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은 셀프입니다 (41)화 (41/172)



<41>

악공이 새롭게 연주를 시작했다.

작곡가 엘리니의 왈츠곡이었다. 나는 우아한 선율에 맞춰 레오니트 황태제와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의 모든 종류의 춤에 자신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왈츠였다.

발을 뻗는 것부터 몸을 돌려 원을 그리는 것까지.

물이 흐르듯 유려한 움직임에 황태제의 훌륭한 리드까지 더해지니, 플로어 옆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에게서 박수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나와 레오니트는 여유롭게 춤을 추면서도 아무런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런데…….’

빙글, 오른쪽으로 회전한 뒤 레오니트의 눈을 마주쳤다.

그는 시종일관 정중한 태도로 웃음을 잃지 않았지만, 나는 알았다. 저 미소는 가짜라는 것을.

‘예전 세계에서는 가식 없이 솔직한 사람이었는데.’

황태제가 아니라 대공이었던 그는 정치보다는 예술에 관심이 많은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차기 황제라는 자리에 있는 것보다 예전 세계의 그가 더 행복해 보였다는 건 주제넘은 생각일까.

그렇지만 실제로도, 이곳의 그는 황태제라고 해도 정치 쪽에서 크게 존재감을 보이지는 않았다.

‘의욕이 없는 느낌이라고 할까?’

하기야 그는 5년 전, 황제가 불임이 되며 아무런 준비나 기반도 없이 황태제 위치에 올랐다.

갑자기 자리가 바뀌었으니, 어찌 보면 의욕이 없는 게 당연할지도.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음악도 중반을 넘어서던 때였다.

“주변의 영애들께서 저를 보는 줄 알았는데, 자세히 살피니 발렌티스 양을 보고 있는 것이었군요.”

레오니트가 갑자기 나에게 말을 걸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시점이었지만 나는 자연스럽게 응수했다.

“아무래도 처음 보는 사람일 테니, 관심을 두신 것 같아요.”

겸손하게 대답하면서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나보다 한두 살이 더 어려 보이는 영애와 눈이 마주쳤다.

방긋 웃어 주었더니 그녀가 두 손으로 붉어진 뺨을 가렸다.

‘뭐, 예전에도 수도 소녀들의 동경의 대상이라고 불렸으니까.’

덤덤하게 다시 춤에 집중했다.

“레이디 발렌티스는.”

“네, 전하.”

“왈츠 실력이 대단하시군요. 8년을 평민으로 지냈다고 들었는데도요. 비법이라도 있으십니까?”

“돌아가신 부모님의 명예에 누가 되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노력한 덕분이 아닐까 해요.”

“필사적이라……. 레이디는 본인을 그렇게 살게 만든 사람들이 원망스럽지는 않으셨는지요.”

“네?”

‘사람들’이라고 에둘러 표현했으나 정황상 백부와 백모를 가리키는 게 당연했다. 나는 당황스러운 마음을 웃음으로 가렸다.

친분조차 없는 사이에 하는 대화치고는 상당히 무례하고 직설적인 발언이었다.

‘…왜 그런 걸 대놓고 묻지?’

말실수를 유도해 그걸로 트집을 잡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가 그런 유치한 짓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지만, 상대가 누가 되었든 책잡힐 일이 없도록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원망하지 않아요. 저는 지난 과거에 매달리기보다는 저에게 주어진 오늘을 충실하게 보내자고 생각하는 성격이거든요.”

그 뒤로는 다시 대화가 없어졌다.

그도 나도,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 춤을 이어 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음악이 끝났다.

자연스럽게 레오니트에게서 몸을 떨어트리려던 찰나였다.

그가 내 손을 붙잡고는, 손등에 키스했다. 잠깐이었지만 넋을 잃을 만큼 수려한 미소를 지은 채로.

“또 뵙겠습니다, 레이디.”

가짜 웃음이 아니라 예전 세계의 대공에게서나 보았던 가식 없이 솔직한 미소였다.

…방금 뭐였지?

“머리핀이 잘 어울리시는군요.”

머리핀? 순간적으로 몸을 멈칫한 사이에 레오니트 황태제는 그 말을 남기고는 플로어 밑으로 사라졌다.

‘저 사람, 뭐야?’

