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은 셀프입니다 (34)화 (34/172)



<34>

자, 그렇다면 이제 완벽한 사교계 데뷔를 위해서-

“응……?”

그러나 가게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나는 ‘루체테’라고 적힌 간판을 보며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눈을 몇 번 깜빡이고는 다시 간판을 쳐다보았다. ‘루체테’라고 적혀있는 것이 맞았다.

그런데,

“…의상실이 아니잖아?”

당황스러웠다. 여기는… 잡화점?

건물만 바라보며 바깥에 서 있었더니, 맑은 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안에서 사람이 튀어나왔다.

“어서 오세요, 손님!”

싹싹한 목소리로 인사하는 여성도 칼리 로렌스가 맞았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안쪽으로 들어오세요.”

칼리에게 이끌려 일단은 가게 안쪽으로 들어갔다.

두리번거리며 내부를 둘러보았지만, 드레스는커녕 드레스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저 여러 가지 선반에 여성용 모자나 장신구, 다양한 소품들이 전시되어 있을 뿐이었다.

“죄송하지만, 로렌스 부인.”

“부인? 저는 미혼이에요. 다른 사람과 착각을 하신 것 같은데, 이름도 로렌스가 아니라 칼리예요.”

미혼? 결혼을 안 했어?

“실례했어요. 그런데 혹시, 드레스를 만들지는 않으시나요?”

“저희는 드레스를 취급하지 않아요. 루체테는 소품 등의 각종 여성용품을 판매하는 잡화점이랍니다!”

“…….”

“찾으시는 게 있으세요?”

“혹시 동생분의 행방은…….”

“제 동생이라면, 셰릴을 찾으셨나요? 셰릴은 오늘 쉬는 날이에요.”

심지어 동생을 이미 찾았어?

“…잠깐 둘러보고 있을게요.”

“네, 필요하시면 불러 주세요.”

칼리가 카운터로 돌아갔고, 나는 여러 가지 소품들이 진열된 선반 앞에서 머리를 짚었다.

‘맙소사. 의상실이 아니었구나.’

돌이켜 보면 힌트는 있었다.

예전 세계의 유행이었던 ‘가급적 장식을 배제한 드레스’는 칼리의 작품이었지만, 이곳에는 그런 유행이 전혀 없다.

게다가 그곳에서 칼리를 발굴하고 지원했던 레오니트 대공은 여기서 황태제가 되어 있었다.

차기 황제인 그가 평민 디자이너를 발굴하거나 지원할 이유가 없는 게 당연했다.

‘비슷해도 다른 세상이니까.’

단지, 나에게 칼리는 디자이너로 존재하는 게 당연한 사람이었기에 이곳에서도 의상실을 운영하고 있을 거라고 굳게 믿은 것이다.

나는 눈앞에 있는 머리핀 하나를 아무거나 대충 집어 들었다.

평범한 나비 모양 머리핀이었다.

고가품에 익숙한 내 눈에는 썩 마땅치도 않고, 누가 공짜로 줘도 딱히 고맙지 않을 물건이었다.

허무함과 아쉬움을 동시에 느끼며 한숨을 쉬고 있었는데, 내 옆으로 갈색 머리 소년이 다가왔다.

“네리아 님, 반대쪽도 보고 왔는데 여기엔 드레스가 없어 보여요.”

“…괜찮아. 아직 남아 있는 방법이 여섯 가지쯤 더 있거든.”

“네?”

나는 의미 없이 쳐다보고 있던 머리핀을 다시 선반에 내려놓고는 출구를 향해 걸어갔다.

저택에 도착하면 사샤를 통해 수도 의상실들에 관한 정보도 같이 알아 놔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잠깐, 칼리가 의상실을 운영하지 않는다는 말은…….’

입을 열어 칼리에게 물었다.

“드레스를 만들어 볼 생각은 없으세요? 혹시 관심이 없으신지.”

귀족으로 자리를 잡는다면, 레오니트 황태제 대신 내가 그녀를 지원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수도 최고의 디자이너를 내 손에 넣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산뜻하게 웃는 얼굴로 단호하게 거절했다.

“드레스요? 죄송하지만, 저는 지금 하는 일이 제일 즐거워서요.”

“그런가요?”

아쉽지만 어차피 지금 당장은 그녀를 지원할 능력이 없다.

나중이라도 칼리를 천천히 설득해 보면 될 일이니, 지금은 다른 계획이나 세워야겠다고 생각하며 잡화점을 벗어났을 때였다.

“듀이?”

나를 따라와야 할 사람이 나오지 않았다. 어딨지?

의아해하며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듀이가 아까 그 자리에서 서서 내가 들고 있던 나비 모양의 머리핀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듀이, 거기서 뭐 해?”

