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식사가 끝난 뒤에는 사샤가 내 심부름을 다녀왔다.
“아가씨, 다녀왔습니다. 그레이 경과 듀이를 데려왔어요.”
그녀의 등 뒤로 키 차이가 나는 남자의 머리 둘이 솟아 있었다. 반가운 얼굴들이었다.
나는 환영하는 기분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하녀가 정해졌으니 다음은 기사를 확정할 차례였다.
“그럼 백부님에게 다녀올게.”
나는 사샤에게 인사하고는 그레이 경과 듀이를 데리고 방을 나섰다.
“우리 아가씨, 늦었지만 신분을 되찾으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려요, 네리아 님!”
금방이라도 감동의 눈물을 쏟을 것만 같은 그레이 경과 기쁨으로 붕붕 뛰고 있는 듀이.
나는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며 기분 좋게 웃었다.
“이제 시작인걸요. 그보다 두 사람이 그동안 고생 많았죠?”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레이 경과 듀이는 지금까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새벽에 훈련을 해 왔다.
낮에는 맡은 일을 해야 하니, 밤잠을 줄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고생은요. 남는 게 체력인데요.”
“저는 스승님께 검을 배우는 게 즐겁기만 했어요.”
말은 저렇게 하지만, 피곤하지 않을 리가 없지.
듀이가 견습 기사로서 정당하게 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하루라도 빨리 하인 업무를 그만두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네리아 님, 정말 가주님께서 허락해 주실까요?”
“해 줄 거니까, 듀이는 걱정하지 말고 뒤에서 지켜보고 있어.”
나는 자신만만한 말투로 소년에게 장담하고는, 레고트 백부의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누구냐?”
“백부님, 저 네리아입니다.”
“…….”
“백부님?”
“…들어와라.”
노크한 지 한참이 지나서야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백부의 목소리에 짜증과 성가심이 한가득 섞여 있었다.
“듀이와 아저씨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내가 부르면 들어와요.”
두 사람에게 그렇게 일러두고는 문을 열자, 집무실 안에 레고트 백부와 새로운 집사가 있었다.
“백부님을 뵙습니다. 오늘도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이에요.”
“무슨 일로 왔느냐.”
당연한 말이지만, 백부는 나를 반겨 주지 않았다.
그의 눈빛에서 ‘내가 너 따위를 상대해야 한다니.’와 같은 감정이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모르는 척 생글생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귀족이 되었으니, 저에게도 전담 호위 기사가 필요할 것 같아서요.”
“전담 기사? 가지가지 별…….”
레고트 백부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그가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일갈했다.
“네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해 줄 것이니 돌아가! 나는 바쁜 몸이니 별것도 아닌 이따위 일로 나를 찾아오지 말아라.”
“그렇지만 제가 꼭 호위로 데려오고 싶은 분이 있어서요.”
“버릇없는 것! 내가 방금, 분명히 알아서 해 줄 거라고 말했-”
“그레이 경, 들어와요!”
백부의 말을 끊어 버리고는 문 너머를 향해 외쳤다.
그러자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그레이 경이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레고트 가주님을 뵙습니다.”
“자네는?”
그레이 경을 발견한 백부의 얼굴이 초 단위로 시시각각 변했다.
처음은 의외, 다음은 놀람과 분노, 마지막은 업신여기는 조소였다.
“그레이 경? 카터의 딸을 지키고 싶은 마음은 알겠다만, 자네는 누구의 전담 기사도 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지 않았나? 이제 와서 이러면 내가 많이 곤란해.”
“저기, 백부님, 제가 말씀드린 사람은 그레이 경이 아니에요. 듀이! 안으로 들어올래?”
이번에는 듀이가 쭈뼛쭈뼛 어색한 걸음으로 집무실로 들어왔다. 백부의 눈이 찌푸려졌다.
“저 애는 누구야?”
“가주님. 몇 년 전에 가문의 목걸이를 훔쳤다가 붙잡힌 아이입니다. 백작가와 무보수로 종신 근로 계약을 맺었는데 기억하십니까?”
“오, 그래. 몇 년 전에 그런 일이 있었지. 나도 기억나는군.”
새 집사가 나를 대신해서 설명하자 백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저 애는 왜 데려왔어?”
“듀이를 제 호위로 삼고 싶어서요. 지금은 기사가 아니지만, 검을 가르쳐서 정식으로 기사 시험을 치게 하면 되지 않을까요?”
“뭐라고? 저렇게 비실비실한 애를 굳이 호위로 쓴다고? 왜?”
레고트 백부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표정을 찡그렸다.
“가주님, 그것은.”
새 집사가 그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설명했다. 딱히 숨기려는 내용은 아니었는지 말소리가 나에게까지 다 들렸다.
“친분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네리아 아가씨께서 하녀 시절에 저 아이와 가깝게 지내셨거든요.”
“그래? 어디 보자.”
백부가 듀이의 전신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 시선에 듀이가 몸을 움츠렸고, 백부는 알 만하다는 듯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제대로 보니 저 아이가 얼굴이 곱상하니 잘생겼구나. 네리아. 네 나이가 올해 열여섯이었던가?”
“열일곱이에요.”
“흠. 너도 마음에 둔 사람을 곁에 두고 싶겠지. 나쁘다는 건 아니다! 그 나이 대 아이들이 다 그렇지.”
멍청한 것. 백부가 나를 보는 눈빛 속에 그런 비웃음 담겨 있었다.
내가 듀이를 좋아하기 때문에, 사심으로 능력도 없는 사람을 호위로 앉히려고 한다.
백부가 그렇게 오해하고 있었으나 나는 정정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해 주면 나야 고마우니까.
