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쥐덫? 야! 너 이게 무슨 짓이야!”
빛이라고는 달빛뿐인 어두운 장소였는데도 그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웃어? 너 지금 상황 판단이 제대로 안 되지? 여기는 다른 사람들 방이랑 멀어서 네가 소리 질러 봤자 아무도 바로 못 와.”
화가 많이도 난 것인지 토드의 눈이 반쯤 돌아가 있었다.
“울면서 빌어도 소용없어. 나는 여자라고 안 봐준다고 했다!”
“아침이면 저택에서 쫓겨날 인간이 말이 많네.”
빨리 오기나 하렴. 조금만 더 오면, 거기는 쥐가 아니라 멧돼지를 잡는 덫이 있을 테니까.
바닥에는 이미 촘촘하게 덫을 깔고 짙은 색깔의 천을 사용하여 교묘하게 가려 놓은 상태였다.
이미 이성을 잃어버린 그가 함정을 피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이게 끝까지!”
역시나 분노에 휩싸인 그는 바닥에 주의를 기울일 생각도 못 하고 나에게 막무가내로 덤벼들었다.
‘날뛰는 게 정말 들짐승 같네.’
네가 멧돼지 덫에 걸리면, 다음은 몽둥이찜질이 널 기다리고 있단다. 몇 초 뒤의 미래를 생각하며 토드를 가소롭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가만 안 둬-! 어어어억?”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토드가 누군가에 의해 뒷덜미를 붙잡혀 질질 끌려간 것이었다.
“누, 누구야? 이거 못 놔? 노, 놓으라고. 컥. 너, 너는……!”
방문 너머에서 몸싸움이 벌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토드가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다는 것을 나조차도 알 수 있었다.
“그, 그만! 그만하라고…….”
어느 순간, 토드의 목소리가 끊어졌다. 기절을 한 것 같았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상황 파악을 하고 싶은데, 바닥에 덫이 깔려 있어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밖에 누가 있는 거지?’
경계를 늦추면 안 된다. 나는 또 다른 침입자를 대비해 나무 몽둥이를 더 세게 쥐었다.
“네리아 님! 괜찮으세요?”
하지만 내가 더 걱정해야 할 일은 없었다.
바깥에 있던 누군가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냈고, 그의 정체가 내가 잘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듀이?”
“늦게 와서 죄송해요!”
“잠깐, 위험하니까 가까이 오면 안 돼!”
듀이가 어떻게 여기에 왔지? 그리고 어떻게 토드를 제압한 거야?
당장이라도 물어보고 싶은 질문이 많았지만, 일단은 그의 움직임을 막았다. 듀이가 덫을 밟으면 안 되니까.
하지만 내 걱정이 무색할 만큼, 그는 땅을 보지 않고도 아주 쉽게 함정들을 피해 내 앞으로 다가왔다.
덫의 위치를 알고 있는 나에게는 마치 묘기처럼 보일 정도였다.
“다친 곳은 없으세요?”
“듀이? 너 대체 어떻게……?”
“토드의 행동이 의심스럽길래 방 앞에서 감시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아무런 움직임이 없어서 다른 곳을 살펴보고 왔더니…….”
듀이가 무언가를 열심히 말하고 있었지만 내 귀에는 아무런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홀린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창문으로 쏟아지는 달빛이 듀이의 얼굴을 비춰 그의 금색 눈동자가 유성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잊고 있던 기억 한 조각이 불현듯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마치 뇌에 전기가 통하기라도 한 감각이었다.
‘…드디어 기억났어!’
이제야 알 것 같다. 듀이는 그 사람을 닮았다.
루이케가 존경하는 은발 금안의 천재 소년 검사. 광전사라고 불리는 제국의 최연소 군단장.
황제 폐하께서 자랑하는 대륙 최강의 기사, 힐더 할슈리트 경을.
***
그날도 보름달이 떠오른 늦은 밤이었다.
‘네리아 양, 괜찮다면 하루만 니나렛을 돌봐줄 수 있나요? 니나가 네리아 양을 워낙 좋아해서 말이죠.’
황후 폐하의 부탁을 받고, 어린 니나렛 황녀의 놀이 상대가 되어 주기 위해 황궁으로 갔던 날이었다.
‘네르, 더 놀다 가면 안 돼? 응?’
유독 나를 잘 따르는 니나렛은 시간이 늦었는데도 나를 놓아주지 않았고, 나는 아이가 잠든 후에야 황녀궁을 벗어날 수 있었다.
“드디어 풀려났네. 니나 님이 귀여운 분이신 건 맞지만.”
니나렛의 토라진 얼굴을 떠올리며 후후 웃음을 내뱉었다.
밤의 황궁은 적당히 고요하고 적당히 서늘했다. 나는 밤공기를 마시며 새하얀 자갈길을 걸었다.
“레이디 발렌티스. 이것을-”
그때, 풀벌레들의 울음소리 위로 겹쳐지는 목소리가 있었다. 귓가를 파고드는 듣기 좋은 음성이었다.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언제나처럼 기품 있는 동작으로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저를 부르셨나요?”
“손수건을 떨어트리셨습니다.”
“…….”
그렇지만 나는 순간, 우아함을 잃고 대답 없이 입술을 벙긋대고 말았다. 하지만 변명거리는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를 불러 세운 남자가 생각지도 못한 의외의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그 머리카락과 눈 색깔은…….
“설마, 힐더 할슈리트 경?”
“예, 레이디.”
눈앞에 은발의 아름다운 소년이 서 있었다. 그의 금색 눈동자가 달빛을 받아 신비롭게 빛나고 있었다.
거울이 아니라 사람을 보며 감탄하기는 오랜만이었다.
