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은 셀프입니다 (38)화 (38/172)



<38>

몇 년 동안 아무 데도 쓰지 않고 아껴 온 돈이었다. 하지만.

“죄송하지만 금액이 모자라요.”

이럴 수가. 주인이 내뱉은 청천벽력 같은 말에 듀이가 좌절했다.

가게에 있는 물건들의 가격은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비쌌다. 듀이가 가진 전 재산으로도 머리핀을 사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견습 기사 급료라도 미리 당겨 받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허탈한 마음에 어깨가 축 처졌다.

‘꼭 선물해 드리고 싶었는데…….’

듀이가 돌려받은 동화 상자를 두 손으로 들고는 터덜터덜 가게 밖으로 나가려던 때였다.

“저기, 잠시만 기다려요!”

뒷모습이 불쌍해 보이기라도 했던 걸까. 그를 불러 세우는 주인의 목소리에 듀이가 몸을 돌렸다.

“그때 같이 오셨던 분께 이걸 드리고 싶었던 거죠?”

“네…….”

“흠, 중요한 건 돈이 아니니까요. 그러니 부족한 금액만큼-”

이어지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듀이가 환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날 늦은 밤부터 듀이는 그곳에서 짧게 일을 하게 되었다.

오늘부터 수확제 전날까지, 칼리가 지정한 시간 동안 가게의 정리와 청소를 한다.

그렇게 하면 수확제 당일에 머리핀을 주겠다. 그것이 가게 주인이 그에게 내민 조건이었다.

듀이는 당연히 기쁘게 수락했다.

청소 작업에, 마차를 탈 돈이 없어 걸어서 가게로 오가는 것까지 꽤 많은 시간이 소모되었다.

또다시 잠을 줄여야 했지만, 선물을 받고 기뻐할 네리아의 얼굴을 생각하면 조금도 피곤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수업 시간에 꾸벅꾸벅 졸기도 했으나 네리아에게 그의 사정을 고백할 수는 없었다.

그녀라면 머리핀 같은 건 필요 없으니 좀 더 쉬라고 말했을 테니까.

그리하여 수확제 당일.

듀이가 설레는 마음으로 가게를 향해 달려갔다.

“성실하게 일해 주느라 고생했어요. 자, 약속했던 물건이요.”

“감사합니다!”

작은 상자에 머리핀이 예쁘게 포장되어 있었다. 듀이는 그녀가 건넨 상자를 소중하게 받아 들었다.

한시라도 빨리 전해 주고 싶다.

스승님이 말하길, 그의 아가씨는 노엘이라는 의상실에서 수확제 준비를 할 계획이라고 했다.

‘늦기 전에 가서 드려야 해!’

그녀가 머리 장식을 하고 수확제에 갈 수 있도록, 듀이는 이번에도 열심히 달렸다.

두 가게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지만, 시간을 지체했다가는 그녀가 황궁으로 떠나 버릴 수도 있다.

숨이 차올랐지만 발을 멈추지 않았다. 사실, 힘들지도 않았다.

예전에 셜리에게 먹일 약을 야외 정원으로 가져갔을 때, 네리아가 머리카락에 꽃들을 꽂고 있던 모습이 얼마나 잘 어울렸던지.

‘이것도 잘 어울리실 거야.’

그렇게 겨우 의상실 앞에 도착하여 듀이가 숨을 가쁘게 내쉬었다.

“무슨 일로 방문하셨는지요?”

“네리아 발렌티스 님을 뵈러 왔어요! 안에 계신가요? 아! 제 이름은 듀이예요. 그분을 모시고 있어요.”

점원이 확인을 받겠다며 가게 안으로 사라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입구로 돌아왔다.

“안쪽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듀이는 선물 상자를 손에 꼭 쥐고는 점원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드레스 가게는 이렇게 생겼구나.’

처음 보는 광경이 신기하여 고개를 두리번대며 따라 걸었더니, 점원이 어딘가에서 발을 멈췄다.

“레이디 발렌티스는 이곳에 계십니다.”

“감사합니다.”

듀이가 ‘파우더룸’이라고 적힌 문 앞에 섰다. 어쩐지 심장이 쿵쿵 뛰었다. 왜 긴장하는 거지?

그가 어색한 손동작으로 노크했다. 그리고 문이 열렸을 때.

“듀이! 어쩐 일로 왔어?”

네리아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듀이의 몸이 굳어 버리고 말았다.

듀이에게도 눈이 있으니 그녀가 제국에서도 보기 드문 미인이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작정하고 꾸며 놓은 그녀는 단지 미인이라는 단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였다.

요정이고 천사였다. 여신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 아니지?”

“아… 그게. 저는, 그게.”

하지만 듀이는 그녀를 보면서도 순수하게 감탄할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이 네리아의 머리카락에 꽂혀 있는 머리핀으로 향했다.

새하얀 보석들이 박혀 반짝반짝 빛나는 머리핀은 그녀의 황금색 머리카락에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게다가 고가품을 보는 안목이 없는 듀이의 눈으로 봐도 값비싸 보이는 드레스나 목걸이까지.

가난한 평민인 그로서는 평생 꿈도 꾸지 못할 것들이었다.

손에 들고 있는 선물 상자가 삽시간에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고귀한 그녀에게는 마찬가지로 귀한 물건들이 잘 어울렸다. 듀이가 가져온 선물 따위가 아니라.

네리아가 걸치고 있는 것들과 비교하면 그의 머리핀은 길가에 널린 돌멩이였다. 어린아이라도 그 정도 구분은 할 수 있을 터였다.

‘수확제에 하고 갈 머리핀을 선물해? 겨우 나 따위가 뭐라고.’

