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은 셀프입니다 (33)화 (33/172)



<33>

예법 수업 다음은 드레스였다.

나는 의상실에서 사람이 왔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1층 응접실을 향해 홀로 발걸음을 옮겼다.

예법 교사랍시고 보내 준 사람이 썩 탐탁지 않은 자였기에, 이번에도 별다른 기대는 없었다.

하지만 응접실의 문을 열고 안에 있던 여성과 눈이 마주친 순간, 의외라는 생각에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수도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유명 의상실 ‘라 블루벨’의 주인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미인이실 줄은 몰랐는데요! 라 블루벨의 도나 헤런드입니다. 반가워요.”

“네리아 발렌티스입니다. 오늘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어쩜, 로즈 님을 빼닮으셨군요! 수도에 등장하자마자 사교계 전체를 들썩이게 만든 분이셨지요. 자, 발렌티스 양, 이쪽으로.”

나는 도나의 손에 이끌려 테이블 소파에 착석했다.

“이 시기에는 예약이 전부 차 있지만, 발렌티스 백작 부인의 부탁으로 빠듯하게 일정을 냈답니다.”

“저희 백모님께서요?”

라 블루벨의 도나 헤런드는 결코 어중이떠중이가 아니었다.

그녀의 말처럼 수확제를 앞둔 시기에 예약을 넣으려면 상당한 웃돈을 지불해야 했을 텐데.

마지막으로 옷 정도는 좋은 것을 입혀 주겠다는 건가? 어쨌거나 그들의 돈으로 사 주는 것, 감사히 받기로 했다.

“의상실에는 더 많은 전시용 드레스가 있지만, 전부 가져올 수는 없으니 두 벌만 가져왔어요.”

도나가 옆을 바라보며 간이 마네킹에 걸린 드레스를 가리켰다.

“수도의 최신 유행이랍니다. 시제품이라 원단은 저렴한 천을 사용했으니 디자인만 봐 주세요.”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라일라가 저런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하녀 일을 하면서도 느낀 것이었지만, 이곳의 유행은 예전 세계와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가급적 장식을 배제한 드레스가 예전 세계의 유행이었는데.’

예전 세계 쪽의 유행이 내 취향에 더 가까웠으나, 도나가 가져온 옷들이 별로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저는 이게 마음에 들어요.”

“탁월한 선택이에요! 다음으로 옷감과 장식을 골라 볼까요?”

이후로는 도나의 적극적인 주도로 일이 진행되었다.

“짙은 보라색 옷감은 어떤가요?”

“그것도 예쁘지만, 데뷔탕트니까 좀 더 밝은 색이 좋지 않을까요? 예를 들면 붉은색이요.”

“붉은색이요? 그것도 괜찮지요.”

도나는 내가 고른 원단과 디자인 스케치를 번갈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장식으로 블랙 다이아몬드를 달면 좋을 텐데 그건 남자분들만 사용하는 보석이니……. 대신 검은색 오닉스를 써도 괜찮겠어요.”

그렇게 내가 입을 드레스에 대한 상의가 계속되었고, 마지막으로 사이즈 측정까지 거의 1시간이 지나서야 정리를 끝낼 수 있었다.

***

그리고 도나가 저택에 방문했던 날로부터 1주일 뒤.

라 블루벨에서 드레스를 완성해 가져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저택의 응접실로 향하던 중이었다.

“…는데 니나렛 황녀 전하의 예법 튜터를 고른다고…….”

로비에서 라일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직속 하녀와 잡담을 나누고 있는 것 같았다.

‘니나렛 황녀 전하? 예법 튜터?’

니나렛 황녀가 개인 교사를 들이기라도 한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기던 때였다.

“네리아?”

라일라가 나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오늘따라 그녀의 얼굴이 즐거워 보였다.

“안녕, 드레스를 보러 온 거지?”

“응, 맞아.”

“잘 만들었더라! 예쁘게 입어. 너한테 잘 어울릴 거야.”

라일라는 나에게 그런 말을 남긴 채 모퉁이 너머로 사라졌다.

‘나한테 잘 어울릴 거라고?’

좋은 의미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응접실 안으로 발을 들인 순간, 라일라의 말뜻을 단번에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제 역작이랍니다. 어때요, 발렌티스 양? 마음에 드세요?”

라 블루벨의 주인, 도나 헤런드가 팔을 뻗어 간이 마네킹에 걸린 드레스를 가리켰다.

“네, 정말이지…….”

붉은색 천과 허리 뒤로 늘어트린 황금색 리본, 풍성하게 부풀린 치마와 드레스를 장식한 보석들까지.

도나와 함께 구상했던 드레스 디자인이 완벽하게 구현되어 있었다.

