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은 셀프입니다 (31)화 (31/172)



<31>

“마지막으로 파트너는 그레이 아저씨에게 부탁할 거야. 아저씨가 보기와 다르게 왈츠를 잘 추셔.”

그는 평민 출신이지만, 뛰어난 실력으로 유명한 기사인 만큼 동행하기에 부족한 상대가 아니었다.

게다가 돌아가신 아버지의 기사가 이번에는 그 딸을 에스코트하다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인가.

내가 그레이 경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부모님의 후광을 입을 수 있다. 그는 지금의 내가 고를 수 있는 최선의 선택지였다.

“이제 걱정할 거 없지?”

“네, 저는 아가씨를 믿을게요.”

사샤가 눈을 빛내며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 그 모습이 아주 잠깐 광신도처럼 보였다는 사실은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있어요. 그래도 아가씨의 데뷔탕트인데, 파트너가 그레이 경이시라니.”

어느새 평소의 모습을 되찾은 사샤가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기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어쩐지 그레이 경이 ‘제가 뭐가 어때서요!’ 하고 울면서 외치는 환청이 들리는 것 같았다.

“적어도 비슷한 나이의 잘생긴 남자분이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상관없어. 내가 그런 걸 따질 수 있을 만큼 배부른 처지도 아니고.”

“그렇지만 파트너와 함께하는 데뷔탕트에서의 첫 춤은 귀족 영애분들의 로망이잖아요.”

“뭐… 로망이기는 하지.”

귀족 소녀들이 가지는 데뷔탕트의 의미는 특별하다. 소녀들은 적어도 한 번쯤은 멋진 신사의 손을 잡고 춤추기를 꿈꾸고는 한다.

그렇지만 어차피 나는 15살에 많은 사람의 찬사를 받으며 완벽하게 사교계 데뷔를 끝낸 몸.

데뷔탕트도 귀족 사회에 연줄을 만들기 위한 발판일 뿐이고, 이제 와서 가질 로망 같은 건 없지만,

“네 말처럼 비슷한 나이의 잘생긴 파트너와 함께하는 게 좋기는 하겠지. 그러니까 듀이.”

“네? 네!”

예고 없이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갑작스레 이름을 불린 소년이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기사 시험에 꼭 합격해야 한다? 나중에는 네가 파트너가 되어서 날 에스코트해야 하니까.”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테이블에 놓여 있던 종이 한 장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어쩌다 보니 다른 대화가 길어졌으나 듀이를 여기까지 불러낸 이유는 바로 이것.

필기시험 준비를 위한 공부 일정표를 전해 주기 위해서였다.

“하루에 3시간씩 도서관에서 공부할 거야. 저번에 말했다시피, 내가 직접 가르칠 거고.”

“에, 에, 에, 에, 에…….”

“에?”

“에스코트를 제가요?”

“당연하지. 내 기사님이 될 텐데.”

“…파트너라니. 에스코트라니.”

듀이는 내 말이 몹시도 충격이었던 것인지 넋을 놓고 얼음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듀이? 괜찮아?”

이런 이야기가 부담스러운 건가, 소년의 눈앞에 손을 휘둘러도 반응이 없었다.

당분간은 계속 저런 상태일 것 같기에 이참에 사샤에게 궁금했던 다른 질문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올해 수확제의 ‘페어 레이디’는 누가 하게 됐는지 알아?”

“로닐 가문의 알렉사 님이세요.”

“알렉사 로닐? 로닐 남작의 조카를 말하는 거니?”

“네, 맞아요.”

나는 한 소녀를 떠올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알렉사 로닐은 소심하고 눈에 잘 띄지 않던 소녀였다.

데뷔탕트를 치르지 않은 소녀들의 모임에서, 알렉사 혼자 책을 읽고 있던 모습이 기억에 남아 있다.

“…올해는 ‘희생양’인가 보구나.”

“그보다는 ‘올해도’라는 표현이 더 적당해요. 10년째 제대로 된 지원자가 없었으니까요.”

“페어 레이디?”

마음속으로 그녀를 동정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일찍 정신을 차린 듀이가 처음 들어 보는 단어라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앗, 죄송합니다! 방해하려던 게 아닌데, 저도 모르게!”

