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페어 레이디라면 로닐 가문의 아이로 정해지지 않았나요?”
“네, 하지만 로닐 영애보다 더 어울리는 사람이 있어요!”
“이미 정해진 자리를 바꾸는 건 곤란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수확제와 관련된 것은 궁내부가 결정할 일이지, 일개 정부인 제가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랍니다.”
관여할 수 없기는.
궁내부의 고위 관료가 란타나의 수족이라는 사실은 눈치 빠른 귀족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괜찮은 아이가 있거든요. 로닐 영애는 억지로 역할을 맡은 것이기에 바꿔 준다고 하면 오히려 환영할 테고요.”
“…….”
“로닐 가문에 들어간 지원금은 저희 가문에서 부담하겠어요.”
“부인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들어는 봐야겠죠. 추천하려는 사람이 누구인가요?”
“제 조카예요! 불의의 사고 때문에 평민으로 지냈지만, 최근에 신분이 회복되어 귀족이 되었지요.”
“…부인의 조카라면?”
“네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랍니다. 올해 17살이 되었어요.”
“네리아……?”
최근에 귀족이 되었다는 소녀에게 페어 레이디를 시킨다니, 절대로 좋은 의도가 아니었다.
란타나는 그 사실에 관심을 가진 걸까? 드디어 그녀가 고개를 돌려 멜비나와 눈을 마주쳤다.
란타나의 눈동자에서 어쩐지 흥미롭다는 감정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렇군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부인의 조카라고 하니, 저도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어요.”
“꼭 부탁드리겠습니다.”
“궁내부와 이야기를 나눈 뒤에 저택으로 편지해 드리도록 하죠.”
말은 저렇지만, 승낙이나 다름없는 표현이었다. 멜비나는 밝은 얼굴로 웃었다.
재산 상속 문제 등, 가문에서 거슬리는 소녀를 페어 레이디로 보냈다가 수도에서 완전히 쫓아내는 일은 종종 쓰이는 수법이었다.
황궁에서 주관하는 행사를 그런 사적인 목적으로 이용하냐는 비난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차피 지원자가 없으면 희생양이라도 만들어야 하는 일.
그렇기에 황족들도 암묵적으로 눈을 감아 주는 일이기도 했다.
‘건방진 것 같으니라고. 감히 어딜 붙어 있으려고?’
그들 가족에게 네리아는 존재만으로도 발렌티스 가문에 분란을 부를 수 있는 눈엣가시였다.
무조건 쫓아내야 한다.
‘저 천덕꾸러기 때문에 아까운 돈과 시간을 낭비했지만, 이제 그것도 끝이야.’
목적을 이룬 멜비나의 입가에 음험한 미소가 걸렸다.
***
요즘, 의외로 나는 한가했다.
데뷔탕트를 앞두고 있으면서도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사교계 데뷔 전까지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에 가깝기는 했지만.
그랬기에 나는 곧바로 듀이와 수업을 시작하기로 했다.
그 첫째 날. 나는 책 냄새를 맡으며 도서관 안으로 발을 들였다.
발렌티스 저택 도서관의 풍경은 이쪽 세계나 저쪽 세계나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듀이는 창가 옆 책상에 앉아 있었는데, 도서관이 신기했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와 눈을 마주치자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리아 님, 오늘부터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번에는 필기시험이라는 말에 침울해지더니, 지금은 마음을 다잡은 것인지 의욕을 보이고 있었다.
‘…으음?’
그런데 멀리서 볼 때는 몰랐는데, 가까이서 보니 소년의 얼굴이 어쩐지 조금 불편해 보였다.
“듀이, 책상이 안 맞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도서관은 책을 나르는 곳이었는데 공부하러 온 게 어색해서요. 제가 여기에 있어도 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아.”
나는 듀이의 말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좋든 나쁘든, 같은 장소인데 사용하는 목적이 달라진다면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
‘내가 산증인이지.’
