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여분의 의자를 직접 들고는, 붉은 머리의 소녀가 앉아 있는 자리 옆에 억지로 비집고 들어갔다.
조금만 움직여도 옆 사람과 팔이 스칠 법한 거리였기에 붉은 머리 소녀가 불쾌한 듯 눈을 찌푸렸다.
하지만 나는 눈치채지 못한 척 태연하게 의자에 앉았다.
사람들은 이런 내 모습을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제멋대로시네요. 아무리 사촌 관계라고 해도 주최자인 라일라 양이 참석을 허락하지 않았는데요.”
“아니, 그보다 왜 의자를 직접 가져오나요? 하녀를 시키지 않고?”
“죄송해요. 제가 직접 의자를 가져오면 안 됐던 건가요?”
나는 몰랐다는 듯이 도움을 구하려는 눈길로 라일라를 쳐다보았다.
“라일라, 나 어떡하면 좋지?”
“다들 저의 친애하는 사촌 자매를 환영해 주세요. 네리아는 하녀로 지낸 시간이 워낙 길어 아직 귀족식 예법에 서툴답니다.”
라일라가 나에게 대답하는 대신 모두에게 선언했다.
말투나 목소리는 나를 반기는 것 같았지만, 실상은 내가 하녀였다는 과거를 굳이 다른 사람들에게 상기시키는 행동이었다.
이곳에 모인 소녀들은 라일라의 의도를 쉽게 파악했고, 순간적으로 어둡게 눈을 빛냈다.
“아, 그러셨군요. 그런 과거가 있었다니, 이해해 드려야죠.”
테이블에 앉은 영애들이 입가의 비웃음을 숨기지도 않은 채 나에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환영해요, 발렌티스 양. 라일라의 사촌이니 이름을 불러도 될까요?”
“잠깐, 그런데 네리아 양이 입은 드레스가…….”
“데뷔탕트 때 입을 드레스예요! 아껴 두고 싶었지만, 다른 영애분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무리하게 입고 왔어요. 예쁘지 않나요?”
“예뻐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네! 하녀 옷만 입다가 이렇게 화려한 옷을 입어 보긴 처음이에요!”
“잘됐네요. 네리아 양에게 정말 잘 어울리는 드레스예요.”
“정말요? 고마워요!”
시제품 수준의 드레스가 잘 어울린다니. 내 수준도 고작 그것밖에 안 된다는 조롱성 발언이었다.
하지만 모르는 척 기쁘게 웃자 주변에서 키득대는 소리가 들렸다.
“네리아 양은 좋으시겠어요. 본가의 가족분들께서 네리아 양에게 정성을 쏟으시잖아요.”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네리아는 제 하나뿐인 사촌 자매인걸요.”
그때,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던 라일라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네리아에게 유능한 하녀도 붙여 주었답니다. 남자인 레비와는 맞지 않는 것 같아서 제가 데려오려고 했지만, 그녀를 위해 양보했죠.”
“유능한 하녀가 얼마나 귀한데요! 라일라 양이 보여 주시는 가족애가 너무 아름다워요!”
그 소리 나올 줄 알았다.
사샤를 줘서 고마운 건 맞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가소롭다는 웃음을 숨기던 순간이었다.
내 옆에 앉아 있던 붉은 머리 소녀가 찻잔으로 손을 뻗는 모습을 목격했다. 지금이었다.
적당한 시점에 몸을 비틀자, 찻잔을 들어 올리던 그녀가 나에게 잔을 부딪쳤다.
몹시도 가까운 거리였기에 쏟아진 짙은 색 홍차는 필연적으로 내 드레스를 갈색으로 물들이고 말았다.
“조심하지 않고 뭘 하는 거예요?”
“꺄악! 어쩌면 좋지? 수확제에 입고 갈 드레스는 이것밖에 없는데.”
차를 쏟은 소녀가 화를 냈지만, 나는 드레스가 오염된 부분을 바라보며 비명을 내질렀다.
상대방의 드레스를 망가뜨리면 배상해 주는 것이 사교계의 예의였다. 붉은 머리 소녀는 짜증과 난감함이 뒤섞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쏟은 건 미안해요. 그러게 왜 이렇게 가까이 앉은 거예요?”
“저도 죄송해요…….”
나는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훌쩍거리면서도 조심스럽게 그녀를 관찰했다.
그녀의 이름은 줄리아 델프.
얼굴의 주근깨가 인상적인 줄리아는 제국의 동부에서 대부호로 유명한 델프 백작가의 장녀였다.
‘본가에서는 남동생과 후계자 경쟁을 벌이고 있다고 했던가.’
델프 가문은 수도의 정치 싸움에 관여하기보다는, 대대로 동부에서 큰 사업을 벌이며 부를 축적했다.
그런데 그런 집안의 장녀가 어째서 수도까지 와서 라일라의 비위를 맞추고 있을까?
그것은 어떤 유명한 화가의 그림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가주 본인의 초상화를 의뢰하고 싶다던가?
