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가엾은 것! 너를 어쩌면 좋니!”
발렌티스 백작 부인이었다.
그녀는 어느새 상황 파악을 끝내고 수습을 하려는 것인지, 눈에 눈물을 머금고 내 몸을 껴안았다.
‘드디어 나섰구나.’
이 자리에 나서는 사람이 있다면 백부가 아닌 그녀일 것 같았다.
가주의 체면 문제도 있지만, 나와 동성이자 가문의 안주인인 그녀가 행동하는 것이 모양새가 좋았으니.
“집사 때문에 네가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했구나! 많이 힘들었지?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마님……?”
“앞으로는 백모님이라고 부르렴. 지금부터라도 너를 내 친딸처럼 보살펴 줄게. 맛있는 것만 먹이고 예쁜 옷만 입힐 거야.”
“저를 조카로 받아 주시는 건가요? 영광이에요! 감사드려요!”
“감사라니? 당연한 것을! 돌아가신 부모님 대신이라고 생각하렴.”
나에게나 그녀에게나, 진심이라고는 한 톨도 들어 있지 않은 작위적인 연극이었다.
그렇지만 못 할 것도 없지. 나 또한 크게 감격한 척 울먹이며 백작 부인의 몸을 같이 껴안았다.
“그런데 네리아?”
“네, 백모님. 말씀하세요.”
“집사를 용서해 주면 어떻겠니?”
“네?”
“집사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많이 반성하고 있을 텐데.”
“…….”
“이제부터는 너도 한 명의 귀족 영애잖니. 관용과 포용은 귀족이 가져야 할 덕목이란다.”
백작 부인이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내 어깨를 잡은 그녀의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네리아도 훌륭한 발렌티스의 일원이라는 걸 이 자리에서 모두에게 보여 주면 좋지 않겠니?”
집사의 잘못은 지금 당장 목을 쳐도 부족하지 않을 중죄다.
하지만 그녀는 덕목 따위의 허울 좋은 단어를 들먹이며 나에게 집사를 용서할 것을 강요하고 있었다.
‘이건 뭐, 순 제멋대로잖아?’
“마님……!”
한편, 집사는 믿고 있었다는 듯이 황송한 표정으로 백작 부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의외였다. 아예 죄를 뒤집어씌워 없애 버릴 줄 알았건만.
그렇다고 해도 그들이 진심으로 집사를 감싸는 것은 아니다. 집사의 처분은 그들이 처음부터 내 기를 꺾어 놓으려는 재료였다.
지금은 귀족으로 인정받았지만, 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런 의미의 경고였다.
“네리아? 어떻게 생각하니?”
백작 부인이 대답을 종용했다.
“저는.”
나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만약 평범한 하녀였다면 그녀가 주는 압박감에 고개를 끄덕였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아니거든.
“백모님의 말씀에 따를게요!”
용서? 당신이라면 하겠어? 그들이 나를 통제하려 든다면, 더더욱 맞서야 보람이 생기지.
나는 반대쪽으로 몸을 숙여 집사와 눈높이를 맞췄다.
“집사님을 용서할게요.”
“감사합니다, 아가씨.”
집사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가소롭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네까짓 게 아무리 날뛰어 봐야 별것도 아니라는 듯이.
‘아까만 해도 굴욕적인 자세로 이마를 박고 있었으면서.’
주제도 모르고 기어오르는군. 나는 살며시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런데 물어볼 게 있어요. 집사님은 제 어머니가 마구간지기와 불륜을 저질렀다고 했지요?”
“…예?”
집사가 갑작스러운 말을 들었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집사님이 본 게 정말 확실해요? 혹시 잘못 봤거나 착각을 한 건 아닐까요?”
“그, 그건…….”
“여길 나가면 하녀장님께도 물어봐야겠어요. 늦게라도 괜찮으니까 생각이 나면 꼭 말해 줘요! 저는 어머니의 명예를 되찾고 싶거든요.”
집사는 대답하지 않고 옆으로 눈알을 굴렸다. 아마도 내 뒤에 있을 백부를 쳐다보는 모양이었다.