“그럼 허락해 주시는 건가요?”
“그래, 허락하마.”
“그리고 혹시… 듀이를 여기 계신 그레이 경께 검을 배우게 하고 싶은데 그것도 가능할까요?”
“좋다! 조카가 부탁하는데 내가 그 정도도 못 들어주겠느냐.”
“감사합니다, 이래서 가족이 좋은 거였군요!”
“허허, 당연한 말을 하는구나.”
그와 내가 마주 보며 서로 만족스럽게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듀이를 견습 기사로 빼 오는 일은 처음부터 자신이 있었다.
나에게 정식 기사를 붙이기보다 그편이 훨씬 편하고 값싸게 먹히니까. 되레 나보다 백부가 더 환영할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순순히 그레이 경을 듀이의 스승으로 붙여 줄까?
그 부분은 확신이 없었다. 그랬기에 일부러 그레이 경을 먼저 집무실에 들어오게 한 것이다.
‘그레이 경을 내 전담 호위로 삼으려고 한다.’라는 처음의 오해와 비교하면, 그가 듀이에게 검을 가르치는 것 정도는 별것도 아닌 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상대적인 효과였다.
‘자, 그러면 마무리까지 확실하게 끝내도록 해야지.’
나는 백부와 함께 한바탕 신나게 웃은 뒤, 곤란한 듯 입을 열었다.
“백부님, 그런데 범죄자는 기사가 될 수 없잖아요?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까요?”
“걱정할 것 없어. 집사, 저 아이와 쓴 계약서가 있을 텐데, 찾아와.”
“알겠습니다. 그런데 서류의 위치를 몰라서 시간이 걸릴 수가-”
“말할 시간에 가져와! 이래서 예전 집사가 없으니 불편하군.”
백부가 쯧쯧 혀를 차며 나에게 다가왔다. 그는 짐짓 좋은 어른인 척, 인자한 얼굴로 나에게 설교했다.
“네리아, 한 가지 미리 일러둘 것이 있다. 한 번 전담 기사를 정하면 다시 바꿔 줄 수는 없어.”
“네, 백부님.”
“너는 이제 귀족이고, 귀족이 내리는 결정의 무게는 가볍지 않아. 나중에 마음에 안 드니까 바꿔 달라느니, 그런 변덕을 부리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겠니?”
“물론이에요! 약속할게요!”
변덕을 부릴 리가 있겠나. 백부는 흡족한 듯 내 어깨를 두드렸다.
“가주님, 계약서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마침 집무실을 나섰던 집사가 돌아왔다. 서류의 위치를 모른다더니 의외로 금방 발견한 모양이었다.
“네리아. 자, 받거라.”
백부는 집사에게 서류를 받자마자 나에게로 곧장 내밀었다.
“저 아이가 도둑질의 대가로 손목을 잘리는 대신 백작가에서 무보수로 일하겠다는 내용을 쓴 협약서란다. 이 문서가 없으면 저 아이가 도둑이라는 사실도 없어지는 거지.”
“아하, 그렇군요.”
냉큼 문서를 받아 왔다. 백부는 내가 다시 계약서를 돌려주기라도 할까 봐 서둘러 서류에서 손을 뗐다.
백부와 나의 마음이 통하는 순간이었다. 또다시 웃음이 나왔다.
돈으로도 구할 수 없는 보물을 버리는 바보 같으니라고.
“그럼 나는 이제 일을 해야 하니, 너희는 이만 돌아가려무나.”
“네, 무리하지 마시고요.”
“어서 나가렴.”
그렇게 백부를 찾은 셋은, 바쁘다는 그에게 반쯤 쫓겨나다시피 하여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손에는 전리품을 가지고서.
나는 그레이 경과 듀이를 돌아보며 씩 웃었다.
***
“똑같은 내용이 두 장. 듀이, 자세히 확인해 봐, 확실해?”
“네, 확실해요. 예비용까지 두 장에 서명했거든요.”
“좋아, 이걸 없애면 되겠구나. 아저씨, 불을 부탁해요.”
저택의 구 훈련장 근처.
그레이 경이 부싯돌을 부딪치자 불꽃이 일어났다. 나는 들고 있던 서류를 소년에게 내밀었다.
“듀이, 네 손으로 직접 태워.”
“네!”
종이에 불을 붙이자, 노예 계약서나 다름없는 서류 두 장이 재가 되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종신 계약으로 백부에게 묶여 있던 듀이가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되는 순간이었다.
“저, 아직도 믿기지 않아요.”
듀이는 금색 눈동자를 느릿느릿 깜빡이며 땅으로 떨어진 검은 재를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동안 고생 많았지?”
기쁨과 위로의 마음을 담아 소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자, 듀이가 거의 반사적으로 헤실헤실 웃었다.
“감사합니다, 네리아 님.”
“응. 오늘부터는 견습 기사야.”
“그래! 이제 허락도 받아 냈겠다, 거칠 것도 없으니 오늘부터는 훈련 강도를 제대로 높여 보자!”
“네, 스승님!”
사이좋게 의욕을 불태우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런데 아저씨가 보셨을 때 듀이는 어떤가요? 다음 기사 시험에 붙을 수 있을 것 같나요?”
“실기는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실기 시험의 과제가 마수를 잡는 것인데, 지금도 저놈 혼자서 하급 마수 서넛은 때려잡을 겁니다.”
그레이 경의 칭찬에 듀이가 수줍은 듯이 헤헤 웃었다.
“문제는 필기시험인데요.”
하지만 이어진 말에 소년의 표정이 침울하게 변했다. 그 급격한 변화에 풉 웃음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