‘델프 가주가 예술품 수집에 열을 내는 건 여기서도 유명하지.’
하지만 화가는 성격이 까다로워서 작업 의뢰를 잘 받지 않았다.
상대가 누가 되었든, 모르는 사람과는 아예 말을 섞지 않을 만큼 폐쇄적인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화가는 발렌티스 가문과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다.
그랬기에 줄리아가 몸소 수도까지 온 것이다. 발렌티스 가문을 통해 화가를 소개받을 수 있도록.
‘그 정도의 거장은 돈으로도 움직이지 않으니까. 만나기 어려운 만큼 델프 가주도 더욱 애가 탔겠지.’
사샤를 통해 알게 된 정보였다.
부자인 그녀에게 고작 드레스를 배상하는 것쯤이야 어렵지도 않은 일이다.
하지만 줄리아는 스스로 행동하는 대신 라일라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요? 하고.
“큰일이네. 네리아는 수확제에서 중요한 역할까지 맡았는데 엉망이 된 드레스를 입고 갈 순 없잖아?”
라일라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어쩐지 웃음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줄리아 양, 배상해 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비슷한 것으로요.”
비슷한 것. 다른 전시용 드레스를 사 주면 되지 않겠냐는 말이었다.
라일라의 말뜻을 이해한 영애들이 또다시 키득거렸지만, 나는 이번에도 모르는 척 입을 열었다.
“하지만 수확제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지금 새 드레스를 만들 시간이 있을까? 예약도 힘들 텐데.”
“네리아 양, 괜찮아요.”
줄리아가 친절한 목소리로 나를 달래 주었다.
“의상실에서는 레디메이드 드레스라는 걸 판매하고 있거든요.”
“레디메이드? 그게 뭔가요?”
“이미 만들어 놓은 드레스예요. 표준 체형을 기준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간단하게 사이즈 수선만 하고 입을 수 있답니다.”
“의상실에 그런 게 있나요?”
“네. 제가 차를 쏟았으니 사과의 의미로 네리아 양에게 새로운 드레스를 사 드릴게요.”
“다행이다……! 고마워요!”
“네리아, 지금 바로 출발할래?”
대화를 듣고 있던 라일라도 중간에 끼어들어 입을 열었다.
“두 사람만 가면 어색할 테니, 나도 같이 따라가 줄게.”
“라일라까지……?”
“티 파티가 일찍 끝나서 아쉽지만, 네가 더 중요하잖아. 다들, 죄송하지만 양해해 주실 수 있죠?”
“그럼요. 역시 라일라 양은 친절하기도 하셔요!”
나는 감격해하며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옷 갈아입고 금방 올게!”
***
“네리아 양의 드레스는 라 블루벨에서 만든 것이라고 했죠? 이번에도 그쪽으로 갈까요?”
“절대 안 돼요! 도나 님께서 만들어 주신 드레스를 망가트렸다고는 죽어도 말할 수 없어요!”
“그럼 특별히 원하는 곳이라도 있나요?”
“원하는 곳이요? 아! 노엘이라는 의상실을 들어 본 적이 있어요.”
“좋아요, 그쪽으로 가요.”
그러한 대화를 거쳐 세 사람이 도착한 곳은 내가 언급했던 ‘노엘’이라는 이름의 의상실이었다.
“어서 오세요!”
그곳의 주인인 노엘라가 직접 세 사람을 반겨 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양해를 구하는 말을 덧붙였다.
“지금은 예약이 밀려 주문하셔도 수확제가 끝난 뒤에나 제작이 가능할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괜찮아요. 저희는 레디메이드 드레스를 구매하러 온 것이거든요.”
“그러시다면 바로 안내를 도와 드리겠습니다.”
“아뇨, 저희끼리 구경하고 필요한 게 있으면 점원을 부르겠어요.”
“나는 앉아서 기다리고 있을게. 다른 사람의 옷을 골라 주는 데는 자신이 없어서 말야.”
노엘라가 길을 비켜 준 사이에 라일라는 이미 대기용 테이블로 자리를 옮긴 상태였다.
자신이 없기는. 줄리아에게 나를 맡긴 뒤에 본인은 상관없는 척 뒤로 쏙 빠져 있으려는 의도면서.
‘내가 전시용 드레스를 고르면 모르는 척 널 존중한다고 하겠지.’
대놓고 괴롭히는 것과 돌려서 괴롭히는 것. 똑같은 괴롭힘이라도 귀족 사회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
돌려서 괴롭히는 것에는 책임이 없으니까. 하여간 약았다.
“천천히 구경해 봐요. 가격에 상관없이 네리아 양이 고르는 것을 사 드릴 테니까요.”
한편, 줄리아는 천연덕스럽게 나에게 전시용 드레스를 레디메이드 드레스로 속이며 권유했다.
