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누구세요?”
“네리아 아가씨!”
“비비?”
익숙한 목소리였다.
나는 읽고 있던 아버지의 일기장을 서랍 안에 넣어 두고는 환영하는 기분으로 문을 열어 주었다.
“들어와!”
“실례하겠습니다.”
비비의 손에는 디저트가 올려진 트레이가 들려 있었다. 귀족들이 오후에 먹는 간식이었다.
“나까지 챙겨 준 거야? 고마워!”
그녀는 테이블에 차와 쿠키를 내려놓고는 초롱초롱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궁금한 게 많겠지? 비비에게 맞은편 자리를 권하자, 그녀는 거절하지 않고 냉큼 의자에 앉았다.
“네리아 님에게 간식을 가져가겠다는 지원자가 많아서 제비를 뽑아야 했어요. 제가 당첨됐어요!”
“제비뽑기까지 했다고?”
나는 비비의 이야기를 들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같이 일하던 동료 하녀가 하루 만에 모셔야 할 아가씨가 되었다.
그 사실에 거부감을 느끼지는 않았을까?
그런 염려를 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비비는 친구에게 생긴 좋은 일을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바깥이 시끄럽지?”
“아무래도요. 집사님과 하녀장님이 그렇게 되셨으니……. 그래도 네리아 님이 원래 신분을 되찾은 건 다들 축하하고 있어요.”
“정말? 불편해하지는 않았어?”
“전혀요. 실은 직감이라고 할까요? 네리아님과 가까워지면서부터, 저희와는 다른 분인 것 같다고 내심 생각하고 있었-”
“네리아? 방에 있니?”
그때였다. 비비와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노크도 없이 방문을 열어젖힌 사람이 있었다.
“마님?”
멜비나 백작 부인이 문 앞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그녀는 내 방 테이블에 놓인 디저트를 못마땅하게 쳐다보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리아에게 용건이 있으니 너는 이만 나가 보렴.”
“알겠습니다, 마님.”
그녀는 말 한마디로 비비를 쫓아내고는 방 안으로 들어왔다. 등 뒤에 사샤와 로이엔 경을 대동하고서.
‘로이엔 경이 내가 알려 준 대로 대화를 잘 마쳤나 보군.’
나는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사샤와 로이엔 경이 백작 부인의 뒤에서 그녀 몰래 나에게 눈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백모님! 어서 들어오세요!”
“날 반겨 줘서 기쁘구나.”
멜비나 백작 부인이 온화한 미소를 띠고는 나에게로 다가왔다. 나는 모르는 척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
“잠은 잘 잤니? 잠자리가 바뀌었는데 간밤에 불편하지는 않았어?”
“네, 백모님 덕분이에요.”
“그래? 네가 편했다고 하니, 방은 이곳을 계속 쓰면 되겠구나.”
손님방을 정식 거처로 내주면서, 원인은 나에게로 돌리는 화법에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예상한 범위 내긴 했다.
결정권자는 안주인인 그녀다. 눈엣가시 같은 나에게 직계 가족이 쓰는 좋은 방을 내줄 리 없지.
“별관보다 여기가 훨씬 낫지?”
“물론이에요, 백모님!”
그러나 나는 흔쾌히 대답했다.
나로서는 지내기에 불편하지도 않을뿐더러, 어차피 손님방에 오래 머무를 생각도 없으니까.
백작 부인은 고분고분한 내 태도에 만족해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네리아가 기뻐하니 나도 좋구나. 그리고 백작가의 재무 담당자와 상의해서 네게 줄 예산을 정했단다.”
그녀가 나에게 숫자가 적힌 종이를 내밀었다. 누구 코에 붙이겠나 싶을 만큼 적은 금액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예상 범위 내.
“네가 원할 때마다 언제든지 편하게 받아 가면 된단다.”
“세상에나! 저를 친딸처럼 보살펴 주신다더니, 진심이셨군요! 정말이지 백모님은 보통 사람에 비해 씀씀이가 남다르신 것 같아요!”
“…….”
순간적으로 백작 부인의 표정이 무너졌다. 그녀가 미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진심인가, 아니면 비꼬는 것인가. 내 속마음을 가늠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흑심 따위는 없다는 듯이 행복하게 웃으며 물었다.
“백모님? 갑자기 왜 그러세요?”
“…아무것도 아니란다.”
