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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셀프입니다 (29)화 (29/172)



<29>

기사 시험은 황가에서 주관하는 것으로, 1년에 한 번씩 치러진다.

합격하기만 한다면 준귀족의 지위와 함께 큰 명예를 얻지만, 황가의 이름으로 보증하는 지위인 만큼 아무나 뽑지 않는다.

그렇기에 단순히 무력이 강한 것만으로는 기사가 될 수 없다.

필기시험을 통해 기사라는 자리에 어울리는 소양을 가졌는지를 함께 평가하는 것이다.

하지만-

“필기시험은 어려워 보여도, 준비만 잘하면 쉬운 시험이야. 나오는 문제가 매년 거기서 거기거든.”

시험 응시에 신분 제한이 없는데도, 귀족과 평민의 합격률 차이가 크게 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러니 출제 경향만 잘 파악한다면 듀이가 다음 시험에 합격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이것들을 알고 있는 이유는 루이케 때문이지.’

나는 평행세계에 있을 그리운 남동생의 얼굴을 떠올렸다.

워낙 공부를 싫어해서 가정교사가 오면 도망치던 아이였기에, 누나인 내가 직접 가르치겠다고 두 팔 걷고 연구했던 것이었다.

“듀이도 글을 읽고 쓰는 건 할 수 있잖아? 내가 속성으로 가르칠 수 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여기서 헤어질까?”

“예, 아가씨! 이놈은 제가 데려가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을 격려하고는 다시 본관으로 돌아갔다.

‘방으로 가면 듀이의 공부 계획도 같이 세워야겠어.’

듀이가 번듯한 기사 작위를 받아 두 번 다시는 남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것이 가장 큰 목적이었으나 듀이의 성공은 곧, 주인인 나의 성공이자 업적이 되기도 했다.

강한 무력을 가지게 되는 것도 그렇지만, 귀족이 훌륭한 기사를 데리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명예와 위상을 드높일 수 있으니까.

두 사람 모두를 위한 일인 만큼 공을 들여야 할 필요가 있다.

나는 머릿속으로 계획표를 세우며 본관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러고는 내 방이 있는 2층에 도착했을 때였다.

“라일라?”

“네리아?”

마침 복도에 나와 있던 라일라를 마주쳤다. 그녀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사정없이 미간을 구겼다.

줄곧 아랫사람이라 여기고 있던 나에게 이름이 불려 상당히 자존심이 상한 것 같았다.

하지만 라일라의 얼굴에 금방 미소가 그려졌다. 그녀는 웃는 얼굴로 나에게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인사가 늦었지? 사촌 자매가 생겨서 기뻐. 앞으로 잘 지내 보자.”

“고마워, 라일라. 나도 기뻐.”

“그동안 너에게 심한 짓을 한 적도 있었지만, 그때는 네가 가족인 걸 몰랐었잖아? 너도 이해하지?”

8년간의 괴롭힘을 몰랐다는 말 한마디로 대신하다니. 심지어 미안하다는 말조차 없었다.

참으로 뻔뻔하기 그지없는 행동이었지만, 이해하지 않겠다고 날뛰어 봤자 귀족답지 않다고 비웃음거리가 될 뿐이다.

그랬기에 나는 해맑게 웃으며 그녀가 가장 듣기 싫어할 법한 말을 해 주기로 했다.

“당연히 이해해! 어차피 지금은 너나 나나 똑같은 귀족이잖아? 이제부터라도 잘 지내면 되지.”

그렇게나 업신여기던 내가 지금은 너와 똑같은 위치가 되었어! 이제 너는 나랑 동급이란다!

내가 그 사실을 상기시키며 무해한 미소로 라일라를 살살 긁어 주었더니 그녀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외면하고 싶었을 사실에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것이 여기까지 느껴졌다.

“그래, 잘 지내자. 하지만 넌 8년을 평민으로 지냈잖아? 공부나 예법같이 배워야 할 게 많을 거야.”

같은 귀족이라도 지식이나 예법이 부족한 나는 그녀와 절대 같지 않다. 그런 의미였다.

그렇지만 교양도 예법도 예전 세계에서 전부 완벽하게 익혀 온 나에게는 타격이 되지 않았다.

“응! 그래야지.”

“…….”

여전히 해맑게 웃었더니, 라일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구겨진 표정을 지었다.

“…열심히 해.”

결국, 먼저 자리를 뜨게 된 것은 라일라 쪽이었다.