나는 모르는 척 미소를 흘렸다.
잊고 있는 것 같은데, 애석하게도 집사가 저지른 잘못은 하나가 아니다.
나에게 가짜 레드 스톤을 준 것은 여기서 억지로 용서받게 만든다 쳐도, 거짓말로 증언을 한 것은?
‘나’라는 존재는 불륜의 증거이자 결과물이었다. 그런데 내가 사실은 아버지의 친딸이 맞았다는 결과가 나왔다.
불륜의 진실 여부가 사람들의 입방아에 다시 오르내릴 테고, 증인이었던 집사와 하녀장은 다시 증언을 요구받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레고트 가주가 시킨 일이다.’라고 자백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그들을 백부가 과연 살려 둘까?
어차피 꼬리를 자를 거라면, 괜한 분란이 생기기 전에 미리 잘라 두는 게 낫다. 나는 그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을 뿐이었다.
“저는 절대……!”
집사가 입을 열었지만, 나에게 한 말이 아니었다. 그의 시선은 내 뒤에 있는 누군가에게 닿아 있었다.
‘과연 백부는 어떤 선택을 할까?’
뒤를 돌아볼 수는 없었지만, 집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 것만 봐도 백부가 무슨 결정을 내렸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좋아, 버림받았구나?
“확실히 봤습니다! 분명히 봤-”
쾅-!
“용서? 감히 내 조카와 발렌티스 가문을 능멸한 자에게 용서라고?”
고막을 때리는 소음에 뒤를 돌아보자, 백부가 탁자를 내리치며 일어나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그딴 건 없다! 그 죄는 네놈의 목숨에 묻도록 하지! 어서 저놈을 끌고 나가! 당장!”
“아닙니다, 가주님! 저는 절대-!”
집사가 필사적으로 빌었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기사 두 명이 집사의 팔을 한쪽씩 붙잡았다.
“가주님! 제발!”
온몸을 버둥대며 버티려는 집사의 모습이 애처로워 보였다. 배신자에게 어울리는 말로였다.
‘잘 가렴. 하녀장도 함께할 테니 가는 길이 외롭지는 않을 거야.’
회의장 밖으로 질질 끌려 나가는 그를 마음으로 배웅하고는 당황한 모습으로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어떡해! 백부님, 저를 위해서 그렇게까지 해 주실 건 없는데……!”
“…….”
백부 가족은 마치 자갈이라도 씹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상쾌한 기분에 절로 피어오르는 미소를 숨기기 위해서였다.
***
“네리아, 이 맹랑한 것이-!”
발렌티스 백작가의 가주, 레고트의 집무실에 노성이 울렸다.
올해의 연례 회의는 최악이었다.
사생아라는 오명을 씌워 하녀로 처박아 두었던 조카가 가문의 정식 일원으로 인정받다니.
도저히 화를 삭일 수 없어 회의 다음에 예정되어 있던 만찬을 취소하고 손님들을 모두 내보냈다.
레고트의 어머니인 발렌티스 대부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머니가 네리아의 편을 들다니, 어떻게 나한테 이러실 수가 있어? 젠장! 이깟 돌멩이!”
레드 스톤은 가문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의미가 깊은 물건이다.
동생 카터가 가주 계승식에서 레드 스톤에 피를 떨어트렸을 때, 얼마나 억울하고 화가 났던가.
‘원래는 내 것이었거늘!’
그에게 레드 스톤은 빼앗긴 것을 되찾았다는 승리의 증표였다.
그랬기에 레고트는 가주가 된 이후로, 일부러 레드 스톤을 자신의 손이 닿는 곳에 보관했다.
원위치인 지하 금고에는 가짜를, 진짜는 그의 집무실 서랍 속에.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마다 서랍을 열어 마음을 다지던 보물이었는데, 지금은 그냥 쓰레기로 보였다.
“제길!”
레고트가 책상 위에 올려 두었던 레드 스톤을 힘껏 벽에 던졌다.
하지만 가짜와 달리 진짜 레드 스톤은 조금의 손상도 없이 데굴데굴 바닥을 굴러갈 뿐이었다.
