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은 셀프입니다 (39)화 (39/172)



<39>

“수확제에는 이렇게 가야겠어. 노엘라 님, 괜찮을까요?”

거울 너머로 사람들에게 말했다. 선의로 보석들을 빌려준 노엘라에게는 따로 양해를 구하기도 했다.

“네, 그럼요.”

“아가씨, 그것도 너무 예뻐요!”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듀이가 선물을 가져온 경위를 전부 지켜봤다. 그들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내 선택에 찬성을 보탰다.

단 한 명, 머리핀을 가져온 장본인인 듀이만 제외하고.

“아까 하고 계셨던 게 더 낫지 않을까요? 그건… 네리아 님께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요.”

듀이의 고개가 또 아래로 떨어졌다. 목소리도 갈수록 작아져 마지막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거울 앞에서 몸을 돌려 그런 듀이에게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그의 턱을 올려 내 얼굴을 정면에서 마주 보게 만들었다.

“네, 네, 네, 네리아 님?”

“안 어울린다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 다시 자세히 봐.”

듀이의 눈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안 어울릴 리가 있나. 이 내가 소화해 낼 수 없는 장신구 따위는 아무것도 없는데.

“…….”

가까워진 거리에서 듀이는 눈을 양옆으로 굴렸다. 그러다가 눈이 마주쳤다. 그의 뺨이 붉어졌다.

“어때, 네가 봐도 잘 어울리지?”

“…네.”

“그렇지? 선물 진심으로 고마워. 소중하게 간직할게.”

그렇게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

“그런데 그거 알아? 나, 지금까지 살면서 전 재산을 털어 넣은 선물을 받아 보기는 처음이야.”

결국, 듀이의 입가에도 자그마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

페어 레이디는 ‘수확제의 주인공’이라고 불리는 만큼, 오늘만은 다른 귀족들과 다른 대우를 받는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안쪽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황궁의 정문을 지키는 기사에게 임명장을 전달하자, 근처에 있던 시종에 의해 어디론가 안내를 받게 되었다.

수확제 행사가 치러지는 야외 중앙 정원이 아닌, 정원 바로 옆에 마련된 실내 휴게실이었다.

페어 레이디는 기도문을 외울 차례에 등장하기 때문에 황족들보다도 입장 순서가 더 늦었다.

그랬기에 그때까지 대기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한 것이었다.

“시간에 맞춰 궁내부의 의전 담당자가 올 것입니다. 레이디께서는 이곳에서 편히 기다려 주시길.”

시종이 마지막까지 깍듯한 태도로 인사하고 퇴장하자, 휴게실에는 나와 나를 에스코트하기 위해 동행한 그레이 경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황궁 중앙 정원 옆에 이런 곳이 있었군요. 저는 처음 와 봅니다.”

그레이 경이 그렇게 말하며 휴게실 한쪽에 미리 준비되어 있던 디저트에 부지런히 손을 뻗었다.

원래도 대식가인 그가 나를 따라 의상실에 들르느라 중간에 식사를 걸렀으니 배가 고플 만도 했다.

“아가씨는 황궁이 처음이시지요? 긴장되지는 않으십니까?”

“조금은요.”

말은 저랬으나 실은 전혀 긴장되지 않았다. 이미 한 번 해 본 일이어서인지, 그저 평범하게 해치워야 할 숙제로 느껴질 뿐이었다.

‘그런 것보다는…….’

나는 감회가 새로워진 기분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황궁의 외관은 내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였다. 마찬가지로 내부 구조 역시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다만, 같은 공간임에도 확실하게 다른 부분이 존재하기는 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벽면에 걸린 초상화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2년 전, 예전 세계의 이 장소에서 본 것은 황제와 황후, 니나렛 황녀와 아직 아기였던 황자까지 4명이 사이좋게 그려진 가족화였다.

하지만 지금 여기에 걸린 초상화에는 단 한 명, 황제 폐하만이 그려져 있을 뿐이었다.

‘황족 구성원이 전혀 다르니까.’

이곳의 황후 폐하는 죽고 황자는 태어나지도 못했으며, 니나렛 황녀는 5년이나 별궁에서 생활했다.

