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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셀프입니다 (14)화 (14/172)



<14>

“레비 도련님은 직속 하녀를 한 명밖에 두지 않으셔. 붙어 있는 사람이 많으면 귀찮다면서.”

망할 사촌의 취향 따위야 관심도 없지만, 엔의 이야기는 조금 마음에 걸렸다.

레비는 직속 하녀를 한 명밖에 두지 않는다. 그 말은 즉,

“인수인계가 끝나면 사샤는 일반 하녀로 강등돼. 엠마의 탓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자리를 뺏긴 거지.”

엔이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사샤가 안됐어. 도련님께 도움이 되겠다며, 직속 하녀가 되고 나서도 새벽까지 공부하던 애였거든.”

그녀의 목소리에서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말뿐인 동정심은 아니었다.

귀족가의 직속 하녀와 일반 하녀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커다란 차이가 존재한다.

급료나 권한의 차이부터 시작해 업무의 질이나 개인의 명예까지. 당연하지만, 직속 하녀 쪽이 모든 면에서 월등하다.

귀족의 시중을 드는 고상한 일을 하다가 더럽고 냄새나는 빨래 더미에 던져지게 되면 적응하기도 힘들고 자존심도 상할 텐데.

“도련님이 야속해. 사샤는 그렇게나 많이 노력했었는데…….”

엔과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다시 두 사람 쪽을 바라보았다.

“제국의 귀족 명부는 전부 외워 두는 게 좋겠지만, 일단은 도련님과 자주 교류하는 분들만이라도…….”

사샤는 변함없이 친절하게 설명을 계속하고 있었다. 엔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녀의 모습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그녀도 사람인 이상 억울해서 심술을 부릴 법도 하건만, 사샤에게 그런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원래 공과 사를 능숙하게 구별하는 성격인 걸까? 아니면 총애받는 동료 하녀에게 잘 보이려는 목적?

어느 쪽이라도 요령 있는 처세술이다. 객관적으로 말해, 일반 하녀로 놔두기에는 아까운 인재였다.

엠마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직속 하녀로서의 자질은 사샤 쪽이 훨씬 뛰어나 보이는데도 애인을 옆에 두겠다고 저런 사람을 내치다니.

‘레비답네.’

“엔, 우리도 이제 나가자.”

데려올 수만 있다면 내 하녀로 데려오고 싶다. 한심한 사촌에게 혀를 차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본관에서 고용인들의 숙소가 있는 별관으로 향하는 길.

“네리아는 1인용 숙소를 써서 좋겠다. 그쪽이 편하지?”

“편하긴 한데, 너무 좁아서 차라리 다인실이 나을 것 같기도 해.”

엔과 가벼운 잡담을 나누며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네리아 님!”

건너편에서 듀이가 달려오고 있었다. 마치 갈색 강아지가 돌진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듀이! 오늘 일은 다 끝났어?”

아까 듀이가 그렇게 떠나 버렸던 것이 신경 쓰이던 차였다.

평소보다 더 반가워하며 인사를 건네는데, 어쩐지 듀이의 얼굴이 평소와 달리 흙빛으로 보였다.

“무슨 일 있었어?”

“있었어요! 네리아 님의 숙소 창문이 깨져 있어요! 누가 밖에서 돌덩이를 던진 것 같았어요.”

“응? 무슨 일이 내 일이었어?”

이야기를 전한 듀이가 과도하게 당황하고 있어서인지, 당사자인 나는 오히려 침착하게 소식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런데 바깥에서 돌덩이를 던져서 창문이 깨졌다니. 설마.

“야! 트레스! 다들 짐 옮기고 있는데 왜 너 혼자만 놀고 있냐? 맞고 싶어? 빨리 안 와?”

마침, 유력한 용의자가 등장했다.

어슬렁거리며 나타난 토드가 듀이에게 윽박지르면서도, 정작 시선은 나를 향한 채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었다. 너구나?

그런데도 나에게 가까이 오지는 못하는 것을 보아하니 걷어차인 곳이 아프기는 했던 모양이었다.

