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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셀프입니다 (20)화 (20/172)



<20>

“그런데 자주 찾으니까 집사님도 귀찮잖아? 도련님도 집사에게 계속 잡일을 시키려니 미안했고.”

“그래서 직속 하녀인 사샤에게?”

“정답. 사샤가 집사님께 열쇠를 받아서 술을 가져오는 걸로 합의가 된 거야.”

“아하, 그렇게 된 거였구나.”

엔의 말에 호응하면서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게 눈을 빛냈다. 그런 뒷사정이 있었다니.

‘만약 사샤에게 협조를 구할 수만 있다면 완벽할 텐데.’

가능할까? 가능성이라도 알아보기 위해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사샤도 고생이 많았겠다. 그런데 일반 하녀로 강등이나 되고.”

“내 말이 그 말이야!”

“엔은 사샤랑 많이 친하지?”

“친하지. 같은 날에 발렌티스 저택에 들어온 동기거든. 사샤가 직속 하녀가 되기 전까지는 룸메이트이기도 했고 말야.”

“그래? 그 앤 어떤 애야? 너랑 친하다니까 괜히 궁금하다.”

“음, 사샤는 말야-”

여기서부터는 비밀이 아니었기에 그녀와 나는 청소를 재개하며 대화를 나눴다.

엔은 꽤 긴 시간 동안 사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칭찬과 안타까움이 반씩 섞인 내용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전부 들은 후에, 하루 중에서 가장 밝은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어쩌면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걸?’

***

라일라 발렌티스는 백작가의 야외 정원에 놓인 테이블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아름다운 꽃들, 향기로운 허브티, 달콤한 디저트를 옆에 두고 있는데도 그녀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짜증 나.’

라일라가 네리아를 생각하며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요즘 들어 아주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지?

‘마음에 안 들어.’

카터 숙부는 그녀의 아버지 레고트가 가졌어야 할 백작가의 가주 자리를 뺏어 갔다.

자연스레 라일라 역시도 발렌티스 가문의 적장녀 자리를 네리아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그들은 도둑이었다. 그런 주제에 피해자인 레고트와 그 가족에게 사죄하는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다.

‘괘씸한 것들.’

그래도 정의는 살아 있는 것인지 다시 제자리를 되찾기는 했다. 동갑내기 사촌이 비루먹은 하녀 신세가 된 것도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뭐?’

잘 지내고 있다고? 하녀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고 평판이 좋아? 네 주제에 그래도 된다고 생각해?

라일라는 네리아가 싫었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에게 ‘카터 숙부의 딸에게는 절대로 지면 안 된다.’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힐 만큼 들어 왔으니까.

좋아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푹푹. 그녀의 손에 들린 포크 끝에서 케이크가 엉망으로 뭉개졌다.

“라일라 아가씨, 마님께서 아가씨께 이 쿠키를 가져다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그녀의 옆으로 하녀장 마릴린이 접시 하나를 들고 다가왔다.

“됐어. 입맛 없어.”

“하지만 황궁에서 란타나 님께서 보내신 것인데…….”

“뭐? 란타나 님께서?”

‘란타나’라는 이름이 들리자마자 라일라의 표정에 생기가 돌았다.

“놔둬. 지금 당장 먹을 거니까.”

그녀는 즉시 사과잼이 올라간 쿠키 하나를 입에 넣었다. 혀에 감도는 달콤함에 행복을 느꼈다.

“쿠키를 보내 주셨으니 나도 란타나 님께 보답을 해야겠지?”

뭐가 좋을까. 화장수? 루비가 박힌 목걸이? 크리스탈 공예품? 뭐든 답례를 소홀하게 할 수는 없다.

란타나가 누구던가.

황제의 디르케(공식 정부).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인이자, 라일라 발렌티스를 황태제비로 만들어 주실 분이다.

그녀는 란타나의 흑단 같은 머리카락과 아름다운 분홍색 눈동자를 떠올리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동시에 분홍색 눈을 가진 또 다른 누군가가 연상되는 바람에 얼굴을 구기고 말았다.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화풀이라도 해야 기분이 풀리겠어.’

