 수확제에 참석한 다른 귀족들과는 상당히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연회를 즐기거나 남들과 교류하는 일 따위는 일절 없이, 상당히 긴 시간을 그저 앉아만 있었다.

마치 그녀 주위로 보이지 않는 장벽이 세워진 듯했다. 그곳에만 다른 공기가 흐르는 것 같기도 했고.

아주 가끔 그녀에게 말을 거는 사람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그녀는 눈이 안 보이고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전부 무시했다.

“안녕하세요.”

하지만 나는 그런 것에 아랑곳없이 당당하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저는 네리아 발렌티스예요. 다리스에 영광이 있기를.”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나를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얼굴이 뚫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눈앞의 여성을 마주 보았다.

그녀가 바로 40대에 이미 거장의 반열에 든, 제국이 자랑하고 사랑하는 천재 화가 이사벨라였다.

“카터와 로즈의 딸이로군요.”

“네, 옆에 앉아도 될까요?”

끄덕. 허락의 의미를 담은 고갯짓이 이어졌다.

이사벨라는 나를 거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편하게 앉을 수 있게끔 자리를 비켜 주기까지 했다. 기대 이상의 환대였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놀라서 수군거리기도 했다.

‘그 이사벨라 님이 처음 만난 사람에게 옆자리를 허락해?’ 하는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다.

‘뭐, 놀랄 만도 하겠지.’

그녀는 극도로 폐쇄적인 성격 때문에 모르는 사람과는 아예 말을 섞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으니까.

그런데도 사교계에서 이런 무례가 용인되는 것은 이사벨라가 대단한 예술가라는 이유에서였다.

‘상대가 고위 귀족이나 대단한 부자라도 해도 예외는 없었어.’

하지만, 나에게는 그녀에게 말을 걸어도 절대 무시당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내가 단상에서 기도문을 낭송할 때부터, 이사벨라가 이미 할 말이 많다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름이…….”

“네리아예요. 네리아 발렌티스.”

“그래요, 네리아 양이었군요. 죽은 로즈를 많이 닮았습니다.”

그녀가 손을 들어 올려 내 뺨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어떻게 카터와 로즈의 아이를 잊고 지낼 수 있었던 건지. 적어도 나만은 그래서는 안 됐던 건데.”

그녀의 눈동자에 죄책감과 부채감 같은 것이 짙게 스며들었다.

지난날의 이사벨라는 가문이 파산하며 심한 생활고를 겪었다. 더욱이 유별난 성격 때문에 제대로 된 일을 구하기도 힘들어했다.

그런 그녀를 발견하고 생활비를 지원해 준 사람이 내 부모님이었다.

그러다가 뒤늦게 그녀의 재능이 발견되었고, 전폭적인 후원을 받아 재능을 꽃피울 수도 있었다.

그녀의 입장에서 부모님은 인생의 은인이었다.

‘애초에 이사벨라가 백부네와 가깝게 지내 주는 것도 그들이 부모님의 가족이어서 그런 거였는데.’

그런데도 라일라는 줄리아에게 이사벨라를 미끼로 던져 나를 공격하도록 만들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죽어서 두 사람을 볼 낯이 없겠어요. 미안해요, 네리아 양.”

나는 말없이 웃었다.

죽은 네리아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녀를 이해했다.

이사벨라는 소문이나 세상일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부모님의 죽음은 이사벨라가 외국에 체류하고 있을 때 벌어진 일이었고, 그 뒤로는 백부가 작정하고 내 존재를 지워 버렸다.

게다가 가족도 아닌데, 눈에 보이지 않으면 기억에서도 잊히는 것이 사실은 당연한 일이었다.

“힘들 때 돌봐 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그때는 더 어렸을 텐데.”

“미안하다는 말은 이미 하셨어요. 그렇지만 이사벨라 님이 저에게 정 미안해하신다면…….”

나는 일부러 장난스러운 말투로 뻔뻔하게 말했다.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부탁이요?”

나는 그녀에게 소곤소곤 무언가를 이야기한 뒤, 지나가던 하녀를 불러 줄리아 델프를 찾아 이곳으로 데려와 달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조금 뒤.

“이사벨라 님께서 나를 찾으셨다고? 거짓말하는 거 아니지?”

줄리아가 어리둥절하면서도 기쁨이 가득한 얼굴이 되어서는 하녀를 따라오고 있었다.

“줄리아 양, 반가워요!”

“…네리아 양?”

그녀가 나와 이사벨라를 번갈아 보며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줄리아 양, 이쪽으로 와요.”

“네?”

“이사벨라 님께 제 친구를 소개해 드리고 싶어서요. 동부의 델프 가문 출신, 줄리아 양이에요.”

“아… 그러니까.”

줄리아는 이 상황에 적지 않게 놀란 것처럼 보였다.

내가 왜 이사벨라와 함께 있는가, 그리고 어째서 자신에게 이사벨라를 소개해 주는가.

의문점이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줄리아는 상황 파악이 빨랐다. 역시 동부의 대부호인 델프 가문 출신다웠다.

“줄리아 델프입니다. 제국의 살아 있는 국보이신 이사벨라 님을 뵙게 되어 진심으로 영광입니다.”

“줄리아 양에게는 제가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이 드레스도 줄리아 양에게 선물로 받은 것인데, 그녀가 아니었다면 입을 옷이 없어서 수확제에 오지 못했을 거예요.”

“오, 그래요? 네리아 양이 좋은 친구를 사귀었군요.”

“별말씀을요. 친구를 위한 일이었는걸요. 드레스쯤이야 몇 벌이고 더 선물해 드릴 수 있어요.”

처음부터 친한 사이였던 척, 줄리아가 자연스럽게 대화에 참여했다.