***

“네리아.”

레오니트와 헤어진 뒤, 그레이 경에게로 돌아가려던 차에 나에게 다가온 사람이 있었다.

“오랜만이야.”

녹색 머리를 가진 전 약혼자, 데이브였다. 그가 나에게 알은척을 하며 걸어오고 있었다.

‘아… 저런 인간도 있었지.’

챙겨야 할 다른 일들이 워낙 많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데이브의 존재를 아예 잊고 있었다.

내가 지저분한 평민일 때는 쓰레기 취급하더니 지금 와서 친한 척이라니. 뻔뻔함이 수준급이었다.

‘예전 세계의 착했던 데이브가 갈수록 더 놀라워지는걸.’

데이브에게 좋은 감정이 남아 있지는 않다.

그러나 예법적으로 그가 나에게 잘못한 일은 없다. 데이브는 귀족인 그에게 무례하게 굴었던 평민을 정당하게 벌한 것뿐이니까.

‘분명 사과부터 하려고 하겠지.’

하지만 딱히 사과를 받아 주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보다는 데이브에게 시간을 써 주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내가 선택한 행동은 자연스러운 무시였다. 가능하면 앞으로는 만나고 싶지도 않았다.

“네리아, 너와 할 말이 있는-”

“그레이 아저씨!”

“우리 아가씨!”

나는 근처에 있는 그레이 경을 찾느라 데이브를 발견하지 못한 척, 그레이 경에게로 달려갔다.

“많이 기다리셨죠?”

“아가씨? 뒤에서 녹색 머리 영식께서 민망해하며 아가씨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는데요?”

“알 게 뭐예요. 아저씨도 신경 쓰실 거 없어요. 춤이나 추러 가요.”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게 소곤소곤 이야기하는 그레이 경을 따라 나도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했다.

“저 때문에 오랜만에 사교댄스 연습을 하셨다면서요. 없던 일로 하기에는 아쉽잖아요.”

“아닙니다. 아가씨께서 황태제 전하와 춤을 추셨는데 아쉬울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레이 경은 몹시도 감격하여 벅차오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말 훌륭하신 한 쌍이셨습니다. 전하께는 라일라 님보다 우리 아가씨가 훨씬 잘 어울리시던데요.”

“그랬나요?”

“심드렁해 보이시는 것 같은데… 그럼 연회장에 아가씨 마음에 드는 다른 영식분은 안 계셨던지요?”

“글쎄요. 지금은 집안싸움이 바빠서 그런 데는 관심이 안 가요.”

정말 관심이 안 갔기에 그레이 경의 말처럼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는 아직 포기가 안 되었는지, 험상궂은 외견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 소녀처럼 눈을 빛내며 또다시 질문을 해 왔다.

“혹시 춤추던 중에 전하께서 무슨 말씀은 없으셨습니까?”

“그냥-”

헤어지기 직전에 본 황태제의 미소가 신경 쓰여 눈을 가늘게 떴다.

‘또 뵙겠습니다, 레이디.’

그 목소리에 적의는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오히려 호의에 가까웠다.

분명 인사치레로 한 말일 텐데. 어쩐지 그를 다시 만나게 될 것 같다는 근거 없는 직감이 들었다.

“…머리핀이 잘 어울린다고 칭찬해 주셨어요.”

“맞습니다. 우리 아가씨께는 안 어울리는 게 없지요. 역시 황태제 전하께서 보는 눈이 있으십니다.”

“그렇죠? 잘 어울리죠?”

그레이 경의 신난 목소리를 들으며 시선을 위로 올려다보았지만, 내 시야에는 머리핀이 보이지 않았다.

듀이가 전 재산에 일꾼 노릇까지 하며 나에게 선물해 준 것이다.

의상실에서 선물 상자를 떨어트리고는 창피해하던 듀이의 얼굴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머지않아 듀이도 기사가 될 테니 사교댄스를 가르쳐야겠어.’

그런 생각을 하며, 그레이 경과 함께 다시 플로어에 올랐다.

***

미뉴에트를 세 번 연속으로 해치웠더니 조금 피곤해졌기에 짧게나마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나는 정원 가장자리에 마련된 소파에 앉아 음료로 손을 뻗었다.