이제 나는 평민이 아니기에 예전처럼 물리적으로 굴욕을 주는 방법은 쓸 수 없다.

여러모로 짜증은 나는데도 말로는 공격이 통하지를 않으니 아예 자리를 피해 버린 것이었다.

“잘 가! 또 만나자, 라일라!”

라일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피식 웃다가 나 역시도 발걸음을 옮겼다.

방으로 도착하니, 이번에는 나를 기다리고 있던 사샤가 소식을 전해 주었다.

“마님께 전언이 있었어요. 아가씨께 전할 말이 있으니, 오늘 저녁에 다이닝룸에서 식사를 함께 들자고 하셨어요.”

“전할 말이라고?”

뭐든 좋은 의도는 아닐 터였다.

하지만 짐작 가는 바가 있기는 했다. 나는 멜비나 백작 부인이 지나가듯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조만간 널 사교계에 소개할 생각이란다.’

과연 어떨지. 나는 기대가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

저택 1층 다이닝룸에 레고트 가주를 제외한 직계 가족 셋과 나까지, 네 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네 사교계 데뷔가 정해졌어! 바로 황궁의 수확제란다!”

그곳에서 백작 부인이 말했다.

역시 그거였군.

“황궁의 수확제요?”

“그래. 황족분들과 수도의 거의 모든 귀족이 모이는 큰 행사야. 기대되지 않니?”

나는 전채 요리로 나온 훈제 연어를 먹다 말고, 당황한 척 포크를 떨어트렸다. 일부러 예법을 모르는 척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수확제는 한 달 뒤가 아닌가요? 저는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요.”

“그게 뭐가 문제니? 사교계에 처음 데뷔하는 영애들이 미숙한 모습을 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야.”

당연하기는 무슨.

네리아는 8년을 하녀로 살았다. 귀족 예법에 미숙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무지한 상태일 터였다.

그런데 귀족가의 파티도 아니고, 황족도 참석하는 대규모 행사에서 평민이나 다름없는 모습을 보인다?

가십을 노리는 승냥이 떼의 표적이 되어 크게 망신을 당하고 두 번 다시 사교계에 출입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예법을 익힐 충분한 시간조차 주지 않고 데뷔탕트를 치르게 한다니.

나를 귀족 사회에서 아예 매장해 버릴 그들의 비열한 수작이었다.

‘하지만, 나한테는 안 통하지.’

유감스럽게도 나는 너희가 알고 있는 네리아가 아니거든.

그들의 공격은 나에게 공격이 아니다. 오히려 백작 부인이 그 말을 꺼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에게 사교계 데뷔는 무덤이 아닌 기회니까.

데뷔탕트는 제국의 귀족이라면 무조건 거쳐야 할 의무이자 절차였다.

데뷔탕트를 치른 뒤에야 독자적으로 사교계 모임에 참석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린 귀족이 모임에 참여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부모나 후원자를 동반했을 때나 가능하다.

‘그런 고로, 지금의 나는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지.’

발렌티스 가문 내의 권력은 가주 내외가 틀어잡고 있고, 나를 사교계 모임에 데려다줄 사람도 없다.

그러니 나에게는 하루라도 빨리 데뷔탕트를 치르는 것이 유리했다.

황족이나 외부 귀족과 교류를 쌓으며 나 스스로의 입지와 영향력을 키워 나갈 수 있도록.

게다가 수확제는 황족과 많은 귀족이 모이는 자리인 만큼, 양질의 연줄을 만들 좋은 무대였다.

‘수확제의 ‘페어 레이디’까지 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것까지는 어렵겠지.’

이런 내 생각을 알지도 못하는 백작 부인은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귀족이 사교계에 데뷔하는 나이가 보통 15~16살이란다. 넌 17살이니 시기를 더 늦출 수는 없어.”

“…….”

“네리아, 이건 다 널 위한 결정이야. 왜 대답이 없니? 싫으니?”

싫을 리가 있나. 하지만 ‘네리아’가 이 상황에서 태연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내가 여기서 자신감을 보였다가는 이를 수상하게 여긴 백작 부인이 내 사교계 데뷔를 취소시킬 수도 있다.

어쨌거나 내 데뷔탕트에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건 보호자인 그녀였으니.

“아, 아뇨. 싫은 게 아니라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랬기에 일부러 머뭇대며 당황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맞은편에 앉아 있던 라일라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머니가 바쁘신 중에도 널 챙겨 주신 건데 반응이 왜 그래?”