“수리하려면 며칠은 걸릴 거예요. 그런데 창문이 뚫려 있으면 벌레가 들어와서 자는 게 힘들 텐데.”

“트레스 이놈이? 귀먹었냐? 내 말 안 들려?”

“제가 방을 바꿔 드릴까요? 좁긴 하지만…….”

듀이는 내 걱정이 더 컸던 것인지, 토드가 말을 걸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듀이, 난 괜찮으니까 마저 일 끝내고 와. 잠은 다른 데서 자도 돼.”

나는 그런 듀이를 안심시키며 타일렀다. 여럿이 일을 하고 있는데 듀이만 빠져 있다니, 혹시 나중에 집사에게 꾸중이라도 듣지 않을까 염려가 되어서였다.

“…네. 다녀올게요.”

듀이는 여전히 내가 염려된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일을 먼저 끝내라는 내 말에 따르기는 했다.

그는 토드를 뒤따라가면서도 힐끗힐끗 내 쪽을 뒤돌아보았다. 나는 듀이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로 손을 흔들어 주었다.

한편,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엔은 기가 막힌 듯 화를 냈다.

“창문 깬 거 토드 맞지? 유치해라. 자길 무시했다고 이런 식으로 보복을 해? 7살짜리 어린애야?”

“그러게.”

재밌네. 입꼬리를 올리며 토드가 사라진 장소를 바라보았다. 무슨 짓을 할 것 같기는 했지만 하루도 안 돼서 일을 벌일 줄은.

“그보다 네리아는 어떻게 할래? 듀이 말처럼 창문이 깨진 데선 자기 어려울 거야.”

엔이 진지하게 고민에 빠졌다.

“별관 1층 끝에 고용인용 빈방이 하나 남아 있긴 해. 그런데 거기는 잠금쇠가 고장 나서… 어?”

그녀가 중간에 말을 멈췄다. 어느샌가 엔의 표정이 불쾌하게 변해 있었다.

“혹시 그걸 노린 건가? 남은 빈방은 하나밖에 없잖아. 그런데 거긴 잠금쇠가 고장 났으니까 네가 자고 있을 때 몰래 침입한다든가…….”

“내 생각도 그래.”

엔의 의견에 동의하며, 조금 전에 토드가 지어 보였던 의미심장한 표정을 떠올렸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화풀이로 창문을 깬 것인 줄 알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닐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미친 거 아니야? 네리아, 오늘은 내 방에서 같이 자자. 침대가 작긴 해도 끼어서 자면 괜찮을 거야.”

“아냐, 빈방에서 잘게.”

나는 여유롭게 대답하며 웃었다.

“대신 창고에 뭘 좀 가지러 가려는데, 엔이 도와줄래?”

“도와줄 수야 있지만, 괜찮겠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지 않을 리가 없지. 이건 토드를 저택에서 아예 내쫓아 버릴 좋은 기회니까.

듀이는 토드의 뒤를 따라가면서도 안절부절못했다. 누가, 왜 네리아 님 방의 창문을 깬 걸까?

3개월 전의 투신 사건 이후로 네리아는 달라졌다.

그리고 그녀가 변한 이후로, 저택의 많은 고용인들이 네리아를 좋아하게 되었다.

‘몇몇 사람들은 여전히 네리아 님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 같지만.’

하지만 그건 그들이 이상한 성격일 뿐, 네리아는 모두의 호의를 받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그런 식의 괴롭힘이라니. 깨진 유리창의 파편에서는 음습한 악의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설마 나 때문인 건가? 나 같은 도둑이랑 어울리지 말라는 경고?’

문득 떠오르는 추측에, 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갔다.

네리아와 토드 사이에 벌어졌던 일을 모르는 듀이로서는, 그 외에 다른 이유를 떠올릴 수가 없었다.

‘어떡해. 어떻게 하지?’

몇 년 만에 친구가 생겼다.

심지어 그 친구가 네리아였다. 멋있고, 대단하고, 언제나 빛나는.

소년은 그 사실이 정말 행복했다.

그런데 본인 때문에 아무 잘못 없는 네리아가 피해를 당하다니.

