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은 셀프입니다 (24)화 (24/172)



<24>

또한, 백부의 입장에서도 내 부탁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창고에 기사가 동행해 봐야 백부의 술수가 틀어질 일은 조금도 없다.

게다가 내 주장을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결백함을 주장하는 것이 된다. 되레 잘됐다고 여길 수밖에.

“그렇지만 어차피 기회를 주는 것, 마지막으로 자비를 베풀어 주도록 하지. 첼시 경! 동행하게.”

역시나, 백부는 내 요구 사항을 거절하지 않고 수락했다.

집사와 기사가 떠난 회의실에는 어수선한 공기가 흘렀다.

얼마간의 불편한 침묵이 이어졌고, 잠시 후에 자리를 떠났던 두 사람이 대회의장으로 돌아왔다.

“이 레드 스톤은 중앙 창고의 금고에서 꺼내 온 것이 맞습니다.”

기사가 그렇게 증언하자, 집사는 불친절한 자세로 레드 스톤이 올려진 트레이를 나에게 내밀었다.

“자, 여기에 손을 올려라.”

“…알겠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백부에게 진품 확인까지 요청하고 싶기는 했다.

하지만 백부에게는 일개 하녀의 부탁을 들어줄 의무가 없다.

억지를 쓰며 거절할 게 분명했고, 그는 이미 한 번 ‘자비를 베풀어’ 내 요구를 들어준 바 있었다.

‘네 주제에 바라는 것이 많다고 이대로 쫓겨나기만 하겠지.’

두 번은 무리라는 걸 알고 있기에 순순히 레드 스톤을 가져왔다.

“…아.”

물론, 예상과 다르지 않게 내 손에 들린 가짜 돌멩이는 아무런 빛도 뿜어내지 않았다.

입을 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멀리서 백부가 혀를 차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대부인은 여전히 혼란스러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 보셨지요? 저 아이는 카터의 친딸이 아닙니다. 집사!”

이제 이 길었던 소동을 정리할 때였다. 집사는 백부의 명령에 따라 레드 스톤을 회수하기 위해 나에게 다가왔다.

“이리 내라.”

하지만 나는 그에게 레드 스톤을 돌려주지 않고 등 뒤로 감췄다.

“자, 잠시만요. 저는 아직!”

“이 시건방진 것이! 시간 끌지 마라. 그래 봐야 바뀌는 건 없다!”

레드 스톤을 가져가려는 집사와 내놓지 않으려는 나. 몸싸움이 벌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랬기에 집사가 강제로 내 팔을 붙잡았을 때,

팍-!

나는 실수인 척 일부러 돌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그러자 그레이 경에 의해 손질이 된 돌은 딱딱한 대리석 바닥에 닿자마자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맙소사, 이게 무슨!”

그에 회의장이 경악으로 가득 찼다. 곳곳에서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 바, 방금 가문의 보물이!”

“저희 발렌티스 가문의 레드 스톤이 어찌하여……!”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역사가 200년이 넘은 발렌티스의 레드 스톤은 고작 바닥에 떨어졌다고 해서 파손될 물건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깨져서는 안 될 물건이 깨졌다. 그것은 즉,

“집사가 가져온 레드 스톤이 정말로 가짜라도 됐던 거야?”

8년 전에도 로이엔 경처럼 백부의 계략을 눈치챈 사람은 있었을 거다.

하지만 추측만 했을 그때와 달리, 지금은 검사 과정에 부정이 섞였다는 사실이 직접적으로 드러났다.

그것도 많은 사람이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 있는 장소에서.

이제는 8년 전처럼 그냥 넘겨 버릴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회의장의 소란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커지기만 했다.

“죄,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나는 공포심에 질린 표정을 지으며 백부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는 듯, 상석에 모인 백부 가족 4명의 얼굴에서 약속이라도 한 듯 표정이 사라져 있었다.

상황은 계속 흥미롭게만 흘러가고 있었다. 그래서, 다음은?

“레고트? 이게 어찌 된 일이니?”

드디어 대부인이 입을 열었다.

“발렌티스 가문의 레드 스톤이 어떻게 저렇게 깨질 수가 있어?”

“…….”

백부는 침묵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 상황을 해명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아마도 집사가… 물건을 잘못 가져온 것 같습니다.”

백부가 토해 내듯 말을 내뱉었다. 결국 그가 선택한 방법은 집사에게 책임을 전부 떠넘기는 것이었다.

‘그 외에 방법이 없기는 하지.’

본인의 소행이라고는 죽어도 말할 수 없을 테니까.

“집사! 네놈은 일 처리를 대체 어떻게 하는 거야?”

“예, 예. 가주님, 제가 나이를 먹다 보니 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졸지에 잘못을 혼자 뒤집어쓰게 된 집사만이 어찌할 바를 모르며 덜덜 떨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레드 스톤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말이니? 확인하고 싶으니 제대로 가져오도록 하렴.”

