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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셀프입니다 (30)화 (30/172)



<30>

하기야, 내가 지켜본 이 가족의 중심은 레비가 아니라 라일라였다.

답도 없는 멍청이인 레비보다는 라일라가 상대적으로 낫기도 했고, 무려 황태제비 후보이기도 했으니.

‘황태제비라…….’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이곳에서는 ‘란타나’만큼이나 이질적이었던 단어였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황태제’도 없었으니까.

‘이곳의 황제 폐하는 어떤 사고로 고자… 아니, 불임이 되어 이복 남동생인 레오니트 대공이 황태제가 되었다지?’

처음에는 듣고도 믿지 못했던 정보였다.

“네리아? 너 그릇이 왜 그래?”

그런데 그때, 또다시 라일라의 목소리가 나에게 날아들었다.

“코르를 안 먹고 남겨 놨잖아.”

라일라의 시선이 내가 사용 중인 식기에 닿았다.

그녀의 말처럼, 내 접시에는 청록색을 띠는 채소가 한쪽 구석에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내가 있는 쪽을 집요하게도 예의 주시한 모양이었다.

“코르에서 쓴맛이 나기는 하지만,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편식이야?”

“어머, 정말 그러네? 네리아, 편식은 좋지 않단다. 남기지 말고 먹도록 하렴.”

그렇게 양이 많지도 않은 채소를 보며, 라일라와 백작 부인이 동시에 나를 추궁해 왔다.

남을 괴롭히는 데 부지런한 그들은 새로운 공격거리를 찾은 것에 즐거워하고 있었다. 이 모녀는 식사하는데 피곤하지도 않은 건가?

“편식이 아니라, 코르에 알레르기가 있어서 먹지 못해요.”

이건 변명이 아니었다. 코르를 먹으면 실제로 심장이 아픈 증상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흠… 생각해 보니 네 어머니인 로즈도 코르를 먹지 못했던 것 같은데, 너도 그렇구나.”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은 라일라는 사냥감을 노리는 사냥꾼처럼 눈을 빛냈다. 그녀의 입꼬리가 높이 치솟아 있었다.

“그런 건 엄살이지, 먹으려면 먹을 수 있어. 이번 기회에 극복해 보는 게 어때? 우리가 도와줄게. 그렇죠, 어머니?”

“사촌 자매를 생각하는 라일라의 마음씨가 참 착하기도 하지!”

“당연하죠. 네리아, 한번 먹어 봐. 네가 약점을 이겨 낼 수 있도록 내가 널 응원해 줄게.”

“꼭 먹어야 해?”

“이런 건 의지의 문제라고 생각하거든. 네가 코르를 전부 다 먹기 전까진 모두가 다이닝룸을 떠나지 않을 거야.”

라일라가 동의를 구하듯 남은 가족을 쳐다보았다.

딱히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레비는 관심이 없었고, 백작 부인은 미소를 짓고 있기만 했다.

“네리아, 안 먹어? 우리가 널 위해서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라일라가 구슬픈 목소리와 말투로 나를 압박했다. 입은 즐거운 듯이 웃고 있으면서.

없던 정도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선천적인 체질을 이런 식으로 비겁하게 겨냥하다니.

‘그런데 라일라, 후회할 텐데?’

고개를 숙여 입가를 가리며 나도 같이 피식 웃었다.

“그렇게까지 날 걱정해 줘서 고마워. 나도 열심히 노력해 볼게! 그런데 저기… 주방장-!”

밖을 향해 커다란 목소리로 외치자, 문이 열리며 통통한 체형의 남자가 식탁 옆으로 다가왔다.

“부르셨습니까, 네리아 아가씨.”

“디저트로 먹게 복숭아를 가져와 줄래? 난 복숭아를 좋아해서, 코르를 먹고 입가심을 하고 싶거든.”

하녀 시절, 엔과 본관을 나서다가 사샤가 엠마를 가르치는 모습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늦어도 괜찮으니까 확실하게 외우면 돼. 레비 도련님은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다는 거 기억나지?’

나는 그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주방장, 번거롭지만 부탁해.”

“죄송합니다, 아가씨. 저택에는 복숭아가 없습니다.”

“그러면 시장에서 사 오면 안 돼? 요즘은 복숭아가 제철이라서 시장에 잔뜩 널려 있을 텐데.”

“잠깐, 주방-”

“그런 문제가 아니라, 레비 도련님께서 복숭아에 알레르기가 있어 저택에 아예 들이지를 않습니다.”