근처에 있던 노엘라와 점원들은 얼핏 당황한 얼굴로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두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 같았지만, 손님의 결정에 점원이 관여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들은 눈치껏 나서지 않고 상황을 관망하고만 있었다.
‘뭐, 라일라와 줄리아가 이렇게 나올 줄 예상했으니까.’
티 파티에서 나는 엉망인 드레스를 입었으면서도 바보처럼 기뻐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니 의상실로 가서 다른 전시용 드레스를 사 줘도 또다시 멍청하게 속을 것이다.
그녀들은 그렇게 생각했기에 아무런 의심도 없이 나를 의상실로 데려온 것이었다.
생각대로 움직인 건 내가 아니라 너희란다. 그렇게 생각하며 아무 드레스 두 벌을 대충 골라냈다.
“이 두 가지가 마음에 들어요! 입어 보고 결정하고 싶은데…….”
곤란해하며 주변을 돌아보자 옆에 있던 줄리아가 나에게 다가왔다.
“물론 입어 보고 결정하면 돼요! 그쪽의 점원분. 네리아 양이 드레스를 입는 걸 도와주시겠어요?”
“알겠습니다. 두 벌을 입어 보려면 시간이 걸릴 테니, 줄리아 님은 대기 테이블에서 기다려 주세요. 다과를 더 내오겠습니다.”
점원의 제안에 줄리아가 자리를 옮겼고, 나는 다른 여자 점원을 따라 탈의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네리아 님, 실례하겠습니다. 먼저 입으신 드레스를 벗겨 드릴게요.”
“잠깐만요.”
내 옷에 손을 대려는 점원을 옆으로 물리고는 탈의실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라일라와 줄리아가 테이블에 앉아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화기애애해 보이는 둘을 지켜보다가 점원에게 말을 걸었다.
“죄송하지만 여기서 기다려 주실래요? 잠시 나갔다 올게요.”
“네? 알겠습니다.”
나는 불필요한 소란이 생기지 않도록 조용히 탈의실을 빠져나왔다.
라일라와 줄리아는 수다와 다과에 정신이 팔려 있었기에 내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드레스를 쓸데없이 두 벌이나 고른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옷을 금방 갈아입을 수 있다면, 줄리아가 대기 테이블로 가지 않고 탈의실 앞에서 그대로 기다릴 수도 있었으니까.
‘너희, 분명 가격에 상관없이 내가 고르는 것을 사 준다고 했었지?”
나는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어딘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수도의 귀족은 유행에 민감하기에 실시간으로 유행을 반영할 수 있는 오더메이드로 의복을 구매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살다 보면 급하게 옷이 필요한 상황이 생기고는 한다.
의상실에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 미리 만들어진 드레스를 판매했는데, 평소에는 찾는 사람이 거의 없어 구색 맞추기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레디메이드 드레스가 있는 곳은 의상실의 가장 구석.’
이 공식은 적어도 내가 방문한 적 있는 모든 의상실에 통용된다.
나는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해 눈앞에 펼쳐진 옷들을 바라보았다.
저렴한 천과 모조품 보석으로 모양만 흉내 낸 시제품이 아니라, 고가의 원단과 진품 보석을 사용한 진짜 드레스였다.
‘이제야 눈이 맑아지는 것 같네.’
레디메이드 드레스는 시기와 관계없이 파는 옷인 만큼, 무난하고 고전적인 디자인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만큼 굳이 시간을 들여 가며 고를 필요가 없었기에, 나는 적당한 붉은색 드레스를 골라서는 다시 로비를 향해 가져갔다.
그리고 손님용 대기 테이블에 가까워졌을 무렵, 일부러 상기된 표정으로 그녀들의 이름을 불렀다.
“라일라! 줄리아 양!”
“네리아? 벌써 다 골랐어?”
“응! 안쪽에도 드레스가 있는 것 같아서 잠깐 구경하러 가 봤는데 마음에 드는 걸 발견했어!”
나는 그녀들이 제대로 확인할 수 있도록 드레스를 펼쳐 들었다.
“저번 옷이랑 비슷한 붉은색 드레스야! 어때? 예쁘지?”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드레스에 라일라와 줄리아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구겨졌다.
저게 대체 어떻게 레디메이드 드레스를 찾아왔냐는 표정이었다.
“…그건 어디서 가져왔어?”
“저기 저쪽에 있던데? 구경하다 보니까 금방 찾았어.”
라일라의 미간에 주름이 잡히는 것을 모르는 척하고 천연덕스럽게 어딘가를 가리켰다.
“점원에게 물어보니까 이것도 파는 옷이 맞대. 잘 고른 것 같지?”
“…….”
하지만 그들은 내 결정에 아무런 참견도 할 수 없었다.
줄리아는 내가 고르는 것을 사 주겠다고 말했었고, 증인도 많았다.
의상실의 주인 노엘라를 포함한 점원들은 이 상황을 보면서도 나서지 않고 지켜보기만 했다.
마찬가지로 손님의 결정에 점원이 관여할 수는 없는 법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