단, 드레스에 사용된 재료들을 제외하고는.

“정말이지, 참…….”

최고급 실크 원단에서는 부드럽고 은은한 윤광이 감돈다.

하지만 지금 보는 드레스는 불량품 천을 사용해 색감이 선명하지 않고 칙칙했으며, 사용된 장식물도 진짜 보석이 아닌 모조품이었다.

일주일 전, 드레스를 만들기 위해 의상실에서 가져왔던 전시용 시제품이나 다름없는 품질이었다.

드레스가 완성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기대감이 파스스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고생하셨어요, 도나 님. 제 조카에게 정말로 잘 어울리겠어요!”

도나와 응접실에 함께 있던 멜비나 백작 부인이 드레스를 칭찬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처음부터 한패였구나.’

백부네가 치졸한 인간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으나 이건 내 상상을 한참이나 뛰어넘었다.

푼돈 같은 예산, 한 달 만에 사교계 데뷔, 쓸모없는 예법 교사, 마지막으로 페어 레이디 역할까지.

이미 할 만큼 한 줄 알았더니, 드레스에까지 손을 쓸 줄이야.

‘와, 이쯤 되니 재밌네.’

순간적으로 웃음이 나올 것 같아서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하지만 한 가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내가 저런 옷을 입고 수확제에 참석했다가는, 제작자인 도나 헤런드의 명성에도 흠집이 생길 텐데.

“도나 님, 그런데 드레스에 사용된 재료가 조금 다른 것 같아요.”

“그럴 리가요! 발렌티스 양이 고른 재료들이 맞아요. 제가 권해 드린 것들을 거절하고는 저걸 고집하셨잖아요. 기억나지 않으세요?”

도나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멜비나 백작 부인이 그런 도나의 옆에서 친근하게 말을 거들었다.

“네리아, 너는 드레스를 주문해 본 적이 처음이잖니. 재료만 보는 것과 완성품을 보는 건 느낌이 다르단다. 네가 헷갈린 거야.”

“네, 부인의 말씀이 정확해요. 그리고 마음에 들지 않아도 이제는 다시 옷을 만들 시간이 없어요.”

나는 그들의 태연한 목소리를 들으며 작게 웃음을 흘렸다.

‘내가 저런 옷을 선택한 것이라면서 책임을 떠넘길 작정이군.’

거짓말로 명분을 만든 것이다.

누군가가 ‘왜 저런 드레스를 만들었느냐’고 묻는다면, 도나의 말대로 내가 저런 옷이 좋다면서 고집을 부렸다고 대답해 주면 되니까.

게다가 그날 응접실에 있던 사람은 나를 제외하면 도나와 점원들이 전부였기에, 내 편에서 증언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아… 그런가요?”

어차피 여기서 시시비비를 따져 해결책을 얻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아예 그들에게 맞춰 바보 시늉을 하기로 했다. 괜한 아는 척으로 경계 받는 일이 없도록.

나는 순진한 얼굴로 헤헤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잘 몰랐나 봐요. 백모님의 말씀처럼 이런 일이 처음이라서.”

“그럴 수 있죠. 충분히 이해해요. 드레스는 마음에 드나요?”

“그럼요! 이렇게 예쁜 옷을 가져 보는 건 처음이에요.”

“좋아해 주시니 저도 기쁘네요.”

“그럼 저는 예법 교본을 읽어야 해서 먼저 올라가 보겠습니다. 두 분은 이야기를 더 나누실 건가요?”

“응, 그럴 생각이란다. 네리아는 먼저 올라가 보렴.”

나는 두 사람에게 인사하고는 응접실을 벗어났다. 입가에는 조소를 머금은 채였다.

***

내 방에 붉은색 드레스가 걸렸다.

사샤가 차분하면서도 덤덤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대책을 마련해야 할 텐데, 저희 예산으로는 제대로 된 드레스를 사기에 부족해요. 그럴 시간도 없고요. 레디메이드 드레스라도 구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요.”

내가 수확제에 전시용 드레스를 입고 갈 위기에 처했는데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모습이었다.

“걱정되지는 않아?”

“걱정 안 돼요. 이것도 아가씨께서 잘 해결하실 것 같거든요.”

그녀가 나에게 신뢰가 가득한 눈빛을 보내는 것을 보며 나는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맞아, 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돈 없이도 드레스를 구할 방법을 일곱 가지 정도 생각해 뒀거든.”

사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자신만만하게 일어섰다.

“잠깐 외출을 다녀와야겠어. 다른 의상실로 갈 거야.”

“지금 당장이요? 지금 말고 몇 시간 뒤에 출발하실 수는 없을까요?”