“궁금할 수도 있지.”

듀이가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에, 나는 소년을 위해 설명을 덧붙이기로 했다.

“수확제 때, 마지막에 등장해서 기도문을 낭송하는 역할인데, 매해 수확제에서 데뷔탕트를 치르는 영애 중에서 한 명을 선발하거든.”

“으음, 어려운 일인 거죠?”

“어렵지. 신전에서 발행한 1장부터 67장까지의 기도문을 전부 암기해야 하니까.”

“네? 67장이요?”

듀이가 경악하며 입을 벌렸다.

“그럼 그 많은 걸 전부 기억했다가 줄줄 말해야 하는 건가요?”

“응, 그렇지.”

“으으, 저는 절대 못 하겠어요. 제사가 아니라 무슨 시험 같아요!”

“시험이라는 표현이 맞아.”

여기에도 나름의 역사는 있다.

오래전, 다리스 제국에 심한 가뭄이 든 적이 있었다.

황가나 귀족가가 나서 식량을 풀었지만, 가난한 평민들은 굶어 죽어 갈 정도였다.

그때, 한 소녀가 기도했다.

소녀는 자신이 만든 제단 앞에서 신을 향해 기도문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외웠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는데,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 뒤로 전통이 되었어.”

수확제에서 기도문을 외우는 것.

게다가 영광스러운 자리이니만큼 기회는 한 번이라는 의미로 낭송자 역할을 그날, 데뷔탕트를 치르는 귀족 영애로 한정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페어 레이디’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더욱이 황족들과 수많은 귀족이 지켜보는 앞에서 하는 일이기에, 손짓 하나조차 완벽하게 실수 없이 해내야만 하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좋은 기회는 맞아. 페어 레이디 역할을 성공적으로 해내기만 한다면 보상이 주어지거든.”

“보상이라면 상금이 있나요?”

“상금은 없지만, 귀족에게는 돈보다 좋은 거지.”

명예, 그리고 역대 페어 레이디 출신 귀부인들과의 인맥.

고위 귀족에게는 자신의 명예를 드높일 기회가, 하급 귀족에게는 단번에 중앙 사교계로 진입할 수 있는 직행 티켓이 되었다.

“그런데 아까 희생양이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어째서인가요……?”

“방금 예리했어! 그 보상이란 건 성공했을 때의 이야기거든.”

“그, 그러면 실패한다면요?”

“사교계 퇴출.”

가차 없이 나온 대답에 듀이의 입이 아까보다 더 크게 벌어졌다.

물론 공식적인 처분이 아닌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하지만 그 많은 사람이 주목한 곳에서 실패하고 대대적인 망신을 당했는데, 정상적으로 사교 활동을 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결국, 역할에 실패한 영애들은 거의 수도를 떠나고는 했다. 고위 귀족의 딸이라도 예외는 없었다.

그렇기에 몇 년간은 제대로 된 지원자가 없었다. 실패했을 때의 위험성이 크니 굳이 시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기도문을 틀려서 실패. 도중에 재채기가 나와서 실패. 걸어오다가 넘어져서 실패. 각종 실패로 사교계 데뷔와 동시에 퇴출당해 수도를 떠난 사례가 많아. 가혹하지?”

“너무해요……! 왜 그런 짓을.”

“전통이니까. 애초에 저런 미신이 날씨랑 무슨 상관이겠어? 저렇게 실패하는 일도 많은데.”

하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자리를 잡은 전통을 없애기에는 저항이 크다. 황족이나 귀족들은 쓸데없는 겉치레에 목숨을 거는 족속이니까.

“만약 그 해에 페어 레이디에 지원하는 영애가 아무도 없다면, 황궁에서 지원금이라는 명목의 위로금을 주면서 하급 귀족 중에서 한 명을 뽑아 오기도 해.”

“그래서 희생양이라고 부르는 것이었군요.”

“정답! 그런데 잘 배우는데? 공부를 가르치는 보람이 있겠어.”

“여, 열심히 하겠습니다!”

듀이를 빤히 바라보며 입가를 올리자, 소년이 갑자기 허를 찔린 듯 빳빳하게 허리를 세웠다.

***

비슷한 시각.

다리스 제국의 황궁, 그 안에서도 황제의 디르케가 거주하는 서궁.

