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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셀프입니다 (21)화 (21/172)



<21>

후계자의 업무에 도움이 되고 싶어서 밤새도록 외운 제국의 귀족 명부는, 레비의 데이트 상대를 고르는 데 사용되었다.

‘나는 이런 걸 원했던 게 아닌데.’

그래도 사샤는 기다리기로 했다. 언젠가는 레비도 정신을 차릴 거라고 기대하면서.

하지만-

‘엠마, 너 굉장히 마음에 드는데? 내일부터 내 직속 하녀가 돼라. 사샤는 그동안 수고했고.’

아무런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레비의 말 한마디에 쫓겨났다.

허무했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이곳에서 일한 경력으로 다른 귀족 가문에 들어가면 되니까.

하지만 그 계획도 허무하게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레비는 이번에 직속 하녀를 바꿨어요. 네? 왜 바꿨냐고요? 이유가 별거 있겠어요? 원래 하녀가 레비와는 맞지 않아서 그렇지요.’

귀부인들이 모인 티 파티에서 발렌티스 백작 부인이 그렇게 말했다.

평범한 잡담이었다. 질문한 사람도, 대답한 사람도 대단한 의미를 두고 내뱉은 이야기가 아니었다.

백작 부인도 본인의 입으로 ‘아들의 여성 편력 때문’이라는 말을 할 수는 없으니, 적당한 핑계를 둘러댄 것이다.

하지만 그 단순한 잡담이 사샤에게는 절대로 넘을 수 없는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맞지 않는다.’라는 말은 결국, ‘하녀가 주인에게 맞춰 주지 못했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사샤에게 잘못을 돌린 것이다.

가문의 안주인이 그렇게 평가한 하녀를 대체 어느 가문에서 고용해 주겠는가.

‘귀족들이 평민 따위의 사정을 일일이 봐줄 리가 없지.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은 차고 넘치니까.’

레비와 백작 부인을 원망했지만. 그렇다고 한들 사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포기하는 것밖에 남은 일이 없었다. 그냥 보통 하녀가 되어 먹고살 돈이나 벌면 된다.

일반 하녀라도 평민이 할 수 있는 다른 일보다는 급여가 높으니까.

두근거리던 심장이 멈추고 어릴 때부터 꿈꿔 왔던 목표가 사라졌지만, 사샤는 결국 체념했다.

일머리가 없는 엠마를 가르치느라 인수인계가 아직도 끝나지 않았는데 짜증조차 나지 않았다.

‘사실 엠마도 안됐지. 레비 도련님의 비위를 맞춰 주려면.’

사람이 아무도 없는 밤중의 야외 정원에서 사샤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이건 누가 보낸 걸까?’

사샤의 손에 들린 작은 종이에서 바스락대는 소리가 났다.

발신인도 적혀 있지 않은 쪽지였지만, 직속 하녀 건으로 할 말이 있다는데 나오지 않을 수도 없었다.

“안녕, 먼저 와 있었네?”

그리고 그때, 사샤의 뒤에서 누군가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쪽지를 보낸 사람이… 너야?”

사샤는 의외라고 생각하며 눈을 깜빡였다.

그녀의 눈앞에 황금빛 머리카락을 하나로 높이 묶은 화사한 미인이 서 있었다.

밤중의 야외 정원을 밝히는 것은, 작은 마법 전등과 달빛뿐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사샤는 눈앞의 소녀가 불편하고 어렵게 느껴졌다.

저택을 지나다니다 보면 가끔 그녀를 마주칠 수 있었다. 볼 때마다 천사처럼 아름다운 외모에 놀라기는 했으나 어차피 같은 하녀.

어렵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그렇지만 어째서인지 지금은…….

“맞아, 내가 보냈어. 나와 줘서 고마워.”

네리아가 분홍색 눈을 초승달처럼 휘며 생긋 웃자, 갑자기 주변이 밝아진 것처럼 느껴졌다.

‘엔도 저 얼굴에 적응하는 데 한참이 걸렸다고 했었지.’

과거 따위야 어찌 되었건, 다른 하녀들이 그녀에게 순식간에 빠져 버린 게 이해가 되었다.

역시, 네리아는 미인이었다. 레비가 만났던 귀족 영애 중에서도 그녀만큼 아름다운 사람은 없었다.

“고, 고맙기는 뭘.”

‘그렇다고 말을 더듬을 것까지는 없지 않았나?’

사샤는 괜한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딱딱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보다 직속 하녀 건으로 할 말이 있다니, 그게 뭔데?”

“아, 그건 말야.”

또다시 주변이 밝아졌다.

“사샤, 내 직속 하녀가 되지 않을래? 난 네가 마음에 들거든.”

“뭐라고?”

마음에 든다는 말은 고맙지만, 사샤는 네리아의 말을 듣고서 표정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왜 네 직속 하녀가 돼? 너는 귀족이 아니라 평민이잖아. 왜 그런 소리를……. 아, 혹시?

그러나 사샤는 말을 하는 도중에 유력한 가능성을 떠올렸다.

“결혼? 다른 귀족분께 청혼을 받기라도 한 거야?”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였다. 그녀는 상대가 귀족이라고 해도 무릎을 꿇고 구애할 만한 미인이니까.

“결혼? 내가?”

그런데 네리아가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결혼 같은 건 생각도 못 했어.”

그녀가 유쾌한 듯 웃음을 터트렸다. 미인은 웃음소리마저도 유리구슬처럼 맑고 청아했다.

“실례했네. 그만 웃어야겠다.”

웃는 것을 그치기는 했지만, 네리아는 여전히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채로 입을 열었다.

“사샤, 아까 내가 평민이라고 했지? 그런데 말이야.”