“하필이면 거기서 가짜가 깨질 게 뭐야? 더럽게 운도 좋지.”
불쌍하니 저택에 두는 게 어떻겠냐는 란타나 님의 말씀에 하녀로 놔둔 아이였다.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으면 진작 쫓아냈을 것을.
레고트가 숨을 씩씩대며 소파에 주저앉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백작 부인 멜비나가 그에게 시원한 물 한 잔을 내밀었다.
“진정하세요, 백작님. 화를 내면 몸에 좋지 않아요.”
“하지만 부인, 답답하지 않습니까. 거슬린다고 제거해 버리자니, 주시하는 눈이 많아서 직접 손을 댈 수도 없고.”
레고트가 찬물을 한 번에 들이켜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귀족을 없애는 일은 평민을 없애는 것과는 사안의 경중이 다르다.
게다가 8년 만에 신분을 되찾은 아이에 관한 사람들의 관심이 클 테니, 섣불리 건들 수도 없었다.
‘강제로 결혼이라도 시켜서 내보내 버려?’
하지만 그러기보다는 눈에 닿는 곳에 두고 해결하는 게 낫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제거라니, 굳이 저희의 손을 더럽힐 필요가 있나요?”
그러나 멜비나 백작 부인은 여유로운 말투로 대답했다.
“기억을 잃고 성격이 바뀌어서 이런 건방진 짓을 저지른 것 같은데, 그래 봐야 이미 8년을 평민으로 살아온 아이예요.”
“그거야 그렇다만.”
“배운 것도 없고 예법도 몰라서 천치나 다름없는 상태일 텐데, 귀족 사회에서 제대로 적응이나 할 수나 있겠어요? 귀족의 의무를 핑계로 사교계에 던져 놓으면, 울면서 도망친다고 장담해요.”
“흠, 부인의 말씀대로겠지요?”
“물론이지요. 그리고 보니… 머지않아 수확제가 있잖아요? 더 쉽고 확실한 방법이 있겠어요.”
멜비나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니 신경 쓸 것도 없어요. 그보다 집사와 하녀장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놔두면 성가신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 이쯤에서 치우는 게 깔끔하지 않겠습니까. 당분간 불편하기는 하겠지만 감수해야지요.”
레고트의 목소리에 숨길 수 없는 짜증이 묻어 있었다.
***
회의가 어수선하게 끝난 후.
더는 별관의 고용인용 숙소에 머물 필요가 없었기에 나는 본관의 손님방으로 보내졌다.
“손님방도 나쁘지는 않네.”
레비가 사용 중인 원래의 내 방과 비교하면 초라한 장소였지만, 별관의 숙소를 생각하면 천국이었다.
나는 오랜만에 푹신하고 크기가 넉넉한 침대에 몸을 뉘었다.
다들 내 이야기를 떠들고 소문을 퍼트리느라 바쁠 테니 오늘은 방 안에서 쉬자는 결정을 내렸다.
사람들도 당사자가 눈앞에 있으면 불편할 테니까.
‘그렇지만 할머니와는 좀 더 대화하고 싶었는데.’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백부에게 거의 내쫓기듯 저택을 떠난 대부인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본 그녀는 나에게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미안할 일이야 많겠지.’
네리아를 지금껏 방치한 것.
백부의 잘못인 걸 알면서도 집사에게 모든 책임을 돌린 것에 암묵적으로 동의한 것.
백작 부인이 나에게 집사를 용서하라고 억지를 부리는데도 나서지 못한 것, 등.
하지만 딱히 서운함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나는 손녀지만, 백부는 그녀의 아들이며 백작가의 가주다.
대부인에게도 가문의 체면을 챙겨야 할 의무가 있었다. 내 신분을 인정해 준 것만으로도 그녀는 충분한 역할을 한 것이다.
‘게다가 나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시니, 다음에 내가 부탁을 하면 거절하지 않으실 거야.’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시간이 늦은 밤이 되었을 때였다.
똑똑-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기에 문을 열었더니, 문틈에서 쪽지 하나가 툭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