“아, 죄송합니다-!”

소년은 내가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허둥지둥 가게를 나섰다.

귀갓길은 출발할 때와 다름없는 빈손이었다. 하지만 수확이 아예 없는 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아가씨! 드레스 문제는 잘 해결하셨나요?”

“아니, 예상외의 문제가 있어서 다음 작전을 써야 할 것 같아.”

이번의 실패를 교훈 삼아 다음번은 더 확실한 방법을 쓰기로 했다.

주문 제작은 시간이 안 될 테니, 레디메이드 드레스를 노려야겠지.

“…라일라가 저택에서 티 파티를 여는 날이 언제인지 알아?”

“일주일에 한 번은 다른 영애분들을 초대하시니까 모레쯤이 되겠네요. 확실한 날짜는 제가 다시 알아 올게요.”

“고마워. 그런데 모임은 잘 다녀왔어? 어땠어?”

사샤는 입을 열기 전에 진저리를 치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가씨의 소문이 악의적으로 퍼져 있었어요. 하루아침에 귀족이 되어서인지 천박하고 제멋대로에 고집도 세서 발렌티스 백작 부부의 골치를 썩이고 있다면서요.”

“소문의 출처가 어디인지는 굳이 안 찾아봐도 알겠네.”

어차피 내가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면 자연히 없어질 소문이기에 굳이 신경 쓸 가치는 없었다.

“다른 소식은 없어?”

“가십성 주제가 대부분이기는 했는데, 흥미로운 소식이 하나 있어요. 이번 수확제가 끝나면 니나렛 황녀님의 예법 튜터를 뽑는대요.”

“니나렛 황녀님의?”

그 말을 듣고 나자, 낮에 들었던 라일라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는데 니나렛 황녀 전하의 예법 튜터를 고른다고…….’

그때는 제대로 듣지 못했지만, 아마도 같은 이야기인 것 같았다.

“그렇지만 개인 교사는 당연히 있어야 하잖아. 흥미로울 게 있어?”

“네. 황녀님께 평범하게 예법만 가르치는 역할이 아니거든요. 아가씨도 아시겠지만, 황녀님께서-”

사샤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고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이곳에는 그녀와 나, 둘밖에 없는데도.

“니나렛 황녀 전하께서 사람들 사이에서 망나니라고 불리고 있는 거 알고 계시죠?”

왜인가 했더니 황족 모독성 발언이었다. 황녀에게 망나니라니.

문득, 멜비나 백작 부인이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예산 문제로 그녀가 나를 찾아왔던 날이었다.

‘그래, 그분. 죄인처럼 지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황녀로 떠받들어지니 성격이 엇나가고 말았지. 아직 9살이신데 사치에 패악질에…….’

그리고 동시에 예전 세계에서 가깝게 지내던 니나렛 황녀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기도 했다.

‘네르, 더 놀다 가면 안 돼? 응?’

패악질을 부리는 모습 같은 건 상상조차 되지 않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그런데 그 니나렛은 어찌하여 예전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처지가 되어 버리고 말았던 것인가.

여기에는 황제 폐하가 어떠한 ‘사고’로 생식 불능이 된 것과 관련이 있었다.

5년 전. 정부 란타나가 배 속에 황제의 아이를 가졌을 때, 황후가 그녀에게 선물로 독이 든 케이크를 보낸 일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진짜 문제는 란타나를 찾은 황제가 그 케이크를 함께 먹었다는 사실에 있었다.

그 일로 란타나의 아이가 사산되고 황제는 불임이 되고 말았다.

‘듣고도 안 믿기는 일이었지. 그런 일이 생긴 것도, 그게 그 황후 폐하의 소행이라는 것도.’

황제가 불임이 되었다는 것은 황족의 대가 끊어질 수 있는 큰 사건이었다. 황제는 몹시 분노했다.

황후는 사형을 당했고, 죄인의 아이인 니나렛은 황위 계승권을 박탈당해 별궁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그러다가 황제 폐하의 명령으로 반년 전에 다시 귀환하긴 했지만.’

아마도 더는 후사를 볼 수 없게 된 황제가 뒤늦게 하나뿐인 친딸이 그리워진 것이 아니었을까.

황제는 니나렛을 다시 황궁으로 데려왔고 믿을 만한 사람들을 보내 아이를 정성껏 돌보게 했다.

하지만 니나렛은 이미 성격이 삐뚤어진 뒤였다.

사치를 일삼는 데다 교육을 위한 수업은 전부 거부.

게다가 황궁에서 마주치는 귀족에게 폭언을 일삼고, 죄 없는 아랫사람을 괴롭히기까지.

“황녀님의 예절 교육을 위해 엄격한 교사를 붙였는데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대요.”