정말이지 의외였다. 저 사람이 바로 ‘그’ 힐더 할슈리트 경이라니.
수도에는 힐더 경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드물었는데, 그가 폐하의 명령으로 수도를 떠나 있는 날이 대부분이기 때문이었다.
나 역시도, 이렇게 실물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전쟁터에서 힐더 경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붉은 비가 내린다지?’
그랬기에 나는 그의 외모가 마수처럼 무섭고 우락부락할 것이라고 제멋대로 상상하고 있었다.
사교계까지 들려오는 그의 활약상이나 광전사라는 이명처럼.
하지만, 실제로 만난 힐더 경은 그렇지 않았다.
보름달의 마력 때문이었을까?
마치 사람이 아닌 것만 같은 서늘하고 묘한 분위기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무표정마저도 그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장신구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레이디 발렌티스?”
“아? 네!”
목소리가 제멋대로 나와 버렸다.
맙소사. 내가 넋을 놓고 상대방을 쳐다보고 있었다니. 괜히 부끄러워져, 손수건을 들고 있는 그에게로 팔을 뻗었다.
“실례했어요, 경.”
나는 실수하지 않았던 척, 얼굴에 자연스러운 미소를 덧입히며 그에게 적당한 인사말을 건넸다.
“손수건 고마워요. 처음 뵈었는데 제 이름을 알고 계셨군요.”
“처음이 아닙니다. 멀리서 레이디의 모습을 뵌 적이 있습니다.”
“그러셨나요?”
“예, 신년제의 무도회였습니다.”
의외라는 생각을 하며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소문으로는 목소리를 듣기 힘들 만큼 사교성이 없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그럭저럭 말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대화를 어렵게 느끼는 건 오히려 내 쪽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힐더 할슈리트라는 유명 인사를 만났다는 사실에 굉장히 흥분한 상태였다.
이대로 더 있다가는 말을 하는 도중에 또다시 실수를 저지를지도.
‘사교계의 차기 주역이 될 내가 남들 앞에서 추태를 보일 수는 없지.’
어차피 시간이 늦었고, 이곳은 처음 만난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기에 적합한 장소도 아니었다.
나는 여기서 대화를 끝내기 위해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렸다.
“저택에서 기다리는 분이 계시기에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다리스에 영광이 있기를.”
“…다리스에 영광이 있기를.”
그에게서 조금 늦게 대답이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살짝 숙이는 것으로 답례하고는 몸을 돌렸다.
그렇게 마차를 향해 걸어가는데, 어쩐지 등 뒤에서 힐더 경의 시선이 계속 느껴지는 것 같았다.
***
“-님, 네리아 님! 괜찮으세요?”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로 인해 상념에서 깨어났다.
“토드 때문에 다치신 거죠? 제가 의원에게 모셔다 드릴게요!”
눈앞에서 듀이가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힐더 할슈리트의 얼굴이 그대로 겹쳐졌다.
‘닮았어. 특히 눈이 똑같아.’
깨닫고 보니, 확실하게 보였다.
하지만 두 사람이 서로 닮았다는 사실을 바로 떠올리지 못한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머리카락 색깔이 다른 것도 그렇지만, 두 사람이 가지고 있는 분위기가 아예 다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는 힐더 경을 만난 일이 없었으니까.’
“괜찮아. 다친 데 없어.”
“정말요? 다행이에요.”
괜찮다는 말에 듀이가 안심한 듯 가슴을 쓸어내리며 활짝 웃었다.
“응, 와 줘서 고마웠어.”
…게다가 저렇게 순진무구한 듀이에게는 힐더 할슈리트를 연상할 수 있을 법한 소재가 전혀 없었다.
형제라도 되는 걸까?
‘힐더 경에게 동생이 있다는 소문은 못 들었는데.’
아직도 헤실헤실 웃고 있는 소년을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댔다.
“듀이, 혹시 형제가 있니?”
“잘 모르겠어요. 저는 태어나자마자 보육원에 보내졌거든요.”
“그, 그래?”
그건 몰랐다. 실수했다는 생각에 말을 잇지 못하자 듀이가 더 난처해하며 손사래를 쳤다.
“저는 괜찮아요! 원래부터 가족이 없어서 신경 쓰지도 않아요.”
본인이 괜찮다는데 내가 더 말을 꺼내는 것도 실례가 되는 행동이었기에, 나는 듀이의 개인사와 관련된 주제를 적당히 갈무리했다.
어차피, 힐더 할슈리트를 닮은 이 소년에게 가장 먼저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나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 진지하면서도 정중한 목소리로 그에게 권유했다.
“듀이, 기사가 되지 않을래?”
***
별관 옆 공터에서는 매일 아침 하급 고용인들의 조회가 열린다.
집사나 하녀장을 주재로 일거리를 배분하거나 저택의 각종 지시 사항을 전달하는 자리였다.
조회는 새벽이나 다름없는 이른 시각에 시작되기에, 공터에 모인 사람들은 졸거나 피곤한 얼굴로 하품을 하고는 했다.
하지만 오늘은 이 장소를 둘러싼 공기가 평소와 전혀 달랐다.
밧줄에 칭칭 묶인 채로 공터 한가운데에 던져진 남자 때문이었다.
“이거 안 풀어? 집사님께서 네놈들을 가만히 둘 것 같아?”
얼굴이 퉁퉁 부어오른 토드가 몸을 바둥대며 나를 향해 바락바락 악다구니를 썼다.
“시끄러워! 현행범으로 잡힌 주제에 뭘 잘했다고 큰소리를 쳐?”
“내가 저놈이 저럴 줄 알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특히 여자 고용인들은 적대감을 드러내며 토드를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