네리아가 그녀의 머리를 묶고 있던 끈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길고 구불구불한 황금색 머리카락이 허공으로 쏟아졌고, 그 모습이 마치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밤바다의 파도처럼 일렁였다.

그녀는 왼손으로 머리카락을 한 번 쓸어 올리고는 아름답게 웃었다.

“네 눈에는 내가 평민으로 보여?”

네리아의 눈빛이 달라졌다.

자세가 변하고 그녀를 감싸고 있던 분위기 역시 달라졌다.

그것은 사샤가 눈을 한번 깜빡이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어느 순간, 네리아는 고고한 자세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미인이라는 것 정도야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름다운 얼굴이 전부가 아니었다.

사샤의 눈앞에 고귀하고 오만한 귀족 영애가 서 있었다.

그것은 흡사 마법이었다.

달빛이 만들어 낸 환상이었다.

낡고 바랜 하녀복마저도 그 순간에는 아름다운 드레스로 보였다.

‘네 눈에는 내가 평민으로 보여?’

사샤는 그녀의 질문에 조금의 고민도 없이 대답해 줄 수 있었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녀는 평민이 아니다.

네리아는 사샤가 만났던 그 누구보다 특별하고 귀족다운 사람이었다.

***

이곳에서 네리아의 자리를 되찾겠다고 결심했을 때, 내가 처음부터 포섭하고자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백작가의 가신과 기사, 그리고 하녀.

그중 직속 하녀는 나와 매일 매시간을 함께하며 내 손발이 되어 줄 아주 중요한 역할이다.

귀족이 되면, 처음에는 가문의 안주인인 백작 부인이 나를 맡을 직속 하녀를 지정해 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하녀에게 잘못을 씌워 내보낸 뒤, 그 핑계로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직속 하녀로 올릴 생각이었다.

‘연례 회의 전에 미리 내정해 놓으면 좋을 텐데, 누가 좋을까?’

직속 하녀를 고를 때 가장 중요한 조건은, ‘내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인가?’의 여부였다.

다행히 4개월 가까이 최선을 다해 살아온 덕분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많이 만들 수 있었다.

엔이나 비비, 씨씨 등. 모두 신뢰할 수 있고 사이도 좋다.

하지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녀들에게는 직속 하녀 경력이 없다는 부분이었다.

예전 세계였다면 천천히 가르치며 키워도 되지만, 나에게 필요한 건 지금 당장 도움이 될 사람이다.

귀족 신분을 되찾는다면 올해 안에 사교계 데뷔를 끝내고, 다른 귀족들이나 황족들과 협조적인 관계를 쌓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각종 정보와 지식이 필요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정보는 불완전했다.

예전 세계와 이쪽 세계는 비슷해 보여도 똑같지 않기 때문이었다.

로이엔 경에게 도움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원할 때마다 만날 수 있는 처지가 아닌 만큼 한계가 있다.

바로 옆에서 도움을 주면서 내가 아는 지식이 맞는 것인지 확인해 줄 사람이 있으면 좋을 텐데.

그렇게 생각했을 때, 눈에 들어온 사람이 바로 사샤였다.

하지만 그녀는 레비가 데리고 있던 사람인 데다 내 쪽으로 데려올 수 있는 유인책이 없었다.

‘그래서 애초에 측근으로 둘 기대조차 안 하고 있었지만.’

하지만 사샤가 어떤 사람인지에 관한 이야기를 엔에게 듣는 순간 나는 확신했다.

나는 무조건 그녀를 설득할 수 있을 거라고.

“어때? 내 직속 하녀가 되지 않을래? 나는 네 도움이 필요해.”

사샤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그녀는 혼란스러워하고 있었지만, 옆에서 귀족을 모시던 경험 때문인지 금방 정신을 차렸다.

“미안하지만, 네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겠어. 어쨌거나 너는 지금 평민이잖아.”

“그래, 지금은. 하지만 발렌티스의 이름을 찾아올 거야. 그러니까 네가 날 도와줬으면 좋겠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거야?”

사샤가 눈을 찌푸렸다. 그녀는 나에게 경계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거절할게. 날 위험한 일에 끌어들일 생각이지?”

“위험한 일?”

일부러 사샤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외모는 이런 곳에 써먹어야 하는 법이다.

“생각만큼 위험하지는 않을걸.”

그렇게 말하며 미소 짓자 사샤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의 경계심이 아까보다는 누그러진 것 같았다.

“그런데 뭘 믿고 나한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야? 네가 수상한 일을 꾸미고 있다고, 내가 마님께 일러바칠 수도 있잖아.”

“일러바칠 거야?”

“못 할 것도 없지. 너를 밀고하면 마님께 상을 받을 수도 있는데.”

“받고 싶은 상이라도 있어?”

“그거야… 포상금을 받는다거나, 다시 레비 도련님의 직속 하녀 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든가.”

“음, 그렇구나. 백모님도 그 정도 포상은 확실하게 해 주실 거야.”

나는 사샤의 귓가에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런데 넌, 진짜 그걸 원해?”

“뭐?”

“다시 레비의 하녀가 되고 싶어? 그게 네가 바라는 일이야?”

표면 그대로의 질문이 아니었다. 그녀의 꿈, 미래. 그러한 의미들을 담은 물음이었다.

“…….”

“다시 말할게. 너는 주인을 돕기 위해 노력했고, 나는 ‘네’ 도움이 필요해. 그렇지만.”

거기까지 말하며 웃었다.

생략된 뒷말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레비는 사샤의 노력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그녀는 내 권유에 대답하지 못하고 한참을 침묵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안정성’보다 ‘목표’가 더 중요한 행동의 동기가 되고는 한다.

꽤 긴 시간이 지나고야 입을 뗀 사샤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대고 있었다.

“네리아 아가씨.”

“응.”

“제가 무엇을 어떻게 도와 드리면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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