이미 알고 있는 바였지만, 황궁 안으로 발을 들여서인지 새삼스레 그 사실이 현실적으로 와 닿았다.

평행세계와는 전혀 다르게 비극적인 인생을 살고 있던 건, 나와 내 가족뿐만이 아니라고.

“…….”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학자들의 가설이지만, 평행세계란 어떠한 ‘선택’의 방향에 따라 세계가 분화되는 것이라고 했다.

도대체 어떤 누구의 어떤 선택이 분기점이 되었기에 두 가지 세계가 이렇게까지 차이 나게 된 걸까?

당장 고민해 봐야 정확한 답이 나오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랬기에 다시 소파로 돌아가 무료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던 때였다.

“안녕하세요, 레이디 발렌티스.”

휴게실의 문이 열리며 안경을 쓴 여성이 나타났다. 궁내부의 의전 담당자였다. 그리고 그 뒤를 하급 시녀 한 명이 따르고 있었다.

“오늘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다리스에 영광이 있기를.”

의전 담당자가 이곳에 온 이유는 내가 수확제 제사에서 해야 할 역할을 설명해 주기 위해서였다.

“-하여 과정 자체에 어려울 일은 없습니다. 지시에 맞춰 제단 앞에 서기만 하면 되거든요.”

귀를 세워 그녀의 이야기에 집중했으나, 2년 전과 다른 내용은 없었다. 심지어 담당자 본인도 예전 세계와 같은 동일인이기도 했다.

“설명은 여기까지입니다. 혹시 궁금한 점이 있으신지요?”

“아뇨, 없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이것을.”

그녀가 손짓하자, 지금껏 뒤에서 조용히 기다리고만 있던 시녀가 앞으로 나섰다.

그녀가 들고 있는 푸른색 벨벳 트레이 위에 화려한 모양의 귀걸이 한 쌍이 놓여 있었다.

“올해의 페어 레이디를 맡아 주신 발렌티스 양을 위해 황가에서 준비한 선물입니다.”

선물. 매년 이어지는 전통이었다. 달리 표현하자면 기념품일까.

황궁의 장인이 상등품의 보석을 사용하여 제작한 것이기에 귀걸이 자체만으로도 상당한 가치가 있으나, 그보다는 페어 레이디 출신이라는 명예의 상징물에 가까웠다.

그랬기에 페어 레이디 역할을 성공적으로 마친 귀족 여성들은 이 귀걸이를 무척이나 중요하게 여기고는 했다.

2년 전의 나 역시도, 자부심을 주체하지 못해 2달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하고 다녔던 기억이 있다.

“착용하시는 걸 도와 드릴게요.”

하급 시녀의 손길에 의해 내 귀에 귀걸이가 걸렸다.

분홍색 산호로 조각한 장미와 그 밑에 여신의 표식을 세공한 은백색의 장식물이 늘어트려진 것이었다.

“아무래도 화려하게 만드는 것이 전통이다 보니… 꽤 무겁지요?”

“아니요.”

나는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무겁지 않아요.”

내가 걸치기에 아주 적당하고 알맞은 무게였다.

“레이디 발렌티스. 나가실 시간입니다. 준비는 끝나셨는지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종이 휴게실을 찾아와 출발을 알렸다.

“그레이 아저씨, 갈까요?”

“이렇게 아가씨를 에스코트하게 되어 정말이지 영광스럽습니다. 언제 이렇게 자라신 건지.”

나는 눈물을 글썽이는 그레이 경을 보며 웃다가, 그가 내민 손을 잡고 바깥으로 향했다.

하늘이 맑고 날씨가 좋았다.

황궁의 중앙 정원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

나는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우아하면서도 당당한 걸음걸이로 목적지를 향해 걸어갔다.

입을 여는 자는 아무도 없었고, 수없이 많은 사람의 눈이 오직 나 하나에 집중되어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 시선에 긴장하거나 위축되는 일은 없었다. 나는 주인공이 아닌 적이 없었으니까.

“다녀오겠습니다.”

옆에 있던 그레이 경에게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한 후, 그의 손을 놓고 제단 앞 단상에 올랐다.

그러고는 사람들 앞에 마주 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머니, 우리는 기도합니다. 당신의 자비가 우리에게 닿기를. 그리하여 풍요와 영광을-”

***

수확제가 시작되기 전.

