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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셀프입니다 (40)화 (40/172)



<40>

2년 전에도 페어 레이디 역할을 실수 없이 성공적으로 수행해 사람들의 찬사를 받았었다.

그때의 경험치가 축적되어서인지, 오늘은 나 자신이 평가해도 아쉬운 부분이 없을 정도였다.

도중에 백부 가족의 표정이 썩어 들어가는 모습을 발견하기도 했는데, 괜히 기분이 뿌듯해져 더욱 잘하게 된 것도 있었다.

‘좋아. 그날보다 더 완벽했어.’

내 역할을 마치고 단상에서 내려왔더니, 역시나 기다렸다는 듯이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지켜보던 사람들의 감상도 나와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짧게나마 감사를 표시하기 위해 무릎을 굽히고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려 인사했더니, 이번에는 곳곳에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내 입가에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졌다. 시작이 성공적이었다.

***

기도문 낭송이 끝난 후 본격적으로 수확제의 연회가 시작되었다.

첫 춤의 주인공은 라일라와 레오니트 황태제였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아직도 나에게 쏠려 있었다.

‘라일라도 어쩌나. 황태제와 첫 춤을 춘다고 많이 기대했을 텐데.’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상대를 배려해서 눈치껏 먼 곳으로 자리를 피해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라일라도 나를 배려하지 않는데 내가 그래 줄 필요가 있나.

라일라는 음악에 맞춰 웃는 얼굴로 춤을 추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분노로 파들파들 떨고 있을 그녀의 속마음이 나에게는 보였다.

내 드레스를 내다 버리려고 했던 것에 대한 소소한 복수였다.

“잠깐만요, 끼어들지 마세요!”

“쉿! 조용히요.”

한편 귀족들, 그중에서도 특히 페어 레이디 출신 귀부인들이 나에게 슬금슬금 모여들고 있었다.

무도회의 첫 춤은 가만히 지켜보는 것이 예의이기에 당장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으나, 나에게 말을 걸 수 있도록 가까운 자리를 미리 선점하려는 것 같았다.

‘사교계에서 이름 높은 귀부인이라고 호기심이 없는 건 아니니까.’

때마침 턴을 돌던 라일라가 그 광경을 목격하고는 눈을 찌푸렸기에 나는 미소로 화답해 주었다.

“…….”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아마도 라일라는 폭발 직전이 아닐까.

그런데도 춤을 추는 자세에는 아무런 흐트러짐이 없다는 점에 그럭저럭 칭찬해 줄 만은 했다.

“영광이었습니다, 레오니트 전하.”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악공들이 연주하는 곡이 끝나고 두 사람의 춤도 끝을 맺었다.

그리고 그것이 나에게는 시작의 신호였다.

공식적으로 자유 시간이 되자마자, 사람들이 나에게 적극적으로 몰려든 것이었다.

“반가워요, 레이디 발렌티스!”

“정말이지 발렌티스 양이 보여 준 모습에 크게 감동했답니다.”

“무려 10년 만에 후배가 생겨 제 기분이 얼마나 들떴는지요!”

그레이 경이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라며 뒤로 자리를 피해 주는 동안,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들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페어 레이디 출신이라는 명성에 걸맞도록 하나같이 유명한 사교계의 명사들이었다.

원래라면 아무런 뒷배가 없는 내가 이 정도 급의 인물들과 친분을 쌓기 위해서는 상당히 긴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을 터였다.

그런데 똑같은 페어 레이디라는 이유만으로 그들 쪽에서 먼저 나에게 손을 내밀어 주다니.

이런 천금 같은 기회를 만들어 준 멜비나 백작 부인에게는 백번을 인사해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너무 감사한 나머지 눈물이 다 나올 것 같다.

‘게다가…….’

나는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끔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무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니나렛 황녀의 시녀장인 앨마 부인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수확제에서 나에게 호의적인 귀족들과 친분을 쌓는다.’ 그것이 오늘의 목적이었지만, 가장 구체적인 목표는 따로 있었다.