“하녀장, 지금 당장 네리아를 찾아서 여기로 데려와.”

***

나는 개운해진 기분으로 계단의 난간을 마저 닦아 나갔다.

엔에게 사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은 큰 수확이었다. 청소가 끝나면 사샤에게 보낼 쪽지를 써야겠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찾기 힘들게 여기 있었군.”

뒤에서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렸다. 하녀장 마릴린이 나를 찾아온 것이었다.

“네리아! 라일라 아가씨께서 너를 찾으신다. 날 따라오도록.”

“알겠습니다, 하녀장님.”

바쁜데 귀찮게,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고 고분고분하게 계단에서 일어났다.

다행히 하던 일도 다 끝나 가던 참이었다. 엔이 나에게 입 모양으로 도와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있었다.

“…….”

하녀장은 그런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별다른 해코지를 해 오지는 않았다.

이미 맡은 일을 완벽하게 끝냈을뿐더러 남는 시간에는 동료의 일까지 도와주고 있다.

트집 잡힐 일이 전혀 없으니 시비를 걸어올 명분도 없었다.

“가자.”

역시나 그녀는 못마땅해하면서도 몸을 홱 돌려 걸어 나갔다.

‘그런데 라일라가 왜 나를 찾아?’

실수를 저지른 일은 없으니 시답잖은 일이라도 시키려는 걸까.

나는 성가신 기분을 느끼면서도 하녀장의 뒤를 착실하게 따라 걸었다. 그렇게 도착하게 된 곳은 바로 저택의 야외 정원이었다.

“왔어? 이쪽으로 와.”

그곳에는 라일라가 다리를 꼰 자세로 앉아, 나에게 손가락을 까딱거리고 있었다. 거만한 태도였다.

하지만 나는 별다른 감정을 드러내는 대신 그녀에게 생글생글 웃으며 공손하게 인사했다.

“라일라 아가씨, 부르셨나요?”

“응, 시킬 일이 있어서.”

라일라가 미소 띤 얼굴로 테이블에 놓여 있던 잔을 들었다.

차를 마시려는 건가 싶었는데, 그녀가 자신의 구두에 차를 부어 버리기 시작했다.

쪼르륵. 허공에서 갈색 액체가 떨어져 라일라의 하얀색 실크 구두가 주황색으로 젖어 갔다.

“구두가 더러워졌거든. 닦으렴.”

그녀가 발을 내밀었다. 라일라의 얼굴에서 숨겨지지 않는 저열한 감정이 느껴졌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과연 내가 어떻게 나올 것인가? 그것을 지켜보며 재미로 삼을 생각인 듯했다.

옆에 서 있는 하녀장 역시도 표정에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다.

‘…아니, 무슨.’

지켜보고 있는 나는 어처구니가 없을 따름이었다.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이런 유치한 짓을 하다니.

“뭘 하니? 어서 닦지 않고.”

“닦을 도구를 가져오지 않아서요. 앞치마는 지저분해서 이걸로 닦게 되면 아가씨의 구두가 더 상할 거예요. 깨끗한 융을 가져올까요?”

“이걸 쓰도록 해.”

라일라가 잔디밭으로 하얀 손수건을 던졌다.

“알겠습니다, 아가씨.”

하지만 그녀가 기대하는 것과 달리, 나는 스스럼없이 손수건을 주워 그녀의 구두를 닦기 시작했다.

이런 일을 시킨다고 화를 내거나 싫은 표정을 보여서는 안 된다.

지금의 나는 하녀, 라일라는 귀족.

그것이 둘의 객관적인 위치였다.

상황 판단도 못 하고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낼 만큼 나는 인내심이 부족하지 않았다.

게다가 며칠 뒤에는 드디어 백작가의 연례 회의가 열린다.

내 인생이 걸린 거사를 앞두고 있는데 라일라에게 꼬투리를 잡힐 행동 따위를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손수건을 꾹꾹 눌러 가며 구두에 스며든 찻물을 빼냈다.

“잠깐, 네리아.”

“아가씨? 불편하셨나요?”

“자세가 불손하잖아. 제대로 무릎 꿇고 공손하게 해야지.”