편하게 생활하던 내 집이 고용인으로 일하는 공간이 됐던 것처럼.
“이해해. 하지만 당연히 있어도 되지. 이제 넌 종신 하인이 아니라 견습 기사잖아. 그렇지?”
“네, 맞아요……! 아, 저 그러고 보니 다음 달부터는 정식으로 급료를 받기로 했어요!”
듀이가 갑자기 생각이 났다는 듯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견습 기사들은 정식 기사의 조수 역할을 하는 등의 일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수련생 신분이기에 많은 급료를 받지는 못한다.
‘하급 하인이 받는 급료의 절반 정도밖에 안 됐었지?’
하지만 지금까지 무보수로 일해 왔던 듀이에게는 고작 그 정도의 액수라도 기쁜 모양이었다.
“잘됐다. 그동안이 나빴던 거지. 널 그렇게 많이 부려 먹었으면서 한 푼도 주지 않았다니.”
“그래도 저 나름대로 모은 돈이 꽤 있어요! 길에서 동화를 발견하면 주워다가 모아 놨거든요. 돈을 보관하는 상자도 있어요.”
듀이가 양쪽 검지로 허공에 작은 네모를 그렸다.
“이 정도 되는 크기인데 제가 제일 아끼는 물건이에요.”
도토리를 모으는 다람쥐?
“그런데 돈이 꽤…라고?”
“네, 꽤 돼요! 얼마 전에 상자를 가득 채웠거든요.”
“…….”
거기에 동화를 다 채워 봐야 은화 5개의 가치도 되지 않을 텐데.
하지만 듀이가 자랑하는 성과에 찬물을 뿌리고 싶지 않아서 뒤늦게 ‘우와’ 하는 감탄사를 흘려 주었다.
“대단하네.”
듀이는 내 칭찬에 수줍어하면서도 뿌듯하게 웃고 있었다.
행복을 느끼는 역치가 너무 낮은 거 아냐? 그만큼 힘들게 지내 왔다는 뜻이겠지만.
듀이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는데도 능력을 발휘할 기회도 없이 형편없는 대우를 받아 왔다.
‘능력에 맞는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꼭 기사로 만들어야 해.’
그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듀이보다 내가 더 의욕이 생기는 것 같았다.
나는 책상 앞으로 얇은 책 한 권을 힘차게 내밀었다.
도서관 안으로 들어오는 길에 뽑아 온 책으로, 어린이도 쉽게 읽을 수 있는 기초 역사서였다.
“자, 그럼 기사가 되기 위해 우선은 이것부터 시작할까?”
조용한 도서관 안에 내 목소리와 책을 넘기는 소리가 울렸다.
역사서를 설명하고 질문에 답을 해 주기도 하며, 그렇게 두어 시간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갑자기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무심코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창문 너머로 황가의 표식이 달린 마차가 보였다.
‘황궁에서 사람이 온 건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백작 부인이 반갑게 마중을 나가는 모습을 보니 그녀를 찾은 용건인 것 같다.
나는 다시 듀이에게 집중했고, 그로부터 1시간이 더 지나 수업이 대충 마무리되었을 무렵이었다.
“아가씨, 수업은 끝나셨나요?”
도서관의 문이 열리며 사샤가 나타났다.
“방금. 무슨 일 있어?”
“마님께서 아가씨를 찾으셨어요. 바로 가 보셔야 할 것 같아요.”
“백모님이 나를? 무슨 일이지?”
“용건은 저도 잘 모르겠어요. 급한 일이라고만 하셨어요.”
백작 부인이 나를 찾는다니. 뭔지는 모르겠으나 좋은 일은 아닐 것 같다. 물론 당하지도 않겠지만.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듀이, 나는 먼저 돌아갈게. 자기 전에 복습하는 거 잊으면 안 돼.”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수업을 정리하고 나는 사샤의 뒤를 따라갔다. 그녀가 안내한 장소는 멜비나 백작 부인의 개인 응접실이었다.