아까 복도에서 그런 식으로 퇴장하더니 나에게 보복할 기회를 벼르고 있기라도 한 걸까?

나를 괴롭힐 수 있는 소재가 생겨 신이 난 모양새였다.

“어머니는 네 이름을 데뷔탕트 명단에 넣으려고 일부러 황궁까지 다녀오셨어. 그런 무례한 태도는 옳지 않아.”

“아냐, 당연히 감사드리고 있어!”

“그럼 두루뭉술하게 굴지 말고 알겠다고 말씀드려.”

“으응…….”

“발렌티스의 일원이라면 누구라도 마땅히 해내야 할 일이야. 너, 설마 귀족의 의무를 다하지 않고 권리만 누릴 생각인 건 아니지?”

“라일라, 그만하렴.”

이번에는 멜비나 백작 부인이 끼어들었다.

“네리아가 당황하고 있잖니. 사촌끼리 사이좋게 지내야지.”

“어머니도 참. 저도 제 사촌 자매와 사이좋게 지내고 싶으니까 이런 충고를 하는 거예요. 오냐오냐 감싸기만 하는 건, 장기적으로는 네리아를 망치는 길이라고요.”

“어머나, 그랬어? 내 딸은 생각이 깊기도 하지!”

잘들 논다.

사이좋게 야단법석을 떠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냥 웃음이 나왔다.

“그렇지만 전 드레스도 없고 같이 갈 파트너도 없는걸요.”

“드레스는 내가 선물하마! 이미 의상실에서 사람을 불러 놨단다. 널 위한 예법 교사도 같이 말이지. 그리고 네리아의 파트너는… 레비가 해 주면 되지 않겠니?”

“싫습니다. 선약 있습니다.”

백작 부인의 말에 곧바로 대답이 튀어나왔다. 내가 아니라 내 옆에서 고기를 썰고 있던 레비였다.

그는 나와 엮인 것에 노골적으로 역겹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곳에 떨어졌던 첫날, 레비에게 배를 걷어차였던 일을 아직도 기억한다. 내가 더 역겨웠는데, 그가 먼저 거절해 줘서 다행이었다.

“흠, 레비가 선약이 있다면 가문의 기사와 함께해도 좋겠구나.”

“…네, 백모님.”

나는 마지못해 긍정한다는 듯이 우울한 몸짓으로 포크를 들었다.

물론 속으로는 오랜만에 먹는 질 좋은 식사의 맛을 음미했다. 하지만 이런 내 모습이 안쓰럽게 보이기는 했던 걸까.

근처에서 대기하던 옛 동료 하녀가 내 잔에 물을 따라 주었다. 나를 위로해 주려는 무언의 행동이었다.

‘고마워.’

“아까 저한테 얼마나 주제넘게 굴던지. 수확제에서 제대로 망신을 당해 봐야 정신을 차리겠죠.”

그런데 문득, 라일라에게서 들리는 이질적인 언어에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저런 게 귀족은 무슨. 아까는 심지어 하인 따위를 전담 기사로 붙여 달라고 했다면서요?”

“그래. 아까 그 부탁을 하러 네 아버지의 집무실에 왔다더구나.”

“맙소사, 천박하기도 해라!”

“어쩌겠니. 평민이나 다름없는 아이가 별수 있겠어?”

백작 부부와 라일라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이건… 헤렐 왕국어?

라일라는 내가 의아해하는 것을 보고서는 웃는 낯으로 설명했다.

“사실, 우리는 교양을 위해 식사 자리에서 외국어로 대화하거든. 네리아도 어서 헤렐어를 익혀서 대화에 참여할 수 있길 바랄게.”

“으응, 알겠어.”

사람을 불러 놓고서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외국어로 대화해서 상대에게 수치심을 주는 것.

사교계에서 종종 사용되는 괴롭힘의 일종이었다.

헤렐어쯤이야 13살에 이미 완벽하게 습득했으나 백부 가족이 그 사실을 알 리가 없으니.

‘그런데 그런 것치고는 정작 레비가 못 알아듣지 않아?’

나는 맞은편 옆에서 묵묵하게 음식을 씹는 레비를 바라보았다.

“…….”

이 가족은 도대체가? 겨우 나에게 모멸감을 준답시고 가문의 후계자까지 소외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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