“그렇겠지. 고귀한 황족에게 정도 이상으로 혼을 낼 수도 없고, 체벌은 더더욱 할 수 없으니까.”

그런 식의 훈육이 가능한 사람은 친부모뿐이다.

하지만 황후 폐하는 돌아가셨고, 황제 폐하는 니나렛을 별궁으로 보낸 장본인이다. 그런 황제가 딸을 나무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새로운 방법을 쓰게 된 거예요. 황녀님의 옆에 본보기가 될 수 있을 만한 훌륭한 귀족 영애를 예법 교사로 붙이는 거죠.”

사샤가 설명을 이어 갔다.

“꾸중 대신 황녀님 본인이 스스로 보고 배울 수 있도록요.”

“그 말은 즉, 니나렛 전하에게 롤 모델이 될 수 있을 만한 사람을 뽑는다는 거구나?”

상당히 괜찮은 방법이었다.

그 나이대의 어린아이들은 제 눈에 멋있어 보이는 동성의 연상을 동경하고 따라 하고 싶어 하니까.

실제로 예전 세계의 니나렛도 친모인 황후 폐하보다 일개 귀족인 내 말을 더 잘 듣지 않았던가.

“네. 그래서 황녀궁의 시녀장이신 앨마 부인께서 튜터 후보 7명을 선발하셨는데, 그 후보에 오른 영애분들이 하나같이 대단하셔서요.”

“누구길래?”

“우선 라일라 아가씨와 에모리 공작가의 클로이 님, 그리고-”

나는 사샤의 말을 전부 듣고는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문이나 외모, 사교계에서의 지위나 영향력 등. 가히 수도에서 최고라고 불리는 소녀들이었다.

라일라도 저택 안에서나 유치하게 굴지, 밖에서는 황태제비 후보로 떠받들어지고 있지 않던가.

‘낮에 만났을 때, 라일라가 즐거워 보였던 데는 이유가 더 있었군,’

어쨌거나 좋은 정보였다. 황녀궁에서 니나렛의 튜터를 선발한다니.

‘내가 하면 되겠네.’

되기만 한다면 황족과 가까운 관계를 맺을 수도 있다. 나에게는 절대로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수확제에 참석하면 황녀궁의 시녀장을 찾아봐야겠는걸.’

우선은 후보에 포함되는 일부터. 나는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

이틀 뒤, 발렌티스 저택의 야외 정원에서 라일라가 주최하는 티 파티가 열렸다.

일반적으로 초대받지 못한 티 파티에는 참석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이곳은 내 집이기도 했다.

나는 야외 정원의 구석에 숨어서 라일라와 다른 영애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을 훔쳐보았다.

라 블루벨에서 받은 시제품 품질의 붉은색 드레스를 입은 채였다.

“라일라 양, 황녀 전하의 튜터 후보가 되신 것을 축하드려요.”

“저라면 후보에 든 것만으로도 기뻐서 울었을 거예요. 제국의 그 많은 미혼 영애 중에서 일곱 손가락 안에 들었다는 뜻이잖아요!”

“그중에서도 가장 최고는 라일라 양이죠. 다들 그렇게 생각하죠?”

“그럼요. 라일라 양은 조만간 황태제비가 될 분이잖아요?”

“게다가 이번 수확제에서 첫 춤을 추게 되셨다면서요? 축하할 일이 또 있네요!”

초대받은 소녀들은 입을 모아 라일라에게 칭찬을 늘어놓기 바빴다.

오늘의 티타임은 친구라기보다 추종자를 모아 놓은 모임이라던 사샤의 설명 그대로였다.

라일라는 설핏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저택 안에서 나를 대하는 태도와 달리 고상하고 교양이 넘쳐 보이는 모습이었다.

“다들 고마워요. 저 역시도 부족하나마 후보로 선발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겸손도 하셔라! 그렇지만 후보로만 만족하실 건 아니겠죠?”

“네, 최선을 다할 생각이에요. 부끄럽지만 황태제비 후보라고 불리고 있으니, 이참에 황궁 경험을 만들어 두면 좋을 것 같아서요.”

글쎄, 과연 그렇게 될까?

피식 웃으며 티 테이블이 있는 정원 안으로 발을 들였다. 슬슬 제대로 된 드레스를 구하러 가 볼까?

“다들 안녕하세요!”

“…….”

“라일라가 저택에 다른 영애분들을 초대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실례를 무릅쓰고 와 보았어요.”

갑작스러운 불청객의 난입으로 인해 티 테이블의 대화가 끊겼다.

그녀들은 자신들을 방해한 범인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내가 있는 쪽으로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누구시길래-”

“네리아 발렌티스입니다. 라일라의 사촌 자매예요! 저도 같이 있어도 될까요?”

나는 말을 하면서도 그녀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몸을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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