니나렛 황녀의 튜터 후보에 추가로 선발되게끔, 책임자인 앨마 부인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는 것.

그러니 잘 보일 수 있도록 잘해야 한다. 물론, ‘잘한다’는 ‘하던 대로 한다’의 동의어였다.

나는 예전 세계에서 언제나 해 왔던 우아한 자세로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인사했다.

“과분한 칭찬에 감사드립니다. 앞선 페어 레이디 선배분들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게끔 노력했어요.”

“어머나, 겸손하기도 해라!”

“그런데 누구에게 예법을 배웠나요? 발렌티스 양을 보고 있으니 캐롤린 부인이 떠오르더군요.”

“네, 저도 그 생각을 했답니다.”

귀에 익은 목소리와 함께 갈색 머리를 빈틈없이 틀어 올린 귀부인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방금 대화에 이름이 언급되었던 캐롤린 부인이었다.

“저에게 제자가 있었다면 분명 발렌티스 양처럼 가르쳤을 거예요.”

실제로 그녀는 예전 세계의 내 예법 스승이었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캐롤린 부인의 칭찬에 그저 감격한 척, 손으로 입을 가리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예법의 살아 있는 교본이라고 불리는 캐롤린 부인께서 저를 그렇게 평가해 주시다니! 과찬이세요!”

“과찬이 아니라 알맞은 칭찬인 거죠. 그런데 정말 발렌티스 양의 예법 스승이 누군가요?”

“사브리나 탈리아 부인이세요.”

“탈리아 부인? 아…….”

멜비나 백작 부인이 예법 교사랍시고 붙여 준 노부인의 이름을 입에 담자, 사람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기억이… 나네요. 이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이셨지요.”

“발렌티스 양도 예법 교본을 많이 읽었을 테니, ‘살아 있는 예법 교본’이라는 캐롤린 부인을 연상시킬 법도 했네요. 발렌티스 백작 부인이 좋은 선택을 했어요.”

여기서 ‘좋은 선택’이란 나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스승을 붙인 백부네를 비꼬는 말이다.

“전부 부모님을 닮은 것이겠지요. 발렌티스 전 백작 내외가 워낙 뛰어나신 분들이셨잖아요.”

“그랬었죠. 어떻게 지금까지 잊고 지냈던 건지. 새삼 놀랍군요.”

“오늘 동행하신 분은 부친의 기사였던 그레이 경이지요?”

“마치 발렌티스 양의 부모님과 함께한 것 같아 지켜보던 제 마음이 따뜻해졌답니다. 그런데 요즘 지내기는 어떤가요?”

가벼운 어조였지만, 마지막이 핵심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백부모에 대한 것을 묻는 것이었으니.

대답할 수 있는 선택지는 많았다.

백부네를 은근슬쩍 비난하거나, 쓸쓸한 낯빛으로 대답을 피해 그녀들의 동정심을 일으킬 수도 있다.

하지만 가장 좋은 답은 그런 것들이 아니다. 여기서 모범 답안은.

“백부모님께서 저를 아껴 주시는 덕분에 즐겁게 지내고 있어요.”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중요한 점은, 절대 비꼬는 뉘앙스가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악의 따위는 조금도 들어 있지 않다는 듯 말에 진심을 담아야 한다.

이 순간, 나를 페어 레이디로 만들어 준 백모님께 감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기에, 진심을 가장하는 것이 어렵지도 않았다.

“세상에……. 착하기도 하지.”

내 대답을 들은 귀부인들이 기특하다는 시선으로 나를 응시했다.

사교계의 명사들인 그녀들이라면, 말이나 소문과는 다르게 백부네가 나를 배척하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쉽게 간파하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도 백부모를 원망하지 않고 감싸는 태도를 보이다니.