황궁의 중앙 정원은 이곳에 모인 귀족들의 수다로 소란스러웠다.

그중, 역대 페어 레이디 출신인 귀부인 몇 명이 삼삼오오 한곳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올해도 페어 레이디 지원자가 아무도 없었다면서요?”

“요즘 어린 영애들은 패기가 없어요, 패기가. 나 때는 말이죠, 지원자가 많아서 후보를 추려 내는 것도 복잡했는데 말이에요.”

“게다가 벌써 10년째 후배가 생기지 않았잖아요. 재미없어라.”

“그래서 올해는 네리아 발렌티스 영애라던가요? 최근에 사생아 누명을 벗고 신분을 되찾았다는.”

그녀들이 시선이 동시에 어딘가를 향했다. 그곳에는 발렌티스 백작 내외가 즐거운 듯이 다른 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아이에 관한 이런저런 소문이야 많지만.”

한 번 정해졌던 페어 레이디가 교체된 것은 전적으로 궁내부의 결정이라고 했으나 내막이야 뻔했다.

하지만 유산이나 작위 문제로 걸림돌이 되는 아이를 페어 레이디로 보내 제거하는 것이 딱히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귀족이 되자마자 사교계에서 퇴출당하게 될 소녀가 불쌍하기는 했으나 어차피 남의 집안 사정.

며칠 떠들다가 금방 잊힐 일이었기에 말을 아낄 뿐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드십니다!”

정원 입구에서 들려온 시종의 외침에 그녀들을 포함한 귀족 전원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황제에 이어 레오니트 황태제와 니나렛 황녀까지 모든 황족이 입장을 끝내자 수확제가 시작되었고, 마지막 순서로 페어 레이디가 신에게 올리는 기도문을 낭송하는 시간이 되었다.

중앙 정원에 호기심이 담긴 술렁임이 한차례 일었다.

실패를 확신하며 가여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린 소녀가 망신당하는 모습을 구경할 생각에 즐거워하는 저열한 부류도 있었다.

그들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면, 곧 이곳으로 등장할 소녀가 성공할 거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세상사라는 것이 언제나 예측한 대로만 흘러가지는 않는다.

네리아 발렌티스가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

“…….”

약속이라도 한 듯 황궁 정원에 기묘한 침묵이 들어섰다.

아름다운 소녀였다.

약 20여 년 전, 아름다운 외모로 수도에 파장을 일으켰던 로즈 전 발렌티스 백작 부인을 그대로 빼닮은 모습이었다.

기사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 마치 나비의 움직임을 연상케 했다.

더욱이 작은 손짓마저도 예법 교본에서나 나올 법한 귀족의 태도를 그대로 현실에 그려 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감탄사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그녀의 여유롭고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이었다.

자신은 이런 상황에서도 아무런 압박감을 받지 않는다는 듯이.

일부러 결점을 찾아 트집을 잡으려고 해도 트집 잡을 수 있는 부분이 아무것도 없었다.

‘소문과는 많이 다른데?’

‘저게 사교계에 처음 데뷔하는 소녀가 보일 수 있는 자세라고?’

‘하녀였다가 겨우 한 달 전에나 귀족이 되었다면서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네리아 발렌티스가 등장만으로도 모두의 예상을 깨부순 가운데, 단상의 정중앙에 선 그녀가 기도문을 낭송하기 시작했다.

청아한 목소리가 공기에 실려 그들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마치 노래를 듣는 것 같기도 했다.

마지막까지 실수 따위가 벌어지는 일은 없었다. 이 순간, 모두는 같은 평가를 내렸다. 그녀는 완벽했다.

다리스 수도 사교계에 새로운 별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다만, 이 공간에서 유일하게 다른 반응을 보이는 자들이 있다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저 애가 네리아 발렌티스라고?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잖아!’

‘저게 귀족의 예법을 알고 있어? 기도문은 언제 다 외웠고? 아니, 그보다 어떻게 멀쩡한 드레스를 입고 있는 건데? 분명 불태웠잖아!’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었다.

멜비나와 라일라를 비롯한 발렌티스의 직계 가족들의 얼굴이 사이좋게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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