백작 부인이 뒤늦게 눈치를 채고 중간에 끼어들었지만, 주방장이 말하는 것이 더 빨랐다.

당연하게도,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이닝룸의 분위기가 변했다. 찬바람이 불기라도 한 것 같았다.

주방장은 갑자기 조용해진 분위기에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댔다.

“네리아 아가씨……? 다른 과일이라도 가져올까요?”

“아니, 괜찮아.”

복숭아 정도야 다이닝룸 안에서 대기하는 고용인에게 주문해도 됐을 텐데, 내가 왜 굳이 밖에 있는 주방장을 불렀겠는가.

방금까지의 대화를 들은 사람이라면 눈치껏 레비의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을 테니, 내부의 상황을 모르는 주방장을 호출한 것이다.

“그런데 레비에게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었구나. 머리를 다치고 그것도 잊어버렸나 봐.”

나는 처음 안 사실이라는 것처럼 순진무구하게 눈동자를 깜빡였다.

“그렇지만 잘됐다! 그럼 더더욱 복숭아를 가져오면 되겠네. 레비, 나랑 같이 도전하지 않을래? 나는 코르에, 레비는 복숭아에.”

“…….”

“의지를 갖고 함께 시도하면 약점 극복도 더 쉽게 할 수 있을 거야.”

“…….”

세 사람의 얼굴이 마치 썩은 복숭아처럼 변해 가는 가운데, 나 혼자 눈치 없이 해맑게 조잘거렸다.

입을 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약점, 의지, 극복. 이건 전부 라일라가 나에게 한 말이니, 반박해야 할 대상도 내가 아닌 그녀였다.

내가 코르를 먹고 괴로워할 모습에 신나서 레비한테 화살이 날아갈 줄은 몰랐겠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방긋대고 있는데, 멜비나 백작 부인이 이 상황을 수습하려는 듯이 엄한 목소리로 나를 타일렀다.

“네리아, 레비는 알레르기 이전에 과일을 싫어한단다. 싫어하는 사람에게 억지로 권하지 말렴.”

“그런가요? 레비, 편식해?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편식이야?”

애쓴 것 같은데 틀렸다. 편식도 너희들이 먼저 꺼낸 말이었거든.

“어? 방금 내가 한 말, 어디서 들었던 것 같은데 뭐였지? 어쨌거나 레비, 편식은 좋지 않아.”

백작 부인을 따라 나도 엄한 목소리로 레비에게 말했다. 이번에는 그녀도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음식 먹는데 입맛 떨어지게-!”

결국, 레비가 식탁을 거세게 내려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라일라, 제발 조용히 좀 먹자. 어? 저딴 거랑 같은 자리에 있는 것도 열 받는데 진짜 짜증 나게.”

레비가 포크와 나이프를 식탁 위에 던져 버리고는 밖으로 나갔다.

헤럴어를 몰라 대화에서 소외되고 이번에는 표적이 되기까지. 꽤 화가 난 것 같았다.

“레비! 라일라에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알다시피 네 동생은 장차 황태제비가 될 텐데-”

그리고 백작 부인이 레비를 꾸중하기 위해 그를 따라나섰다.

괴롭힘과 악의로 가득 차 있던 다이닝룸이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네리아, 너……!”

마지막으로 남은 라일라는 새빨개진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게, 후회할 거라고 했잖아.’

아니, 말은 안 하고 생각만 했었던가. 나는 웃음을 참으며,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듯이 두 사람이 빠져나간 곳을 바라보았다.

“어떡해? 실수했나 봐. 나는 레비랑 친해지고 싶었던 건데……!”

“…….”

라일라는 말없이 두 사람을 따라 다이닝룸을 벗어났다.

비로소 고요함이 찾아왔다.

“레비한테 미안해서 어쩌지?”

나는 울먹이면서도 포크를 들었다. 주방의 고용인들이 힘들게 만들었는데 남기면 아깝지 않겠는가.

“마지막으로 디저트입니다.”

다이닝룸에 유일하게 남아 있던 옛 동료 하녀가 재빠르게 내 앞으로 작은 접시를 가져왔다.

“잘 먹을게. 고마워.”

오늘 만찬의 디저트는 맛있고 부드러운 푸딩이었다.

***

“아가씨께서 데뷔탕트를요? 황궁의 수확제에서요?”

“응, 그렇게 됐어.”

“수확제는 한 달 뒤인데요?”