그런 식으로 화기애애한 대화가 이어졌고 어느 시점이 되었을 때였다. 이사벨라가 처음으로 줄리아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줄리아 양, 듣기로는 부친께서 저에게 초상화를 원하신다지요?”

“그렇기는 한데…….”

“의뢰를 수락하겠어요. 자세한 건 걸으면서 이야기할까요? 초상화를 안 그린 지 꽤 되었지만, 네리아 양의 부탁이라면 들어줘야죠.”

“잘됐어요! 두 분, 이야기 잘 나누시길 바랄게요. 저는 파트너인 그레이 경을 찾으러 돌아갈게요.”

“저기, 네리아 양.”

줄리아가 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마워요. 그리고 저번 일은 미안했어요. 나중에 편지할게요.”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얼굴에도 밝은 미소가 걸렸다.

티 파티에서 나를 대하던 때와는 전혀 달라진 표정이었다. 덧붙여서 라일라를 버린 것이기도 했고.

‘당연한 결정이겠지만.’

라일라의 티 파티에서 굳이 줄리아를 골라 그녀의 옆자리에 앉은 것에는 목적이 있었다.

홍차를 쏟게 만들어 드레스를 배상받는 것이라면 그 자리에 있던 누구라도 상관이 없었다. 다들 그 정도의 재력은 있었으니까.

하지만 후보 중에서 확실하게 내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심지어 큰 부자였다.

겸사겸사 그쪽을 고르는 것이 효율적인 선택이지 않겠는가.

“네, 편지 기다릴게요.”

“아, 그리고 네리아 양.”

줄리아가 내 옆을 스쳐 지나가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목걸이 조심해요.”

***

라일라는 자신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움직이던 줄리아를 떠올리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가능하면 동부로 돌아가지 말고 내 옆에 남아 줬으면 좋겠는데.’

줄리아 델프는 눈치도 빠르고 일 처리도 깔끔했다. 그녀의 추종자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인재였다.

‘화가 때문인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었던 건 좋았다.

황후가 되면 그녀를 다시 수도로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라일라가 그런 생각을 하던 때였다.

“초상화를 그려 줄 수는 있겠지만, 동부까지 가는 건 멀어서 글쎄요.”

줄리아가 이사벨라를 데리고 라일라와 그녀의 추종자들 앞을 보란 듯이 지나치고 있었다.

“그럼 제 아버지를 수도로 오시게 하겠습니다. 이사벨라 님의 그림을 얻을 수만 있다면 만사를 제쳐 두고 오실 거예요.”

“그런데 동부는 온천이 유명하지 않나요? 여행 삼아 가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

“그러시다면 동부로 안내해 드릴게요! 머무시는 동안 불편하신 일이 일어나지 않게끔 모시겠어요.”

우연이 아니다.

일부러 지나간 것이다. 라일라에게 이제 네 명령을 따를 이유가 없다고 알려 주려는 의도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어째서 줄리아가 벌써 이사벨라를 만났어? 아직 소개하지 않았는데?

그 광경을 함께 목격한 추종자 영애들 역시 당황한 모습으로 라일라의 눈치를 살폈다.

라일라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손에 들고 있던 부채에 힘이 들어갔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줄리아가 발을 빼 버림으로써 네리아를 곤란하게 만들 계획이 자연스럽게 무산되고 말았다.

이 배신자 같으니라고! 라일라는 왈칵 짜증이 치밀었다.

한편, 다른 영애들은 그들끼리 서로 시선을 주고받고 있었다.

자존심이 강한 라일라의 성격상 이대로 일을 끝내 버릴 리 없었다. 분명 그들 중에서 누군가는 자진해서 나서 주어야 할 테지만.

“…….”

아무도 손을 드는 사람이 없었다.

이럴 때 나서야 라일라의 눈에 들 수 있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적당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음료수를 뿌려 목걸이를 더럽히고 세척을 핑계로 가져가 버려?’

하지만 네리아 발렌티스는 페어 레이디로 데뷔탕트를 치른 덕에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고 있다.

대놓고 괴롭히는 모습을 보였다가는 외려 이쪽이 곤란해진다.

더욱이 이곳은 황궁이다. 황궁 안에서 본인의 손을 더럽히는 게 주저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줄리아는 무슨 방법을 쓰려고 했지? 미리 물어보기라도 할걸.’

추종자 영애들이 말없이 머뭇대기만 했고, 라일라가 한심하다는 표정을 숨기며 그녀들을 지켜보았다.

‘내가 친히 황태제비의 오른팔이 될 기회를 주는데 몸을 사려?’

쓸모없는 것들! 이렇게 되니 줄리아가 더 아깝게 느껴졌다.

“다들, 알렉사 로닐 영애라고 알고 계세요?”

그때, 어떤 소녀가 입을 열었다.

“알렉사 로닐? 이번에 사교계에 데뷔한 영애 맞죠? 원래 올해의 페어 레이디가 되어야 했을 분이요.”

“네, 맞아요. 아까 지나갈 때 보니까 사람들이랑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 겉돌고 있더라고요.”

“아, 로닐 영애가 그랬나요?”

소녀들 사이에 의미심장한 눈길이 오갔다.

“이렇게 좋은 날에 데뷔탕트를 치른 영애가 혼자 겉돌고 있다니, 안타까운 일이네요.”

“저희가 알렉사 로닐 영애를 도와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그러고는 곧, 그녀들의 입가에 심술궂은 미소가 걸렸다.

***

“네리아 발렌티스 님이시죠?”

나를 찾는 사람이 있기에 몸을 세워 고개를 돌렸더니, 황궁의 하녀가 나에게 편지 한 통을 전달했다.

누가 보낸 걸까. 봉투를 열었더니, 종이 안에 동글동글한 글씨로 초대장이 쓰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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