대부인이 엄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백부의 입가가 떨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대부인의 지시는 정당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합당한 요구였다.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집사, 레드 스톤을 다시 똑바로 가져와.”

“가주님, 그러면-”

“당장 움직이지 않고 뭘 꾸물대!”

“예, 예! 바로 다녀오겠습니다.”

집사가 떠난 후, 또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하지만 아까와는 조금 다른 종류의 고요함이었다.

“가주님, 레드 스톤을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다시 집사가 등장했다. 그의 손에는 진짜로 추정되는 레드 스톤이 들려 있었다.

저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이 상황에서 또 가짜를 가져오지는 않았겠지.

백부는 체념한 듯 집사에게 대답조차 하지 않고 대부인 쪽을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대부인, 여기 이것을.”

집사는 나에게 취하던 태도와 달리, 아주 공손한 자세로 트레이를 대부인 쪽으로 건넸다.

“…….”

그녀가 앉은 테이블 위에 레드 스톤이 놓였다.

하지만 대부인은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눈앞의 돌멩이를 지그시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아가, 이리로 가까이 오렴.”

그녀가 조용히 나를 불렀다.

대부인이 레드 스톤을 가져오게 한 것은 문제를 확인하기 위함이 아니라, 나에게 건네주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것을 들어 보겠니?”

괜히 머뭇대며 시간 낭비를 할 필요는 없다. 나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레드 스톤을 손에 쥐었다.

“오오-!”

“맙소사!”

주변에서 감탄사가 들렸다.

내 손 위에서 레드 스톤이 붉은빛을 선명하게 내뿜고 있었다.

가주의 조카. 그 정도에 걸맞은 밝기였지만, 나에게는 그 빛이 오후의 태양보다 더 밝게 느껴졌다.

‘이제야 드디어.’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로 벌어졌던 모든 일이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 고생 전부가 이 빛을 보기 위해서였다. 죽은 네리아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대부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는 카터의 친딸이 맞았구나.”

그녀가 백부를 대신해 선언했다.

당연한 사실을 뒤늦게야 인정받은 것이다.

정도 이상으로 기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당황하고 있을 백부 가족을 생각하니 이 순간이 짜릿하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백작 부부와 레비, 라일라가 구겨진 종이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제부터 시작일 텐데 벌써 그런 표정 지으면 안 되지.’

입가에 떠오르려는 미소를 숨기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은 백부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내가 먼저 말을 꺼내기로 했다.

전대 가주의 친딸이 억울하게 사생아 누명을 쓰고 8년이나 부당한 대우를 받아 왔다.

응당, 거기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네, 물론이에요! 저는 제 부모님을 믿고 있었어요! 제가 아버지의 딸이 아닐 리가 없잖아요.”

뒤늦게 드러난 진실에 감격한 척,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이었던 걸까요? 오늘은 집사님의 실수였다지만, 8년 전에는 어째서……?”

나오지도 않는 눈물을 쥐어 짜내며 집사를 응시했다. 내 시선을 정면으로 받은 그가 흠칫 몸을 떨었다.

“그때도 실수였나요?”

“…그, 그때는.”

“설마 일부러 그러신 건 아니죠?”

“당치도 않습니다! 제가 실수를!”

집사가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는 바닥에 쾅 소리가 나도록 이마를 처박았다.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는 부담감에 제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언제나 나에게 고압적으로 굴던 사람과 동일인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비굴한 모습이었다.

“실수…라고 하셨어요?”

웃었다. 실수일 리가 있나.

집사는 주인의 명령을 따른 것뿐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바보는 이 자리에 아무도 없다.

하지만 동시에 이 자리에는, 백부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도 했다.

만약 집사가 진실을 밝힌다고 해도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며 꼬리를 잘라 내 버리면 그만이다.

발렌티스 가문 내에서의 백부의 입지는 매우 견고하니까.

증언 하나로 개싸움이 가능한 것도 양측의 세력이 비등할 때나 가능한 이야기였다.

그러니 이번 일로 그들에게 실질적인 타격을 입히기는 힘들다는 사실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첫 끼부터 배가 부를 수는 없지. 오늘은 아버지의 친딸로 인정받은 것만으로도 충분해.’

다만, 거짓말로 어머니에게 불륜 누명을 씌우고 네리아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했던 집사와 하녀장.

그 둘에게는 오늘을 기회로 대가를 치르게 해 줄 생각이었다.

전 주인을 팔아서 8년 동안 죄책감도 없이 잘 먹고 잘살았잖아?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지.

“집사님도 사람인 이상 실수는 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나는 두 손을 꼭 붙잡고, 집사를 향해 울컥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 실수 때문에 사생아라는 누명을 쓰고 비참하게 살아온 저의 지난 8년은 어떻게 보상받나요?”

“제가 아가씨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저를 죽여 주십시오!”

“그래요? 그렇게 할까요?”

“예? 아, 아가씨?”

“네리아……!”

그때였다. 집사의 말을 가로채며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