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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셀프입니다 (19)화 (19/172)



<19>

“아가씨께서 밝아진 모습을 보게 되어 기쁩니다! 돌아가신 카터 님과 로즈 님도 기뻐하셨을 겁니다.”

“…….”

그레이 경이 몹시도 감격했다.

하지만 밝아진 건, 그가 알고 있는 네리아가 아니었기에 나는 대답 없이 웃음으로 대화를 넘겼다.

‘이쪽의 네리아도 죽지 않고 살아서 밝아졌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그녀는 이미 세상에 없다. 나는 그저 네리아가 하늘에서 가족을 다시 만났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보다 아저씨는 어떻게 지내셨어요?”

“아, 저는 말입니다-”

그와 나는 안부를 비롯하여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유쾌한 시간이었다. 저쪽 세계와 다를 것 없는 그의 모습에 반가운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네? 그럼 그 얼굴의 이상한 검댕을 아저씨가 보내 주신 거였어요? 아저씨의 동료분을 통해서요?”

“예에. 그런데 이상한 게 아니라, 마수를 잡을 때 모습을 숨기기 위해 사용하는 위장 크림입니다! 한 번 바르면 한 달이 넘도록 효과가 지속되는 기특한 물건이죠.”

“아, 네. 기특하기는 했죠.”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네리아의 얼굴에 거멓게 묻어 있던 것이다.

‘대체 뭘 묻히고 다니나 했더니.’

나는 그레이 경의 설명을 들으며 탄식했다. 어쩐지 아무리 세수를 많이 해도 안 지워진다고 했다.

끼익-

그때, 훈련장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나타났다.

“듀이! 시간 맞춰서 왔네.”

나는 쭈뼛쭈뼛 나타난 소년을 데려와 그레이 경 앞에 세웠다.

“아저씨께 소개할게요. 아까 말씀드렸죠? 이름은 듀이예요.”

“너냐? 아가씨의 전담 호위 기사가 된다는 놈팡이가.”

그레이 경이 듀이의 가치를 매기는 듯한 눈초리로 소년의 전신을 꼼꼼하게 훑어보았다.

‘듀이가 힐더 경과 혈연관계라는 말은 안 하기를 잘한 것 같네.’

다만, 그것이 그레이 경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힐더 경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과도한 기대를 받게 되면 듀이 본인이 심한 부담감을 느낄 테니까.

게다가 힐더 경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기에 괜히 그런 말을 해 봤자 허풍으로 들릴 수 있었다.

“저, 저, 전담 호위 기사요?”

그런데 그레이 경을 마주한 듀이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제가요? 그런 말은 듣지 못했어요! 기사가 되면, 네리아 님의 심부름 같은 걸 할 줄 알았어요!”

“심부름? 그런 일만 시킬 거면 기사가 되라고 말하지도 않았어.”

“하지만 그런 건 그레이 경처럼 강한 분이 하셔야……!”

“그건 불가능하다.”

그레이 경이 나 대신 대답했다.

그는 백부의 기사가 되지 않는 대신, 그 누구의 전담 기사도 되지 않겠다는 서약을 했다고 한다.

나도 그레이 경과 대화를 나눈 뒤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었다.

‘뭐, 어차피 처음부터 그걸 바라지도 않았고.’

어찌 되었건 발렌티스의 현재 가주는 레고트 백부다. 그가 그레이 경처럼 강한 기사를 나에게 전담으로 붙여 줄 리가 없다.

“음? 그런데 얼굴이 익숙한데? 너는 혹시 예전에 그 꼬맹이 아니냐? 겁도 없이 목걸이를 훔쳐 간.”

그레이 경이 갑자기 기억났다는 듯 이야기하자, 듀이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아저씨.”

나는 다급하게 그를 부르고는, 그 일을 언급하지 말라는 의미로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이고, 눈치를 주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옛날 일이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그가 멋쩍은 듯 한 번 웃고는, 듀이에게 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중요한 건 그거다. 네놈, 아가씨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느냐?”

“저기, 아저-”

“네! 바칠 수 있습니다!”

이미 호위 기사를 언급한 것만으로도 부담을 느낄 테니, 목숨 운운하는 무서운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듀이는 단 1초의 고민도 없이 분명하게 대답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주눅 들어 있었으면서.

‘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러면 됐다! 자, 받아라.”

그레이 경이 던진 목검을 듀이가 받아 냈다. 곧, 두 사람이 마주 선 위치에서 목검을 들었다.

“이걸 휘두르는 것쯤이야 배우지 않아도 할 수 있지? 맞춰 줄 테니, 재주껏 최선을 다해 휘둘러 봐라.”

“알겠습니다! 네!”

실력 테스트를 위한 대련이었다.

그런데 한눈으로 봐도 듀이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경직된 자세, 손에서 덜덜 떨리고 있는 목검. 소년은 무척이나 긴장하고 있었다.

‘어쩌지?’

저래서는 제대로 테스트가 안 될 텐데.

“쯧. 아가씨께서 추천하시기에 기대했더니 별 대단한 놈도 아니었군. 카터 가주님은 인재를 알아보는 눈이 대단하셨는데 말이야.”

그때, 그레이 경이 나만 볼 수 있게끔 등 뒤로 손을 흔들었다.

“카터 가주님과 비교하면 아가씨의 눈은 딱히 대단치도 않으셨군.”

굳이 나에게 양해를 구하지 않아도 그것이 듀이를 도발하기 위한 발언인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그리고 그의 도발은 확실한 효과를 발휘했는데, 듀이의 떨림이 멈추고 눈빛이 돌변한 것이었다.

“먼저 덤벼라.”

시작됐다.

허공에서 목검 두 개가 맞닿았다. 저택의 낡은 구 훈련장에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듀이는 그레이 경의 움직임을 따라 하거나 그에게 역습을 시도하기도 했다.