그녀는 찝찝한 것 같으면서도 나에게서 다른 속내를 발견하지 못한 건지 애매하게 시선을 거뒀다.
“마음 같아서는 더 많은 금액을 지원하고 싶었지만, 널 걱정해서 그런 결정을 내린 거란다. 너도 니나렛 황녀 전하를 알고 있지?”
“네?”
“5년 동안 별궁에 유폐되다시피 하다가 반년 전에 황족으로 복권된 분 말이야.”
“아… 니나렛 황녀님이요.”
“그래, 그분. 죄인처럼 지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황녀로 떠받들어지니 성격이 엇나가고 말았지. 아직 9살이신데 사치에 패악질에…….”
백작 부인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며 고개를 저었다.
“너도 그분처럼 하루아침에 귀족이 된 것이잖니? 갑작스러운 신분 상승에 절제를 모르고 졸부처럼 천박해질까 봐 염려됐지.”
“네, 그러셨군요.”
“아무튼 이게 다 널 위한 일이야. 나는 너에게 절약하는 방법을 알려 주고 싶었던 거란다.”
퍽이나.
나한테 돈 쓰기 싫다는 소리를 길게도 늘려서 말하는군.
그렇지만 어차피 저들에게 제대로 된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나에게 돈보다 필요한 건, 백작 부인이 이미 본인의 손으로 곱게 가져왔으니까.
“절 생각하는 백모님의 마음에 눈물이 다 날 것 같네요! 그런데 데려오신 하녀는 혹시……?”
그녀의 뒤로 힐끗 시선을 던졌다. 사샤와 나는 눈을 마주치면서도 모르는 사이처럼 표정을 관리했다.
“그렇지! 내가 너에게 주는 선물이란다. 사샤, 이리 오렴.”
백작 부인의 부름에 사샤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사샤가 누구인지는 너도 알지?”
“레비의 전 직속 하녀 아닌가요?”
“맞아. 후계자의 보좌를 맡았던 만큼 아주 우수한 아이지. 원래는 라일라에게 줄 예정이었지만, 네리아의 하녀로 붙여 주려고 해.”
“우와, 정말이신가요?”
“그래. 라일라에겐 미안하지만, 겨우 찾은 조카에게 좋은 것만 해 주고 싶은 것이 내 마음이잖니.”
그녀가 대단한 은혜라도 베푸는 양 선심 쓰듯 사샤를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너무나도 기뻐요!”
“조만간 널 사교계에 소개할 생각이란다. 사샤가 널 도와줄 테니, 너도 어서 발렌티스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일원이 되길 바라마.”
백작 부인이 그렇게 말을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예산에 관한 건, 재무 담당자인 로이엔 경을 데려왔으니 궁금한 걸 물어보도록 하렴.”
“네, 그렇게 할게요!”
백작 부인이 방에서 퇴장한 후, 사샤에 의해 달칵 문이 닫혔다.
이제 내 방에 남은 사람은 나와 사샤, 로이엔 경까지 셋이었다.
“친절하시네. 이야기 나누라고 이렇게 자리까지 만들어 주시고.”
나는 두 사람을 테이블에 앉히고는 사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백모님이 너한테 따로 다른 말은 안 했어?”
“‘눈치껏’ 하면 된다고 하셨어요. 나중에 저를 라일라 아가씨의 직속으로 보낼 수도 있다면서요.”
“그래? ‘눈치껏’ 하면 되겠네.”
쿡쿡 웃으며 우선은 일이 잘 풀린 것에 만족했다.
원래라면 내가 원하는 하녀를 데려오기 위해 상당히 번거로운 방법을 써야 했을 터였다.
하지만 그 대상이 다른 사람도 아닌 사샤이기에 의외로 쉽게 작전이 통했다.
나에게는 푼돈밖에 안 쓴 주제에, 밖에 나가서는 조카에게 좋은 하녀를 붙여 줬다고 떵떵댈 모습이 눈에 선하기는 했지만.
“그보다, 로이엔 경. 발렌티스 가문의 상황에 대해 알려 주세요.”
자세를 고치며 그에게 물었다.
하녀로 지내면서 들은 이야기는 많지만, 가문의 내부인에게 직접 듣는 이야기만큼 확실한 건 없다.
“상황이라면 그저 그렇습니다. 아시다시피 가주가 무능하기에.”