다음 날 오후, 사샤에게 소식을 전해 주었더니 이야기를 전부 들은 그녀가 난감한 듯 눈가를 찌푸렸다.

“속 보이는 수작이네요. 알고는 있었지만, 마님이 그 정도로 독한 분이셨을 줄은.”

“네리아 님, 안에 계신가요?”

사샤가 어처구니없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는데, 그때 바깥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듀이? 들어와.”

“네! 네리아 님, …어?”

듀이는 밝은 모습으로 들어왔다가, 방 안의 분위기가 가라앉은 걸 발견하고는 당황한 듯 허둥거렸다.

“부, 부르셨다고 들었는데…….”

“응, 불렀으니까 들어와.”

나는 그런 소년에게 신경 쓸 것 없다며 안쪽으로 손짓했다.

한편,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던 사샤는 듀이의 등장에도 개의치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열심히 준비하는 척하다가, 당일이 되면 아프다는 핑계로 불참하세요. 제가 가짜로 열이 나는 약을 구해 올게요.”

“아니, 난 수확제에 나갈 건데?”

“뒷말은 돌겠지만,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나가는 것보다는… 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수확제에 나갈 거라고.”

“…….”

당당하게 선언했다.

그러자 사샤가 잘못 들었냐는 듯이 눈을 깜빡였다. 그녀의 눈빛이 당혹스러움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가씨, 그렇게 간단하게 결정하실 문제가 아니에요. 예법은요? 드레스는요? 무도회의 춤은요? 동행하실 파트너는요?”

“뭐, 그거야.”

“첫인상은 평생을 따라다녀요. 그렇기에 귀족 영애분들은 몇 년에 걸쳐서 데뷔탕트를 준비하고는 하세요. 그런데 한 달이라니.”

사샤가 나를 설득시키기 위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절대 안 돼요. 일단은 기본적인 예법부터 익히시는 게 먼저예요.”

근처에서 듣고 있던 소년의 표정 역시도 같이 어두워졌다.

듀이의 경우, 뭐가 뭔지는 몰라도 사샤가 심각해 보이니 덩달아 심각해진 것 같기는 했지만.

“내가 그런 것도 모르고 수확제에 나간다고 했을까 봐?”

나는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여유롭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잘 봐. 우선 예법.”

비록 다른 세계일지언정, 몇백 년의 역사를 이어 온 다리스 제국의 전통적인 예법은 변하지 않는다.

“네리아 발렌티스가 제국의 주인을 뵙습니다. 다리스에 영광이 있기를.”

나는 실내용 원피스를 두 손으로 들어 올리며 무릎을 굽혔다. 원래 세계에서는 완벽에 가깝다는 찬사를 받아 온 인사법이었다.

“…….”

“우와…….”

유명한 말이 있다.

기사의 실력은 검을 허공에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고, 귀족의 예법 수준은 인사를 하는 자세만으로도 파악할 수 있다고.

사샤가 눈을 크게 떴고 듀이는 작게 감탄사를 흘렸다.

“어때? 쓸 만해 보여?”

듀이는 그렇다 쳐도, 레비를 따라다니며 많은 귀족을 봐 온 사샤에게는 ‘보는 눈’이 있을 터였다.

그런 사샤가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나는 예법의 살아 있는 교본이라고 불리는 캐롤린 부인에게서 가르침을 받았으니까.’

캐롤린 부인은 제자를 받지 않기로 유명했지만, 부모님이 자선 사업을 펼치는 동안 인연이 닿아 어렵게 모실 수 있었던 스승이었다.

“어떻게 하신 거예요? 설마 어릴 때 배우셨던 지식을 지금까지?”

“어떻게, 라고 할 것도 없어. 이 정도는 기본 중의 기본 아니야?”

“…….”

“다음으로 드레스는 백모님이 의상실에서 사람을 불러 놨다고 해.”

말이 의상실이지, 경력도 실력도 없는 디자이너를 불렀을 수도 있으나 일단은 기다려 보기로 했다.

어차피 여기서도 드레스를 구할 방법은 많으니까.

“그리고 춤도 괜찮아. 난 어떤 춤이라도 전부 출 수 있거든.”

“맙소사……? 설마, 그동안은 때를 노리며 일부러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행동하신 거예요?”

사샤의 눈에 존경심이 깃들었다. 마치 희대의 천재를 쳐다보는 눈빛이었다.

‘사실은 전부 노력의 산물이지만.’

그렇다 한들 평행세계에서 배웠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그녀의 감탄을 웃어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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