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내가 구한 드레스에 라일라와 백작 부인이 무슨 짓을 할 것이라는 짐작은 하고 있었다.
우선은 노엘 의상실에서 옷을 구입할 때, 라일라가 굳이 옷이 완성되는 날짜를 확인한 점.
얼핏 들으면 나를 챙겨 주는 말 같지만, 라일라의 입으로 내뱉는 말은 다르다.
게다가 필요가 없어진 예전 드레스를 굳이 평소보다 빨리 세탁해서 나에게 돌려보낸 것까지.
‘라 블루벨의 옷을 나에게 입힐 작정이구나’라고 예상하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방법으로 드레스에 손을 쓸까?
우스운 이야기지만, 백부 가족이 나를 괴롭히는 데에는 언제나 그 나름의 ‘명분’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새 드레스는 티 파티에서 줄리아가 나에게 홍차를 쏟았기에 그 보상으로 사 준 것이다.
자리에 함께 있던 라일라 본인이 수긍한 일인데, 뒤늦게 드레스를 취소할 명분이 없었다.
그러니 그들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 그냥 드레스를 아예 없애 버리는 것이다.
‘쓸데없이 부지런하기도 하지.’
그랬기에 나는 미리 의상실의 주인인 노엘라에게 편지를 보내 정당한 방법으로 협조를 구해 두었다.
노엘라는 정치적으로 중립인 헤론 후작 부인의 후원을 받고 있다.
그러니 라일라의 비위를 맞춘답시고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며 내 요청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애초에 그런 사유로 발렌티스 가문과 이해관계가 없는 노엘 의상실을 고른 거지만.’
창문 밖의 움직이는 풍경을 덤덤하게 바라보고 있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다시 만나서 반가워요!”
의상실 안에서 나를 안내해 준 사람은 노엘라였다.
귀족인 그녀 역시도 수확제에 참가해야 하기에 오늘은 가게를 점원들에게 맡겨 두었을 줄 알았건만.
눈빛에 호기심이 섞여 있는 것을 보아하니, 이 드레스 전쟁이 과연 어떻게 마무리될지를 직접 지켜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여기, 발렌티스 양의 옷이에요.”
의상실 내부에 딸린 파우더룸에 드레스 한 벌이 걸려 있었다.
내가 고르고 줄리아가 값을 치른 붉은색 레디메이드 드레스가 맞았다. 자연스럽게 내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런데 노엘라 님. 제가 따로 샀던 드레스는 어떻게 되었나요?”
“아- 그 옷 말이죠.”
질문을 받은 노엘라가 평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제 발렌티스 가문에서 오신 분들에게 잘 전달하였답니다.”
“아하, 그런가요?”
그녀와 내 입가에 묘한 미소가 동시에 떠올랐다.
백부네가 어떤 방법으로든 중간에서 옷을 빼돌릴 것은 분명했다.
의상실로 사람을 보낸다든가, 아니면 점원이 저택으로 가져온 옷을 대문 앞에서 가로챈다든가.
하지만 후자의 경우, 저택에 상주하는 나나 그레이 경이 우연이라도 그 장면을 목격할 확률이 있었다.
‘그러니 안정적인 방법을 선택해 노엘에 심복을 보낼 테지.’
고로, 내가 노엘라에게 편지를 보내 부탁한 것은 이것이었다.
가격이 저렴한 붉은색 시제품 드레스를 구매할 테니, 발렌티스 가문에서 내 옷을 찾으러 온다면 그 드레스를 넘겨줄 것.
유행이 지나 필요 없어진 전시용 드레스를 헐값에 사들이는 것쯤은 내가 가진 예산 내에서도 쉽게 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저택에서 원래 드레스의 디자인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나와 라일라뿐이다.
적당히 색깔만 똑같이 맞춰 준다면, 라일라의 심복들도 옷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고 속아 넘어갈 것이 확실했다.
‘어디다 내다 버렸는지는 모르겠다만, 너희가 가져간 건 가짜거든.’
내가 수확제에 제대로 된 옷을 입고 나타났을 때, 과연 라일라가 어떤 표정을 보여 줄지.
‘벌써부터 기다려지는걸?’
어쨌거나 모든 것은 노엘라의 협조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나는 감사의 의미를 담아 그녀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감사해요. 이 파우더룸을 빌려주신 것까지 포함해서요.”
“별말씀을요. 전부 비용을 지불하신 일이니, 특별히 발렌티스 양의 편의를 봐 드린 일도 아닌걸요.”
노엘라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
수도의 의상실은 손님을 위한 파우더룸 한두 개씩을 만들어 둔다.