나는 적당히 멀리 떨어진 곳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시간이 조금씩 흐르고 있었다.

분명, 처음에는 기대를 품고 둘의 대련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내 얼굴에서 표정이 점점 사라졌다.

“검… 배운 적 없다고 했잖아.”

등줄기에서 소름이 돋았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숨을 쉬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있었다.

전문가가 아닌 내 눈에도 보였다. 천재. 듀이는 천재다.

저런 재능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야말로 기적이고 하늘이 내려 준 선물이었다.

터억-!

그레이 경의 일격에 듀이의 검이 날아갔다. 끝이었다. 나는 드디어 참고 있던 숨을 몰아쉬었다.

“듀이라고 했지? 고생했-”

“저, 아직 안 졌습니다!”

끝난 줄 알았는데 듀이가 갑자기 목검을 주워 오더니 독기 어린 태도로 그레이 경을 들이박았다.

왜 그러지? 듀이답지 않은 행동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리아 님을 나쁘게 말한 것을 사과하실 때까지 계속하겠습니다!”

아, 아까 그런 일이 있었지. 대련의 충격이 너무 커서 잊고 있었다.

“그야 네놈의 긴장을 풀어 주려고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한 거지, 내가 어떻게 감히 주인님을 평가해?”

그레이 경이 듀이의 머리카락을 헤집고는 나에게로 걸어왔다.

“네리아 아가씨.”

가까이에서 본 그의 눈에는 전율이라는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레이 경 역시, 나와 다르지 않은 생각을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대련을 하는 동안 영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이 녀석의 스승이 된다는 사실에 말입니다.”

그레이 경이 내 앞에 손가락 3개를 들어 보였다.

“3년. 3년입니다. 그 안에 이 녀석을 제국을 대표하는 기사로 키워 보겠습니다.”

“잘 부탁드릴게요, 아저씨.”

그와 나는 동시에 고개를 돌려 듀이를 바라보았다. 이곳에 보물이 있었다.

***

발렌티스 가문의 연례 회의가 거의 1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슬슬 진짜 레스 스톤을 가짜와 바꿔치기할 때가 됐어.’

본관 중앙 창고에 잠입할 방법을 서넛 정도 생각해 두기는 했다. 하지만 그 어느 방식도 위험을 수반하는 만큼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찾아보면 더 자연스럽고 더 안전한 방법이 있지 않을까?’

그것을 위해 나는 일부러 중앙 창고 근처를 지나가고는 했다. 다른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을 정도로만 적당히 자연스럽게.

그리고 나는 바로 어제, 노력의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레비의 직속 하녀인 사샤가 창고에서 몰래 나오는 모습을 목격한 것이다.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곳인데, 사샤는 대체 무슨 재주로 거길 들어간 거지?’

본인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녀와 나는 개인적인 질문을 주고받을 사이가 아니었다.

그랬기에 나는 대신 사샤와 가까운 하녀인 엔을 찾은 것이었다.

“네리아, 도와줘서 고마워! 휴식 시간에 너무 많이 놀았더니, 시간 안에 청소를 못 끝낼 뻔했어.”

“그거… 내가 아까 말을 너무 많이 해서 그런 거잖아. 아니, 하필 그때 웃긴 일이 생각나는 바람에.”

나는 일부러 과장된 자세로 머리를 짚었다.

“미안해. 굳이 따지자면 나 때문이니까 당연히 도와야지. 어차피 나는 일을 다 끝내기도 했었고.”

“네리아를 탓하려는 건 아니었어! 수다 떠는 거 진짜 재밌었어!”

“알아. 일단 청소부터 처리할까? 둘이서 같이하면 금방 끝날 거야.”

“응!”

엔과 나는 사이좋게 집중하여 계단의 난간을 닦아 나갔다.

하지만 단순 작업이란 필연적으로 지루함을 유발하기 마련이다.

나는 입이 심심해질 때쯤, 평범한 잡담인 척 엔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사샤가 중앙 창고에 들어가는 걸 봤어. 어떻게 들어간 걸까? 부럽다. 거긴 비싼 물건이 많겠지?”

집사님처럼 청소 담당이라도 좋으니 들어가서 구경해 보고 싶어-

꿈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더니, 엔이 웃음을 터트렸다.

“나도! 사람들 하는 생각은 다 똑같나 봐. 그런데 사샤는 레비 도련님의 심부름으로 가는 거라서.”

“심부름?”

엔의 입에서 구체적인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다른 의도 따위는 없다는 듯, 순수한 호기심이 담긴 목소리로 캐물었다.

“심부름을 시킬 일이 있어?”

“그게 아는 사람만 아는 일이긴 한데… 네리아도 비밀로 해 줘.”

“당연하지. 내가 입 무거운 거 엔도 알지?”

“알지! 너한테 말한 비밀은 한 번도 다른 사람한테 퍼진 적 없으니까! 잠깐 귀 좀 줘 볼래?”

그녀와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는 은밀하게 머리를 가까이에 댔다.

“중앙 창고 안에 비싸고 귀한 술이 있는데, 레비 도련님이 그걸 백작님과 마님 몰래 빼 드신대.”

시작이 강렬했다. 너무나 레비다운 행동에 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런데 거기에는 중간 과정이 있는데……. 집사님이 어떤 사람인지는 네리아도 알지?”

그녀가 양 손바닥을 교차로 비볐다. 아부를 뜻하는 제스처였다.

“모를 수가 없지. 전문가잖아.”

“아무튼 도련님께서 집사님에게 술을 몰래 가져오라고 시켰대. 집사님은 차기 가주님의 명령에 충실히 복종해서 부지런히 술을 배달했고.”

“응응,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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