내 질문을 받은 로이엔 경은 커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카터 님이 일궈 놓은 사업을 죄다 말아먹기만 하질 않나. 선대 가주님께서 차남이신 카터 님을 후계자로 삼은 이유가 있습니다.”
맞는 말이었다. 레고트 백부 본인과 그 가족만 인정하지 못했을 뿐.
그리고 그가 구체적으로 설명한 발렌티스의 재정 상황은 예전 세계에 비교하면 암담할 정도였다.
“어떻게 황금 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모조리 갈라 버릴 수가 있죠? 그것도 재주라면 재주겠네요.”
평행세계의 내 부모님이 아셨다면 피눈물을 흘리셨을 것 같다.
“가문의 평판도 카터 님이 계시던 시절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그나마 수도에서 떵떵댈 수 있는 것도 란타나 님과의 관계 때문이죠.”
란타나 님?
신경 쓰이는 이름이 들렸기에 나는 그에게 질문을 고쳐 물었다.
“경, 예전부터 계속 궁금했었는데, 대체 란타나 님이 누군가요?”
“황제 폐하의 디르케(정부)입니다. 폐하의 총애를 기반으로 황궁에서 대단한 권력을 잡고 있어요.”
로이엔 경은 백부와 란타나가 오랜 시간 협력 관계를 맺어 왔다고 설명을 덧붙였다.
“그 보상이라고 할까요? 란타나 님이 라일라 님을 황태제비 후보로 강력하게 추천하고 계시거든요.”
“백부님이 무능한 것에 비해서 가문 내의 입지가 견고한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군요.”
“정확히 그렇습니다. 가주님은 혹시라도 다른 사람에게 그 자리를 뺏기지 않기 위해 그분에게 자주 뇌물을 바치고 있기도 하지요.”
나는 로이엔 경의 설명을 전부 듣고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디르케 란타나.
이곳에 온 뒤로 자주 들을 수 있었던 이름이었다.
검은색 머리카락에 분홍색 눈동자를 가진,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미인이라고 했다.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란타나’는 내가 있던 세계에서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분홍색 눈도, 제국 최고의 미인이라는 호칭도 원래 세계에서는 어머니와 나의 상징 같은 것이었는데.’
대체 어떤 사람일까?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호기심이 생겼다.
‘조만간 나도 사교계에 편입될 테니, 머지않아 만나게 되겠지만.’
***
백부네가 나에게 돈을 쓰기 싫어한다는 사실 정도는 멜비나 백작 부인이 확실하게 가르쳐 줬다.
“그런데 먹는 것에서도 차별을 둘 줄이야.”
나는 내 방 테이블에 놓인 음식들을 미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녀 시절에 먹던 것보다는 나았지만, 저택에서 귀족인 백부 가족이 먹는 것보다는 빈약했다.
사샤가 알아본 정보로는, 새로운 하녀장이 손을 썼다고 했다.
저택의 하녀들에게 허락 없이는 나에게 무언가를 줘서는 안 되고, 말을 걸지도 못하도록 명령했다고.
식사도 트레이에 올린 뒤, 하녀장에게 최종 허락을 받은 뒤에야 나에게 가져올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치졸한 인간들.
‘비비가 간식을 들고 나를 찾아왔을 때 백작 부인이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더니.’
물론 음식도 그렇지만, 저택에서 나를 고립시키겠다는 의도였다.
원래는 나와 친한 하녀들을 쫓아내려고 했지만, 그러기엔 너무 많은 고용인을 잘라 내야 하기에 저택의 업무가 마비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이런 방법을 쓴 건 아니었을까? 나와 사샤의 추측이었다.
“식사도 괴롭힘의 한 방법인 것 같지만, 돌 같은 빵도 맛있게 먹었던 나에게는 딱히… 응?”
채소가 있는 그릇을 뒤적거리던 때였다. 양배추 조각들 아래에 레몬 셔벗이 숨겨져 있었다.
셔벗은 가격이 비싼 디저트이기에 하녀장이 절대 허락하지 않을 메뉴인데도.
그런데 레몬 셔벗이 이런 구석에 몰래 숨겨져 있는 이유는-
“…다들 뭐야.”
나는 주방에서 일하고 있을 동료 하녀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스푼을 들었다. 맛있었다.
이런 것쯤은 예전 세계에서 먹고 싶을 때마다 먹었던 디저트였다.
하지만 오늘 먹은 셔벗의 맛은 내가 기억하던 것보다 더 특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