‘내, 내가 떠, 떨어져 드려야…….’

착각이 착각의 꼬리를 물어 듀이의 머리가 폭주하려던 순간이었다.

“흐흐, 나중에 네리아에게 본때를 보여 줘야지. 건방진 것.”

앞서가던 토드가 이상한 말을 내뱉었다. 듀이는 발을 멈췄다.

“토드? 방금 뭐라고 했어?”

“너 지금 나한테 말 건 거냐? 네리아보다 먼저 네놈을 손봐 줘야겠구나.”

“창문 네가 깼어?”

“뭐라는 거야? 나는 네놈이 질문해도 된다고 허락하지 않았어. 와! 네리아 그거, 다시 생각해도 웃기네. 자기가 귀족이라도 돼?”

토드가 네리아의 말투를 따라 하며 낄낄거렸다. 듀이는 그런 토드의 모습을 노려보았다.

“그 눈, 뭐냐? 한 대 치겠다?”

“…….”

“어디 예전처럼 한번 쳐봐! 근데 네놈이 또다시 문제를 일으키면, 집사님이 네 손목을 잘라서 쫓아낸다고 하셨지? 그것도 재밌겠네.”

“…….”

“눈 안 깔아?”

거의 협박이나 다름없는 발언이었지만 듀이는 아무런 반박을 하지 못했다. 자신은 죄인이 맞으니까.

‘그런데 네리아 님에게 본때라고? 손을 봐줘?’

듀이가 눈을 내리깔며 파들거리는 양 주먹을 등 뒤로 숨겼다.

‘날 괴롭히는 건 괜찮지만…….’

“같잖은 게 까불고 있어! 빨리 가자. 나는 오늘 일이 끝나고도 바빠질 예정이거든.”

토드는 그가 굴복하는 모습에 흡족해하고는 휘파람을 불며 앞으로 걸어갔다.

듀이는 그런 토드를 뒤따라가며, 그의 뒷모습을 흉흉하게 노려보았다.

***

“심심하다. 언제 오려나?”

곰팡이 냄새가 나는 침대에 누워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하늘에 커다란 보름달이 떠 있었다.

새벽이 되었는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손님이 올 테니, 자고 있으면 당연히 안 되겠지만.

“참, 듀이에게 말을 못 하고 왔네.”

걱정하고 있으려나?

창문이 깨졌다며 당황하던 소년의 모습이 괜히 마음에 걸려, 불편한 기분으로 눈을 깜빡였다.

창밖에서는 여전히 보름달의 밝은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문득, 머릿속에 갈색 머리카락과 금색 눈동자를 가진 소년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러고 보면 처음 만났을 때부터 기시감이 느껴지는 얼굴이었지.’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생각은 계속 드는데, 정작 기억은 아직도 나지 않는다. 대체 뭘까?

답도 안 나오는데 괜히 떠올려서 답답해지기만 했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너 역시 여기 있었구나.”

나 외에 아무도 없는 방의 문이 열렸다.

본능적으로 온몸의 솜털이 곤두섰다. 침입자가 왔다. 나는 재빠르게 의식을 현실로 되돌렸다.

“창문을 깨놓으면 여기로 올 줄 알았어. 빈방은 하나밖에 없잖아?”

자고 있던 척 눈을 감았더니, 뚜벅뚜벅 발소리가 조금 더 가까워졌다. 토드는 계획이 들어맞은 것에 만족했는지 히죽대고 있었다.

“너 따위가 감히 날 건드려? 얻어맞아 봐야 제 주제를 깨닫겠지.”

아니, 얻어맞는 건 내가 아니라 너야. 나는 이불 안에 숨겨 둔 나무 몽둥이를 손에 꽉 쥐었다.

“내가 네 버릇을 손수 고쳐 주겠- 아악? 내 발-! 이거 뭐야!”

침대로 접근하던 토드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펄쩍 뛰어올랐다. 나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며 유쾌하게 입을 열었다.

“뭐야, 쥐덫을 놔뒀더니 사람이 걸렸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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