소정의 사용료를 받기는 하지만, 손님들에게 제공하는 서비스에 가까운 개념이었기에 다행히도 금액이 비싸지는 않았다.
주로 드레스 디자인에 따라 화장을 바꾸는 용도로 쓰이는 만큼 다양한 종류의 화장품이 구비되어 있었는데, 사샤는 그것들을 사용해 열심히 손을 움직였다.
“여자 귀족분을 모셔 본 적이 처음이어서 자신은 없었는데요.”
내 얼굴에 화장을 끝낸 사샤가 감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 인생에 남을 역작이 탄생했어요. 제 실력보다는 아가씨의 얼굴이 대단한 일을 하신 거지만요.”
그녀의 말처럼, 거울 속에 그림같이 아름다운 소녀가 있었다.
본인이 스스로의 얼굴을 그렇게 평가하다니. 뻔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틀린 말이 아니었다.
제국 최고의 미인이라는 호칭은 아무나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마지막으로 의상까지 최고급 드레스로 갈아입었더니 드디어 기억 속에 익숙한 내 모습이 드러났다.
‘이제야 네리아 발렌티스 같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만 해도, 머리는 산발이고 얼굴에는 숯검정이 묻어 있는 충격적인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 시절의 추억 아닌 추억을 떠올리고 있었는데 문득 옆에 있던 사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 상태에 흡족해하는 나와 다르게 그녀의 눈빛에서는 왠지 모를 아쉬움이 느껴지고 있었다.
“사샤, 왜 그래?”
“다 좋은데, 액세서리가 아무것도 없는 게 아쉬워서요. 적어도 목걸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상관없어. 금발이 최고의 액세서리고 내 분홍색 눈이 벨라오스 보석 아니겠어?”
“다시 생각하니 최고의 액세서리는 아가씨의 자신감인 것 같네요.”
“칭찬 고마워. 그럼 준비도 다 끝냈으니 황궁으로 출발할까?”
“네, 아가씨.”
마치 개선장군이라도 된 듯, 들어왔을 때와는 전혀 달라진 모습으로 당당하게 걸어 나가던 때였다.
“…발렌티스 양?”
의상실 중앙에 놓인 소파에 앉아 있던 노엘라와 눈이 마주쳤다.
어차피 나가기 전에 그녀에게 인사를 하고 갈 계획이었기에 나는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오늘은 실례가 많았습니다.”
“잠깐! 잠깐만요! 발렌티스 양! 나가지 마시고 이쪽으로……!”
마차로 돌아갈 생각이었건만, 노엘라에게 붙잡혀 다시 파우더룸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금방 돌아올 테니, 잠시만 앉아서 기다려 주세요.”
“노엘라 님?”
무슨 용건인가 했더니, 밖으로 나갔던 그녀가 얼마 지나지 않아 점원을 데리고 다시 나타났다.
점원은 양팔에 층층이 쌓인 상자들을 들고 있었는데, 안에 들어 있을 내용물은 상자를 열어 보지 않아도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저것들은 액세서리 아닌가요?”
“네, 맞아요. 드레스에 어울릴 만한 장신구를 가져와 보았어요.”
점원이 상자를 늘어놓고는 하나씩 커버를 열었다. 그러자 호화로운 보석들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손님들께 대여해 드리거나, 원하신다면 판매도 하는 것들이에요.”
노엘라가 짧은 설명을 붙였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녀가 자진해서 보석을 가져온 이유는 뻔했다.
잘됐네. 하지만 노엘라에게는 모르는 척 능청스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것들을 왜 저에게? 짐작하시겠지만, 제 처지로는 대여료는커녕 보증금도 낼 수 없는걸요.”
“비용은 필요 없어요. 그냥 빌려 드릴게요. 이런 일이 잘 없는데… 그래요, 협찬이라고 하죠.”
“협찬이요?”
“제가 만든 옷이 이 정도로 잘 어울리는 분은 처음이라, 발렌티스 양을 이대로 보내기에는 제 마음이 아쉬워서요. 괜찮으시죠?”
돈도 받지 않고 빌려준다는데 괜찮지 않을 리가 있나.
내가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노엘라가 신중한 눈으로 나와 보석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발렌티스 양은 페어 레이디여서 귀걸이는 황궁에서 선물로 받으실 테니, 그걸 고려한다면…….”
결국 내 목에는 루비가 박힌 목걸이가, 머리카락에는 자잘한 다이아몬드들이 박힌 머리핀이 꽂혔다.
“호의에 감사드려요, 노엘라 님!”