라일라의 요구 사항이 늘어났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열심히 구두를 닦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뭐, 그렇겠지.’

그녀의 목적은 내 자존심과 인격을 깔아뭉개는 것이니까.

하지만 나는 라일라가 갑자기 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인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다.

그녀가 나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굳이 번거롭게 나를 불러내 이런 일을 시킨 것이다.

원래라면 평범한 평민 하녀 따위를 신경 쓸 위치가 아닌데도.

‘내가 예전이랑 다르게 사람들이랑 잘 지내고 있으니까 그게 아니꼽고 배알이 뒤틀렸겠지.’

이 상황에서 마음이 불편한 건 내가 아니라 오히려 라일라다.

그걸 알기에 이런 일로는 딱히 기분이 상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며칠 후에는 하녀 역할도 끝날 터였다.

“죄송합니다. 실수했습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무릎을 꿇고 다시 라일라의 구두를 닦았다.

다만 이후로도 라일라에게 귀찮은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녀에게 ‘나는 신경 쓸 가치가 없다.’라는 인상을 심어 줄 필요가 있었다.

연례 회의 이전에 괜히 불려 다니느라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 일만은 반드시 피하고 싶었다.

“아가씨… 그런데 구두가 흰색이라 찻물이 이미 스며든 것 같아요. 예쁜 구두인데 어쩌지요?”

구두가 망가졌다는 사실이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슬픈 얼굴로 라일라를 올려다보았다.

“저한테 맡겨 주시면, 세탁실로 가져가서 다시 살려 볼게요. 저 이런 거 엄청나게 잘하거든요!”

반대로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재미가 없다, 질렸다, 그런 감정이 라일라에게 느껴지고 있었다.

“…됐어. 이미 더러워진 걸 어떻게 신으라는 말이야?”

그녀가 내 손을 치우게 하고는 테이블에서 일어났다.

“이 손수건은 어떻게 할까요? 제가 깨끗하게 빨아서 돌려 드릴-”

“그냥 버려.”

일부러 더 싹싹하게 굴자, 라일라는 확연하게 지루해진 얼굴이 되어서는 야외 정원을 떠났다.

그리고 라일라가 걸어가는 동안 그녀의 목소리 속에서 ‘그래 봤자 하녀’라는 말이 들리기도 했다.

다행히도 라일라는 나에게 흥미를 잃어버린 것 같았다.

‘귀찮아질 일이 더 생기지는 않을 것 같네.’

그 사실에 안도하며, 나 역시도 곧장 정원을 벗어나 별관을 향해 걸어갔다.

돌아가는 즉시, 사샤에게 보낼 쪽지를 쓸 예정이었다.

***

사샤는 귀족을 동경했다.

그들의 결정에 세상이 움직이고 역사가 만들어진다. 범인에게는 허락되지도 않는 일이었다.

사샤도 그들처럼 대단하고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귀족으로 태어나지 않았다. 평민도 황궁의 관리가 될 수 있지만, 사샤에게 그 정도의 실력은 없다.

사샤는 본인의 주제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상이 높은 것에 비해 특별한 재능이 없었다.

그랬기에 선택한 길이 바로 귀족의 직속 하녀가 되는 것이었다.

‘내가 대단한 사람이 될 수는 없지만, 대신 그런 사람이 걸어가는 길에 작은 도움이라도 되자!’

그렇게 된다면, 자신도 특별해진 기분을 느껴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사샤는 노력했다.

덕분에 발렌티스 가문의 하녀로 들어갈 수 있었고, 결국은 후계자의 직속 하녀가 될 수 있었다.

목표를 이뤘다고 생각했다.

‘사샤, 집사한테 열쇠를 받아서 술을 좀 가져와라.’

‘내일은 어떤 레이디를 만나지? 사샤! 데이트할 상대 영애들의 리스트는 잘 정리해 놨어?’

하지만 환상이 깨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발렌티스 백작가는 전대 가주가 이끌던 시절보다 명성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수도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는 유명 가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발렌티스 가문의 후계자라는 인간이.’

술, 여자, 술, 여자, 술, 여자.

특별하기는커녕, 평민인 사샤의 눈에도 한심하게만 보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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