건방지기 짝이 없는 발상이었다.

네리아에게는 듀이의 성의나 마음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하늘 위에서 반짝이는 별이었고, 그는 흙길에 아무렇게나 자라 있는 잡초였다.

별은 잡초 따위가 없어도 혼자서 아름답게 빛날 수 있었다.

‘…내 주제에 선물이라니.’

왜 쓸데없는 짓을 했지? 수치심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가 상자를 등 뒤로 숨기며 뒷걸음질 쳤다.

이렇게 부족한 물건을 선물이랍시고 그녀에게 보여 줄 수는 없었다.

“듀이, 왜 그래?”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네리아는 그런 듀이를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얼굴이 아파 보이잖아. 진짜 무슨 일 있는 거야?”

“아, 아니에요!”

네리아의 손이 듀이의 뺨에 닿자, 그가 전기에 통하기라도 한 것처럼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그 반동 때문이었을까.

“으아악?”

듀이가 들고 있던 선물 상자를 실수로 떨어트리고 말았다.

툭 소리와 함께 상자가 열리며 안에서 튀어나온 머리핀이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하필이면……!

“저게 뭐지?”

네리아의 시선이 그곳에 닿았다.

“머리핀 아냐?”

벌어지지 않았으면 했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듀이는 생각했다. 나는 왜 이렇게나 바보 같을까?

몸이 얼어 버려 차마 움직이지도 못하는 그를 대신하여 네리아가 머리핀을 주워 들었다.

그녀가 보일 반응을 눈으로 지켜볼 자신이 없어 듀이는 질끈 눈을 감아 버렸다.

창피해! 이대로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면 좋을 텐데! 듀이는 비참함에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

‘이건 그때의?’

나는 손에 든 머리핀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낯선 물건이 아니었다. 확실히 기억에 남아 있다.

‘루체테에 갔을 때였지?’

예전 세계에서는 최고의 의상실이라고 불리던 장소가 존재하지 않는 것에 한탄하느라 아무런 의미 없이 그냥 들고 있던 것이었다.

그런데 듀이가 그 머리핀을 선물상자에 담아서 가져왔다는 것은.

‘내가 이걸 마음에 들어 한다고 생각해서?’

충분히 할 법한 오해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 소년을 바라보았다.

듀이는 귀까지 붉어져 창피함에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땅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나에게 선물을 주는 게 그렇게까지 부끄러웠어?’

눈에 보이는 소년의 순진한 반응에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거울 속의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듀이의 반응이 단순히 그런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저택에서 평소에 하고 다니던 차림새와는 전혀 다르다. 내가 입은 드레스도, 다이아몬드 머리핀도, 루비 목걸이도 지나치게 호화로웠다.

그에 반해 이 수수한 생김새의 머리핀은 지금 이 공간에서 상당히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

나는 아직도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 소년을 향해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 주려고 가져온 거야?”

“…아, 아뇨? 스, 스, 스승님께 드리려고 한 거예요!”

“그레이 아저씨가 나비 머리핀을? 굉장히 안 어울릴 것 같은데.”

반사적으로 그 모습을 상상했다가 재빠르게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나한테 주는 거 맞잖아? 그런데 네가 사기에는 꽤 비쌌을 텐데.”

수수하다는 건 귀족들의 기준이지, 이런 종류의 장신구는 결코 가격이 저렴하지 않다.

급료 한번 받아 본 적 없는 그가 선뜻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듀이. 너 설마, 이걸 구하려고-”

“아니에요-! 저는 절대 도둑질 같은 거 하지 않았어요-!”

그레이 경에게 돈을 빌리기라도 했느냐고 물어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듀이는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한순간에 사색이 되어서는 필사적으로 내 말을 부인했다.

“응, 당연하지. 나도 알아.”

그런 의심은 한 적도 없다.

오해를 풀기 위해 듀이의 손을 잡아 주었더니, 차갑게 식어 있던 그의 손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에 격양되어 있던 듀이가 조금쯤 침착해지더니,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제 힘으로 산 게 맞아요. 그동안 모아 두었던 돈이랑… 그걸로 부족해서 가게에서 청소를…….”

청소? 설마 수업에 졸았던 게 그런 이유 때문이었어? 게다가 듀이가 모아 놓은 돈이라고 한다면.

‘그래도 저 나름대로 모은 돈이 꽤 있어요! 길에서 동화를 발견하면 주워다가 모아 놨거든요. 돈을 보관하는 상자도 있어요.’

도서관에서 그렇게 말하던 소년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듀이, 설마 그 상자에 있는 돈을 다 쓴 거야? 네가 제일 아끼는 거라고 했잖아. 전 재산이라면서.”

“네, 하지만 그런 건 아깝지 않아요. 그보다 머리핀이 네리아 님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

“…….”

어째서였을까.

문득, 내가 하녀였던 시절에 듀이가 나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토드를 공격했던 일이 떠올랐다.

또 그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고맙다고 말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듀이가 어떤 마음으로 여기까지 머리핀을 가져왔는지 알 것 같아서.

대신 나는 말없이 거울 앞으로 가서 머리카락에 장식되어 있던 다이아몬드 머리핀을 뽑아 버렸다.

“잠깐, 발렌티스 양!”

노엘라가 놀라서 제지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듀이에게 받은 머리핀을 직접 머리에 꽂았다.

“예쁘다. 마음에 들어.”

그건 선의의 거짓말이 아니었다.

누가 공짜로 줘도 딱히 고맙지 않을 물건이다. 분명 루체테에서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보니, 이 수수한 머리핀이 그 어떤 비싼 보석들보다 훨씬 예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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