그 모습이 대견하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나를 바라보는 그녀들의 눈빛에 호감이 더욱 짙어졌다.

“즐겁게 지낸다니 다행이에요. 다음에 초대장을 보낼 테니, 티 파티에 놀러 오지 않겠어요?”

“수도에서 좋은 친구가 될 수 있게 제 딸아이를 발렌티스 양에게 소개해 주고 싶군요.”

“그거 아세요? 저희는 정기적으로 페어 레이디 모임을 가진답니다. 다음 모임부터는 발렌티스 양도 참석해 주었으면 해요.”

“네, 네! 물론이에요……!”

귀부인들의 호의 섞인 제안에 기뻐하며 대답했다. 기다리고 있던 말들이었다.

***

사교계에 데뷔하는 영애들이라면 반드시 거쳐야 할 절차가 있는데, 바로 황제 폐하에게 얼굴을 보이고 인사를 올리는 것이다.

제국의 주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공식적인 사교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황제 폐하께 정식으로 허락을 받는 절차였다.

마땅히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슬슬 인사를 시작하려는 것 같은데, 네리아 양도 늦기 전에 가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그래야 할 것 같아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드려요.”

그사이에 이름을 부르는 사이가 된 귀부인들에게 배웅을 받으며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황제 폐하가 앉아 계신 중앙 정원의 상석이었다.

그곳에는 오늘이 데뷔탕트인 다른 영애들이 이미 줄을 서 있었는데, 힐끗 봐도 안절부절 긴장한 모습들을 하고 있었다.

‘처음은 어쩔 수 없지.’

마음속으로 그녀들을 응원하며 줄의 가장 마지막에 섰다.

나는 상대적으로 늦게 도착한 편이었기에 내 앞에서 먼저 기다리는 영애들의 수가 꽤 많았다.

하지만 인사라고 해도 황제 폐하와 두어 마디의 간단한 대화를 주고받는 것이 전부였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순서도 금방 돌아왔다.

나는 상석에 앉아 있는 황제 폐하의 앞에 무릎을 굽히며 인사했다.

“네리아 발렌티스가 제국의 주인을 뵙습니다. 다리스에 영광이 있기를.”

“그대가 카터와 로즈의 딸이로군. 오늘 수확제에서의 모습이 상당히 인상 깊었다네. 훌륭했어.”

“저는 단지 과분한 기회를 받은 것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외모는 로즈와 똑같은데 겸손한 성격은 카터를 닮았군!”

황제가 호탕하게 웃었다. 여기서야 초면이지만, 예전 세계의 황제 폐하 본인과도 똑같은 모습이었다.

“앞으로의 활약을 기대하겠네. 오늘 네리아 양의 파트너가 가문의 기사인 그레이 경이라지?”

“네, 그렇습니다, 폐하.”

“뛰어난 실력자에 충성스럽기까지 한 자였지. 하지만 페어 레이디의 첫 춤 상대로는 다소 아쉽지 않은가 싶은데…….”

황제가 장난스러운 말투로 그렇게 말하고는, 옆에 있던 시종에게 무언가를 지시했다.

그러자 얼마 뒤, 이 자리에 레오니트 황태제가 나타났다. 아마도 황제가 시종에게 황태제를 호출하도록 명령했던 것 같았다.

“찾으셨습니까, 폐하.”

“잘 왔다, 레오니트! 황태제가 네리아 양의 댄스 파트너가 되어 주면 좋겠는데, 네 생각은 어떠한가?”

“…….”

힐끗, 레오니트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황족 특유의 백금발과 붉은 눈동자를 가진 단정하고 신사적인 느낌의 미남자였다.

나에게는 황태제보다 대공으로 더 익숙하기도 한.

“말씀 따르겠습니다. 오히려 제가 먼저 청하고 싶은 일이군요.”

붉은색 눈을 휘며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레오니트가 나에게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레이디께 청합니다. 저와 춤을 춰 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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