“상관은 없는데, 왜?”

“오늘 귀족가 직속 하녀 모임이 있어서요.”

“아… 그게 오늘이었지?”

귀족가의 직속 하녀들은 자체적으로 사적인 모임을 만들어 정기적으로 만남을 가지고는 한다.

명목은 정보 교류회로써, 사샤는 레비의 하녀가 아니게 되면서 모임에서도 한 번 제외되었지만, 내 직속 하녀가 됨으로써 다시 참석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그곳에 모인 하녀들은 정보를 교환하기도 하고 일부러 의도적인 소문을 흘리기도 한다.

고위 귀족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보다는 중요도나 정확도가 떨어졌지만, 지금 당장 고급 정보를 구할 길이 없는 나로서는 무조건 사샤를 보내야만 했다.

“의상실에 꼭 같이 가야 하는 건 아니니까 사샤는 모임에 참석해. 나는 호위로 듀이를 데려갈게.”

“네, 알겠습니다.”

그녀와 나는 그렇게 각자의 목적지로 향하게 되었다.

나에게 신경 쓸 것 없이 편하게 다녀오라고 했건만, 착실한 사샤는 듀이를 불러내는 일과 마차를 준비하는 것까지 전부 끝내 놓고 나서야 저택을 떠났다.

‘역시 사샤. 마음에 들어.’

어느새 대문 앞에 대기해 있는 마차에 올라서 편하게 등을 기댔다.

다음으로 듀이까지 맞은편 좌석에 착석하자, 앞에서 마부가 말을 걸어왔다.

“아가씨, 어디로 모실까요?”

“‘루체테’로 가 줘.”

“루체테라면 아이리스 거리의 끄트머리에 있는 가게를 말씀하시는 거지요?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목적지 확인이 끝나고 곧장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맞은편에 앉은 듀이는 누가 봐도 긴장한 모습으로 주변을 열심히 경계하고 있었다.

“듀이, 편하게 앉아.”

“하지만 첫 호위 임무인데 실수라도 하게 된다면……!”

“그냥 의상실에 가는 것뿐이니까 어깨에 힘 빼도 돼.”

“네…….”

하지만 듀이는 억지로 편하게 앉으려고 한 탓인지, 아까보다 더 부자연스러운 자세가 되고 말았다.

그 모습이 재미있어 쿡쿡 웃음을 터뜨렸더니, 듀이가 민망한 듯 허둥대며 괜히 말을 걸어왔다.

“네리아 님은 드레스를 구하러 간다고 하셨지요?”

“응, 맞아.”

내가 향하고 있는 곳, ‘루체테’는 누구나가 인정하는 명실상부한 수도 최고의 의상실이다.

그곳의 주인 ‘칼리 로렌스’는 평민 출신의 재능 있는 디자이너로, 레오니트 대공에게 발굴 및 지원을 받아 단 3년 만에 수도에서 자리를 잡은 자였다.

‘아, 여기서는 레오니트 대공이 아니라 레오니트 황태제였지.’

그런데 그렇게 대단한 의상실에 돈 한 푼 없이 빈손으로 찾아가고 있으면서도 이렇게나 당당하다니.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나는 칼리가 찾는 사람의 행방을 알고 있으니까.’

그녀는 어린 시절에 잃어버린 여동생을 애타게 찾고 있었다.

그리고 칼리의 여동생을 찾아 준 사람이 바로 내 아버지였다. 대략 2년 전에 있었던 일이었다.

아버지가 칼리의 여동생을 찾게 된 경위는 우연에 가까웠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내가 여동생의 행방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가족을 찾아 준 은인에게 드레스 한 벌쯤 당장 만들어서 선물하는 게 뭐가 대수겠는가.

사실, 이 정보는 원래 사교계 데뷔 이후에나 활용할 계획이었지만,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아가씨, 도착했습니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으니 루체테에 도착하는 것도 금방이었다.

“제가 먼저 나갈게요!”

듀이는 어디서 배워 온 것인지, 마차가 멈추자마자 재빠르게 밖으로 나가서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에스코트?

“네리아 님, 저에게 손을……!”

정식 기사를 흉내 내는 어설픈 자세였다. 처음 해 보는 행동일 테니 어색해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이런 건 어디서 알아 왔어?”

“스승님께서 가르쳐 주셨어요.”

듀이 나름대로 애쓰는 모습이 대견스러워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여기서까지 또 웃었다가는 비웃음을 당했다고 오해하여 자신감을 잃어버릴지도.

나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듀이의 손을 잡고는 우아한 발걸음으로 마차에서 내려왔다.

해냈다는 표정으로 기뻐하는 듀이의 모습은 모른 척해 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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