잔의 볼 모양이 뾰족한 것은 알코올이 들어간 것.

둥근 것에는 보통 주스가 담겨 있기에 아직 미성년인 나는 둥근 잔을 골랐다.

덧붙여 그레이 경이 고른 것은 알코올이 들어간 뾰족한 잔이었다.

‘시원해.’

사과 주스의 달콤한 맛을 음미하며 ‘그 사람’은 오지 않은 것인지 정원 내부를 둘러보던 때였다.

“아가씨, 누구 찾는 사람이라도 있으십니까?”

“란타나 님을 찾고 있었어요.”

특별히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고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황제의 디르케(정부)이자 나와 똑같은 분홍색 눈동자를 가진 소문의 미인. 오늘 황궁에 오면 그녀를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아무리 정원을 둘러보아도 검은색 머리카락에 분홍색 눈을 가진 여성은 보이지 않았다.

소문만큼의 외모라면 굳이 찾지 않아도 눈에 띄었을 텐데. 그녀는 이곳에 오지 않았던 걸까?

어차피 란타나는 평민 출신에 황족도 아니었으니 수확제에 반드시 참석해야 할 의무가 없기는 했다.

“그분은 불참하셨다고 합니다.”

“역시 그랬군요.”

“저도 오는 길에 우연히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건데, 이번에도 ‘미인 수집’을 가셨다나요?”

“네?”

그레이 경이 전달해 준 뜻밖의 이야기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런 날에도 가는구나?’

란타나의 미인 수집.

표현 그대로의 의미였다. 제국 곳곳에서 신분이 낮은 미인을 찾아 란타나의 궁으로 데려오는 것.

암암리에 퍼진 이야기였기에 나도 알고 있는 정보였다.

해괴한 행동 같지만, 그녀의 ‘미인 수집’에는 이유가 있었다.

다리스 제국은 엄격한 일부일처제를 채용하고 있기에 사생아는 자녀로 인정받지 못한다.

하지만 이 제도에서 유일하게 벗어나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

제국의 황제.

지엄하신 제국의 주인에게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기준을 적용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황제에게는 단 1명의 공식적인 정부를 둘 수 있게 했는데, 그 직위의 이름이 바로 ‘디르케’였다.

디르케는 황족으로 인정받지는 못하지만, 그들이 낳은 아이는 정식으로 황제의 자식으로 인정받고 황위 계승권을 가진다.

레오니트 황태제 또한 디르케의 소생으로, 황제와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이복동생이기도 했다.

‘하지만 란타나는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까.’

란타나의 문제라기보다는 황제가 불임이 된 것이 이유지만.

어쨌거나 그녀는 아이를 가질 수 없으니 디르케인데도 총애나 권력을 유지할 확실한 끈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대비책을 만들었다.

자신에 대한 황제의 총애가 사라져도 그녀가 데리고 있는 다른 미인을 황제에게 밀어 넣어 권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대단한 사람이야.’

황궁에서는 얼굴이 아름다운 것만으로는 절대 살아남을 수 없다.

심지어 그녀는 평민 출신이면서도 고위 귀족들을 뛰어넘는 권력을 가졌다. 보통 방법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예전 세계에서는 얼굴도 보이지 않고 어디에 숨어 있었던 건지.’

얼굴 한번 본 적 없는데, 그녀에 관한 궁금함만 더해질 따름이었다.

“황녀 전하, 제발 돌려주십시오!”

“싫은데? 이 대머리 배불뚝이야! 어디 한번 잡아 보시든가!”

그런데 그때, 갑작스럽게 주변이 소란스러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대머리 배불뚝이라니, 말이 너무 심하잖아? 특히나 공개적인 장소에서는 절대 해선 안 될 표현이었다.

놀란 마음에 주변을 돌아본 순간, 나는 어린 여자아이가 가발을 들고 잔디밭을 힘차게 달리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 남자 귀족이 아이의 뒤를 쫓아가고 있었다. 그의 머리가 햇볕에 반사되어 빛나고 있었다.

“맙소사.”

황궁에서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신나게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범인의 이름은.

‘니나렛 황녀 전하?’

당황스러움에 입이 벌어졌다.

망나니라고는 들었지만, 예전 세계랑은 달라도 너무 다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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