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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셀프입니다 (42)화 (42/172)



<42>

살다 살다 별일을 다 목격하는 중이었다. 황궁 행사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황녀 전하! 돌려주십시오. 제발!”

“싫다니까? 잡으면 돌려줄게!”

니나렛이 어디 한번 잡아 보라고 신나게 떠들고 있었지만, 예법상 귀족이 황족에게 함부로 손을 댈 수는 없었다.

남자 귀족은 울상이 된 채로 그저 니나렛을 쫓아가기만 할 뿐이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니나렛을 차마 말리지 못하고 먼 곳에서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남자에게 안타깝다는 시선을 보내는 건 덤이었다.

…맙소사.

나는 니나렛의 튜터가 되어 아이의 성격을 바꿔 줄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 인연을 통해 황족인 니나렛을 내 뒷배로 삼는다. 그것이 나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자신은 있었다.

만난 지 하루 만에 나에게 마음을 열었던 셜리처럼, 아이들은 이상할 만큼 나를 잘 따랐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평행 세계의 니나렛 역시도 가끔은 귀찮게 느껴질 정도로 나를 좋아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지금.

그때의 자신감이 사라지고 말았다. 니나렛이 단순히 귀족을 괴롭히는 장난꾸러기여서가 아니었다.

멀리서 보는데도 아이의 눈동자에 독기가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예전 세계의 니나렛을 알고 있는 나에게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

‘튜터가 된다 해도, 과연 저런 상태의 니나렛과 친해질 수 있을까?’

…라고 잠깐 생각했으나, 걱정은 짧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쩌겠는가. 어려워도 시도해 봐야지. 모름지기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법이라고 했다.

“니나렛 전하.”

나는 니나렛의 이름을 부르며 아이에게 다가갔다.

조심스럽게 니나렛을 잘 달래며 이참에 괜찮은 첫인상도 남겨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내가 아이에게 접근을 시도하던 순간.

“꺅!”

잔디 바닥에 있는 무언가에 발이 걸리기라도 했는지 니나렛이 혼자서 풀썩 넘어지고 말았다.

“황녀 전하!”

근처에 있던 니나렛의 시녀가 황급히 달려와 황녀를 부축했다.

“전하! 다친 데 없으세요?”

“넌 그런 걸 물어봐야 알아?”

시녀는 난처해하면서도 니나렛을 부축해 아이를 어디론가 데려갔다. 아마도 황궁의를 찾는 것 같았다.

“황녀 전하는 도대체…….”

그리고 그사이에 남자 귀족이 큰 한숨을 내쉬며 잔디밭에 내팽개쳐진 가발을 들고 사라졌다.

아주 난장판이었다.

하지만 니나렛이 사라지며 소동이 일단락되자, 정원의 휴게 공간도 다시 처음의 분위기를 되찾았다.

“…….”

나는 폭풍 같던 소란에 얼떨떨해진 기분이 되어서는 니나렛이 넘어졌던 자리로 걸어갔다.

하녀를 불러 떨어진 물건을 곧바로 치우게 할 생각이었다. 다른 사람이 지나가다가 실수로 발이 걸려 또 넘어질 수도 있으니까.

“…어?”

하지만 문제의 장소에 도착해 바닥을 내려다본 나는 뜻밖이라는 듯이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잔디밭에는 아무런 물건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니나렛은 장애물에 발이 걸려 넘어진 것이 아니었다.

‘황녀님은 나쁜 아이가 아닐지도.’

나는 잔디밭에 소박하게 피어 있는 노란색 들꽃 한 송이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니나렛의 성격이 달라졌을지언정, 아이의 본성까지 변한 것은 아니었다.

황궁의 유일한 황녀님과 생각보다 쉽게 친해질 수 있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

‘짜증 나.’

그렇게나 기대했던 수확제인데도 라일라의 기분은 최악을 달렸다.

네리아는 오늘 완벽하게 귀족다운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페어 레이디 역할에 성공하기까지.

황궁에 모인 사람들 모두가 네리아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라일라는 자신이 들러리가 된 것 같았다.