“그러시다면, 다음에도 저희 노엘 의상실을 이용해 주세요.”
“제가 기도문 낭송에 실패해서 수도를 떠날 수도 있는데도요?”
“아뇨, 발렌티스 양은 실패하지 않을 거예요. 제 직감이에요.”
그녀의 눈빛이 확신에 차 있었다.
눈치껏 집안싸움에 끼어들지는 않았지만,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바보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아본 것 같았다.
‘하기야 라일라의 수작질에 대응하느라 편지까지 보냈는데,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서로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였다.
노크와 함께 문이 열리며 다른 점원이 나타났다.
“레이디 발렌티스를 찾아온 사람이 있어요. 듀이라는 이름의 소년인데, 들어오라고 해도 될까요?”
노엘라를 찾으러 왔다고 생각했는데, 용건이 있는 건 내 쪽이었다.
‘그런데 듀이가 나를 찾아왔다고?’
급한 일이라도 생긴 건가? 나는 의아해하면서도 곧바로 긍정의 말을 내뱉었다.
***
요즘, 듀이는 매일같이 즐겁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좋은 스승님을 만나 배우고 싶었던 검을 배우고, 그의 아가씨에게 각종 지식을 배우기도 했다.
숙소도 넓고 깨끗한 곳으로 옮겼고, 기사들에게 제공되는 넉넉한 식사를 끼니마다 챙겨 먹었더니 예전보다 키도 더 커졌다.
잠이 들 때면 언제나 내일이 기다려졌다. 이렇게 즐거웠던 적은 태어나서 처음이 아니었을까.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목숨을 연명할 뿐이었던 지난날과는 달랐다.
삶에 목표와 보람이 생겼다. 하루하루가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인생을 바꿔 준 사람이 누구인지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네리아 님께 은혜를 갚아야 해.’
그랬기에 듀이는 고민했다. 그녀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없을지를.
‘뭔가 하고 싶다고? 그렇다면 강해져라! 그게 아가씨께 가장 훌륭하게 보답하는 길이다!’
듀이의 질문에 스승님은 그렇게 대답해 주었지만, 그가 원하는 건 그런 종류가 아니었다.
강해져서 네리아 님을 지키는 건 듀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까.
‘난 네리아 님을 위해 지금 당장 뭐라도 하고 싶었던 건데…….’
그러던 어느 날.
듀이가 처음으로 네리아를 호위하기 위해 그녀를 따라 어떤 가게에 갔을 때였다.
드레스를 파는 줄 알았는데 드레스가 한 벌도 없는 곳이었다.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돌아가야 했기에 원래라면 기억에 유의미하게 남았을 장소가 아니었다.
네리아가 손에 들고서 빤히 쳐다보고 있던 무언가가 아니었더라면.
‘뭐길래 계속 보고 계신 거지?’
듀이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네리아의 옆을 기웃거렸다.
‘저건… 머리핀?’
그 역시도 같은 자리에 서서는 네리아가 선반 위에 돌려놓은 머리핀을 빤히 쳐다보았다.
‘저게 마음에 드셨던 건가?’
잘 생각해 보면 네리아는 귀족 영애가 되었는데도 아무런 장신구를 하고 다니지 않았다.
이유는 듀이도 모르지 않았다. 장신구를 마음대로 살 수 있을 만큼 돈이 넉넉하지 않으니까.
악독한 발렌티스 백작 부부는 사사건건 조카인 네리아를 핍박했다.
그런데도 항상 자신감이 넘치고 아무런 부족함도 없어 보이는 것이 그녀의 대단한 점이었다.
‘역시 네리아 님.’
듀이가 그의 자랑스러운 아가씨를 생각하며 히죽히죽 웃다가 다시 머리핀을 쳐다보았다.
‘내가 네리아 님께 저걸 선물해 드려야겠어!’
안 그래도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
꽤 오랫동안 보고 있었을 만큼 마음에 들어 하셨으니, 머리핀을 선물한다면 네리아 님도 기뻐해 주실 것이 분명하다.
게다가 그녀는 수확제에도 참석할 예정이니, 그때를 위해 장신구가 하나라도 있는 게 좋지 않을까?
“듀이, 거기서 뭐 해?”
“아, 죄송합니다-!”
그날은 듀이를 찾으러 온 네리아를 따라 저택으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그는 다음 날이 되자마자 그동안 열심히 모아 놓은 돈을 전부 들고는 그 가게로 향했다.
“제가 저 머리핀을 살게요!”
듀이가 동화로 가득 차 있는 작은 상자를 가게의 주인에게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