“네리아, 어서 오렴!”
백작 부인은 그녀답지 않게 밝은 얼굴로 나를 반겨 주었다.
그녀의 손에 뜯어진 황금색 편지가 들려 있었다. 황금색이라면, 황궁에서 보낸 것이다.
“좋은 오후입니다, 백모님! 저는 어쩐 일로 부르셨나요?”
“네게 전해 줄 소식이 있단다.”
“저에게요? 어떤 일인가요?”
“방금 황궁에서 사자가 다녀갔어. 네리아, 네가 올해 수확제의 페어 레이디가 되었다고 해.”
“네?”
그녀가 들고 있던 편지를 나에게 건네주었다. 네리아 발렌티스를 올해의 페어 레이디로 선정했다는 임명장이었다.
“원래 내정된 아이가 있었는데, 궁내부에서 페어 레이디를 너로 바꾼 모양이야.”
“대체 어째서 저를……?”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네. 황궁의 궁내부 사람들이 네가 그 아이보다 잘할 거라고 판단했나 봐.”
눈에 보이는 거짓말이었다. 나를 페어 레이디 자리에 밀어 넣으려고 뒤에서 손을 썼으면서.
“네리아, 할 수 있겠니? 황궁에서 통보한 것이라 우리에게는 거부권이 없거든.”
“…….”
나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미소를 지었다.
조금 전에 했던 생각을 정정하기로 했다. 좋은 일이 맞았다.
듀이에게 페어 레이디에 관해 알려 주었던 날, 그들에게는 말할 수 없었던 이야기가 있었다.
평행세계의 나는 15살에 이미 수확제의 페어 레이디로서 완벽하게 데뷔탕트를 끝냈다는 사실이었다.
‘아마 13살부터 준비를 했던가?’
‘페어 레이디 출신’이라는 칭호는 제국의 귀족 여성에게 평생을 따라붙는 명예였고, 데뷔탕트 후에는 아무리 하고 싶어도 절대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희소성까지.
완벽한 귀족이 되기를 꿈꾸었던 나에게 페어 레이디 자리는 당연히 거쳐야 할 관문이었다.
게다가 기도문을 다시 외워야 할 필요도 없었다.
사지석화증에 걸렸을 때, 침대에 누워만 있다 보니 심심해서 기도문을 반복해서 읽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기대도 안 했었는데.’
아무런 기반도 연줄도 없는 내가, 중앙 사교계로 진입할 수 있는 직행 티켓을 선물해 주다니.
백작 부인에게 감사의 인사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
그날 이후, 백작 부인이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예법 수업을 위한 교사를 나에게 보낸 것이었다.
“사브리나 탈리아입니다. 발렌티스 양을 가르치게 되었지요.”
저택의 교습실에서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노년의 부인이 자기소개와 함께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이론이 완벽해야지 실전이 완벽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선은 이 책을 읽도록 하세요.”
예상은 하고 있었다. 백작 부인이 나를 위해서 괜찮은 예법 스승을 붙여 줄 리가 없다고.
그러나 오늘 만난 교사는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최악이었다.
원래 성향인지 백작 부인의 지시를 받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브리나는 나를 제대로 가르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예법을 배우는데 책을 줘?’
인사하는 자세, 바른 걸음걸이, 차를 마시는 동작, 다른 귀족과 대화할 때의 태도 등.
이 모든 것들은 머리가 아닌 몸으로 습득해야 하는 것이다.
이론만 백날 외워 봐야 뭘 하겠는가. 본인이 실제로 해내지 못한다면 전부 헛수고인데.
그런데도 저런 사람을 교사라고 붙이다니. 백부네의 치졸함은 오늘도 변함없이 건재했다.
‘이것도 나한테는 안 통하지만.’
어차피 나에게 예법 수업은 필요하지 않다. 예의상 책을 펼쳤으나, 당연하게도 전부 아는 내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