‘그보다 대체 어떻게 한 거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라일라는 평민 하녀가 된 네리아를 8년이나 지켜봐 왔다.

현실적으로 사람이 이렇게 단시간에 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설마 우리를 속인 거야?’

기만당했다는 생각에 얼굴에 열이 올랐다. 그녀는 어떻게든 네리아를 곤란하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네리아 영애 말이죠, 솔직히 사람들이 칭찬하는 것처럼 대단하지는 않았잖아요?”

“하녀로 지냈던 과거 사연 때문에 기대치가 낮아서 능력 이상으로 과도한 평가를 받은 거겠죠.”

라일라의 근처에 있던 추종자 무리가 그녀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네리아를 험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야기는 매끄럽게 이어지지 못하고 중간중간 끊겼다.

객관적으로도 험담할 거리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녀들의 눈에도 네리아는 완벽했다.

“그리고 옷차림도 그다지 썩……. 아, 그래요! 머리핀! 네리아 영애의 머리핀이 이상하지 않았나요?”

한 소녀가 좋은 사실을 발견했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네리아 발렌티스의 모습을 머리까지 발끝까지 떠올려 본 후, 유일하게 찾을 수 있었던 단점이 차림새에 어울리지 않는 머리핀이었다.

“어디서 났는지도 모를 그런 싸구려 장신구를 달고 다니다니.”

“촌스럽게 나비 모양이 뭐예요?”

“차라리 없는 게 낫지 않았어요? 드레스도 목걸이도 귀걸이도 비싼 것들인데 그것만 이질적이잖아요.”

“조화란 걸 모르나 봐요.”

다른 소녀들까지 동조하며 꺄르르 웃음을 터트리던 때였다.

“오늘 네리아 발렌티스 영애가 하고 있던 나비 머리핀 말이죠, 꽤 괜찮지 않았어요?”

“네, 수수한 느낌이었는데 머리에 꽂아 놓으니 예쁘더라고요. 저도 비슷한 걸 하나 사 볼까 봐요.”

마침 근처를 스쳐 가던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며 지나갔다.

“…….”

분위기가 싸늘해지고 말았다.

“취, 취향도 참.”

“어, 어쨌거나 제 눈에는 별로였어요. 게다가 그 루비 목걸이는 대여한 거잖아요? 데뷔탕트에 빌린 물건을 하고 오다니.”

“대여라니요?”

심기가 불편해진 상태로 추종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라일라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네! 대여품이요. 네리아 영애가 목에 걸고 있던 그 루비 목걸이, 노엘 의상실에서 빌려주는 것을 본 적이 있어요.”

소녀는 드디어 라일라가 대화에 참여한 것에 기뻐하며 재잘재잘 이야기를 떠들었다.

그에 라일라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대여? 그렇단 말이지?

“대여품이라니. 혹시 목걸이를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네리아가 무척이나 곤란해지겠어요. 그런 일이 생겨서는 안 될 텐데 말이지요.”

라일라가 명백하게 의도가 담긴 발언을 입에 담았다.

“그렇죠? 줄리아 양?”

그리고 정확하게 줄리아를 바라보며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네, 그럼 큰일이겠죠.”

“줄리아 양, 저번에는 변변치 못한 제 사촌 자매의 드레스값을 물어 주느라 많은 돈을 썼잖아요.”

“대단한 일은 아니었어요.”

“파티가 끝나기 전에 줄리아 양에게 화가이신 이사벨라 님을 소개해 드릴게요. 오늘 그분도 수확제에 참석하신 거 보셨죠?”

“그럼요. 고마워요! 라일라 양.”

그것을 마지막으로 네리아에 관한 이야기가 정리되었고, 이제 소녀들은 다른 화제를 꺼내기 시작했다.

“오늘 올리브 영애가 입은 드레스 말이죠, 어느 의상실의 옷일까요?”

“다들 소문 들었어요? 카놀라 영애의 약혼자 이야기인데요.”