멜비나 발렌티스는 란타나를 만나기 위해 서궁 안으로 발을 들였다.

마음 같아서는 조카인 네리아가 연례 회의에서 사고를 친 다음 날에 당장 그녀를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란타나가 보름 동안이나 여행으로 수도를 비우고 있었기에, 오늘 날짜에야 겨우 방문 약속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발렌티스 부인.”

접견실에 앉아 있던 멜비나가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입구에 그녀를 부른 회색 머리의 남자가 서 있었다. 란타나가 데리고 있는 시종이었다.

“죄송합니다만,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란타나 님께서 방금 잠에서 깨어나셨습니다.”

“예, 물론 기다리겠습니다.”

약속 시간이 지난 지 20분째, 멜비나가 서궁에 도착한 지 30분이 지난 시각에 전달받은 통보였다.

하지만 멜비나는 불쾌한 기색 없이 흔쾌히 대답했다.

아쉬운 쪽은 란타나가 아니라 그녀였기 때문이었다.

멜비나는 접견실에서 차를 한 잔 더 마셨고, 30분이 더 지나서야 회색 머리 시종에게 다시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이쪽으로 들어가십시오.”

“미안해요, 부인. 많이 기다렸죠?”

멜비나가 시종을 따라 들어간 곳은 서궁의 침실이었다.

그곳에서 란타나는 테이블 의자에 나른하게 등을 기대고 있었다.

방금 목욕을 끝낸 것인지 하얀색 실크 가운을 입고 있었으며, 그녀의 기다란 검은색 머리카락이 물기에 젖어 있었다.

이렇게 무례한 모습으로 손님을 맞이하다니. 황족이나 최고위 귀족들도 저지르지 않는 결례였다.

하지만 황제가 총애하는 애첩에게 그런 것이 무슨 문제가 될까.

멜비나는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지으며 테이블 맞은편에 앉았다.

“아닙니다! 제가 약속을 너무 일찍 잡은 것 같아 죄송했지요. 여행은 즐겁게 다녀오셨나요?”

“네, 아주 즐거웠답니다.”

란타나가 분홍색 눈동자를 휘며 아름답게 웃었다. 오늘따라 그녀의 기분이 좋아 보였다.

‘마침 잘됐어.’

멜비나가 미소를 지으며 품속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냈다.

곧바로 덮개를 열자, 상자 안에서 분홍색 보석이 박힌 값비싼 반지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커팅이 아주 잘된 최상급의 상품이에요. 란타나 님께 어울릴 것 같아서 선물로 가져왔어요.”

“이 보석은 벨라오스로군요?”

“네, 그렇습니다! 저희 가문이 벨라오스 광산을 가지고 있거든요. 어떻게, 마음에 드시나요?”

“네, 예쁘네요. 마음에 들어요.”

란타나가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고는 팔을 뻗어 손등을 쳐다보았다. 분홍색 보석이 오후의 햇볕을 받아 반짝였다.

“어머나, 세상에! 역시, 란타나 님의 눈동자와 새하얀 손가락에 잘 어울릴 것 같았어요!”

멜비나는 그 모습을 보며 경박하게 호들갑을 떨었다.

보는 사람이 부끄러워질 정도의 노골적인 아부였음에도 멜비나의 얼굴색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수도의 귀족 일부는 발렌티스 백작가의 이런 모습을 비난했다. 평민 출신 정부의 비위를 맞추는 게 자존심이 상하지도 않느냐면서.

하지만 멜비나는 그들의 조롱과 비난에도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자존심이 상하긴 뭐가 상해?’

란타나는 관대하며 자비롭다.

그리고 황제가 오래도록 총애하는 것이 당연한 만큼 아름답다.

그런 그녀에게 납작 엎드려 아첨하는 것 정도가 무슨 대수겠는가.

란타나의 협조만 받는다면, 자신의 딸은 황후가 될 것이고 자신의 손자는 황제가 될 것인데!

“그런데 부인은 무슨 일로 서궁까지 발걸음을 하셨나요?”

란타나는 질문을 하면서도 멜비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나른한 시선으로 손등의 반지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하지만 멜비나는 그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수확제의 페어 레이디로 추천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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