라일라가 다시 웃음을 되찾았기에 그들 사이의 분위기도 밝아졌다.

하지만 이 사이좋은 공간 속에서 마치 물과 기름처럼 섞여들지 못한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붉은 머리의 소녀, 줄리아 델프가 목을 축일 음료수를 가지러 가며 그녀들 몰래 미간을 구겼다.

‘성격하고는.’

조금 전, 라일라는 줄리아에게 한 가지 지시를 내렸다.

화가인 이사벨라를 소개받고 싶다면 네리아 발렌티스가 가지고 있는 목걸이를 없애 버리라고.

물론 대놓고 말한 것은 아니었다.

라일라는 절대 직접 명령하지 않는다.

만약 그 일로 문제가 생긴다 해도 그녀는 모르는 척 교묘하게 빠져나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추종자들은 그녀의 의중을 눈치껏 파악하고 명령을 수행해야만 했다.

줄리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남동생과 델프 백작가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경쟁을 벌이는 중이었는데, 일반적으로 계승 순위는 장남에게 유리했다.

능력은 줄리아 쪽이 월등하고, 새로운 사업에 성과를 보였는데도.

그랬기에 줄리아는 가주인 부친의 신임을 얻어 경쟁에서 앞설 수 있도록 어려운 일에도 동생보다 적극적으로 나서곤 했다.

이번 일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화가 이사벨라가 그려 주는 초상화를 원했다.

그리고 줄리아는 아버지가 바라는 바를 이뤄 드릴 수 있도록 반드시 화가를 모셔 갈 작정이었다.

‘그걸 위해 이 내가 수도까지 와서 계획에도 없던 라일라의 부하 노릇까지 하게 되었지만.’

그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눈앞에 목적지가 보였다.

줄리아가 네리아 발렌티스를 떠올렸다. 루비 목걸이 따위야 줄리아에게는 푼돈이나 다름없는 돈으로 살 수 있는 물건이다.

하지만 네리아에게는 아니었다. 그녀는 제대로 된 드레스 한 벌조차 살 돈이 없는 처지였다.

만약 대여한 목걸이를 잃어버리게 된다면, 보상할 방법이 없어 상당히 난처한 상황에 빠지게 되겠지.

‘…하지만 어쩔 수 없어.’

솔직히 미안하기는 했다.

그러나 괜한 동정심에 지금까지의 노력을 허사로 만들기는 싫었다.

‘어떻게 하면 되려나.’

네리아나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소행임을 들키지 않고 목걸이만 조용히 빼 올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줄리아가 머릿속으로 쓸 만한 방법을 모색해 보며 사과 주스를 한 모금 머금었다.

***

중앙 정원의 테이블 곳곳에는 꽃바구니가 장식되어 있다.

그 안에는 생화와 함께 거울이 달려 있는데, 꽃과 함께 거울에 비친 풍경이 더해졌기에 인테리어 효과가 상당했다.

물론 거울에 햇볕이 반사되어 엉뚱한 곳을 태우지 않게끔 마법약으로 표면에 특수 처리를 한 뒤였다.

“꽃이 꽃을 구경하고 있군요.”

“고마워요.”

나는 옆 사람의 칭찬을 흘려들으며 거울 너머로 줄리아가 수상하게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평범하게 연회를 즐기는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라일라가 무슨 일을 시켰구나.’

백부네가 나로 인해 단단히 화가 났을 테니, 무언가 귀찮은 일을 벌일 것 같다는 짐작은 했었다.

그랬기에 정원을 돌아다니면서도 틈틈이 백부 가족을 관찰했다. 그레이 경의 협조도 있었다.

‘그러다가 라일라 무리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보이기에 주시하고 있었더니.’

라일라의 명령을 이행할 사람으로 줄리아가 선택된 것 같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뭐가 되었든, 처음부터 아예 일을 엎어 버리게 만들면 되잖아?’

나는 거울 속의 줄리아를 바라보며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줄리아에게는 굳이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용건이 있었다.

그녀가 라일라에게 바라는 것은 나도 해 줄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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