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은 셀프입니다 (12)화 (12/172)



<12>

로이엔 경과의 다음 만남은 일주일 뒤, 같은 장소에서 이루어졌다.

“셜리는 좀 어떤가요?”

“많이 좋아졌습니다. 매일 밤잠을 설치던 아이가 요즘은 늦잠을 자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이 저번보다 몇 배나 밝아져 있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네리아 님을 위해서라면,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하겠습니다.”

“고마워요. 그렇지만 경이 곤란하거나 위험해질 만한 일을 부탁할 생각은 전혀 없어요.”

예전에 했던 말처럼, 그가 내 편에 붙었다는 사실이 발각되어 보복이라도 당한다면 셜리가 혼자 남게 될 테니까.

그렇게 설명을 덧붙였더니 로이엔 경이 고개를 숙이며 표정을 가렸다. 하지만 그는 금방 감정을 추스르고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했다.

“혹시 앞으로의 계획을 여쭤봐도 될는지요?”

“물론이죠.”

목표의 공유는 중요하다. 나는 로이엔 경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확실하게 설명해 줄 필요가 있었다.

어렵게 내 손을 잡은 그가 나를 믿고 따라올 수 있도록.

“저는 우선, 귀족 신분을 되찾을 생각이에요.”

평민인 상태로는 할 수 있는 일이 지극히 제한되어 있으니까.

“그러니 그걸 위해-”

“레드 스톤이 필요하겠군요.”

“네. 그리고 레드 스톤은 본관 중앙 창고의 금고 안에 있을 거예요. 그렇죠?”

발렌티스 가문은 대대로 레드 스톤을 저택 중앙 창고 내부의 금고에 보관해 왔다.

로이엔 경이 내 말에 긍정하는 것을 보니, 이번 대에서도 예외는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저희가 레드 스톤을 어떻게 구해야 할지…….”

“정당한 방법으로는 가져올 수 없을 테니 훔쳐야겠죠.”

“하지만 중앙 창고 안에 들어가기부터가 쉽지 않을 겁니다. 가문의 재무 담당인 저조차 가주님을 따라서 한 번 가 본 것이 전부거든요.”

로이엔 경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맞는 말이기는 했다.

중앙 창고는 가문의 귀중품을 보관하는 장소인 만큼, 허락을 받지 않은 사람은 절대 출입할 수 없다.

창고의 열쇠를 소지한 자는 백작과 백작 부인, 집사까지 3명.

더욱이 내부 금고의 열쇠를 가진 사람은 가주인 백부 단 1명뿐이다.

쉽지 않을 일이었다. 그렇지만.

“금고는 열 방법이 있어요. 오히려 창고 안에 들어가는 게 더 어려운 문제인데… 그건 제가 적당한 방법을 찾는 중이니까요.”

집사에게 열쇠를 훔쳐 내든가, 지하 창고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내면 될 일이다.

“걱정하지 마세요.”

고작 그런 보물 하나 못 빼돌리는 사람이 가주의 뒤통수는 어떻게 치겠는가.

“그런 것보다 제일 중요한 문제는 그다음이에요. ‘빼돌린 레드 스톤을 어떻게 할 것인가?’ 말이지요.”

손에 넣는다고 다가 아니다.

진짜 레드 스톤을 손에 들고 백부의 눈앞에 들이대면 뭘 하겠는가.

주변에 있는 증인들과 나를 모조리 없애 진실을 은폐하면 그만인데.

“가주가 절대 부정할 수 없는 상황이 필요해요. 그런데 마침, 한 달 뒤에 적당한 무대가 열리네요.”

“설마 가문의 정기 연례 회의?”

로이엔 경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매년 그 시기에는 발렌티스 가문의 연례 회의가 열리는데, 백작가의 원로와 가신들 전원이 참석하는 자리였다.

내 할머니인 발렌티스 대부인을 오랜만에 만날 기회이기도 했다.

“저는 레드 스톤을 가지고 있다가, 그날 회의장 안으로 들어갈 거예요.”

그리고 사람들이 모두 보고 있는 앞에서 내가 가진 레드 스톤이 빛나는 모습을 보여 줄 계획이었다.

그렇게 되면, 회의에 참석한 사람 전부가 증인이 된다. 백부도 그 많은 사람의 입을 전부 막을 수는 없을 테니까.

“로이엔 경은 회의의 분위기를 지켜보다가 만약의 상황이 생겼을 때 적당히 대처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한 달 뒤의 회의가 벌써 기다려지는군요.”

로이엔 경의 얼굴에 묘한 기대감이 서린 것을 보며 나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아, 그리고 네리아 님께 알려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네?”

오늘은 이렇게 이야기가 정리된 줄 알았는데, 로이엔 경이 새로운 이야기를 꺼냈다.

***

본관 북쪽에서 별관으로 돌아오는 길.

서가를 떠나기 직전에 로이엔 경이 해 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혹시 카터 님의 기사였던 그레이 경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당연하지요! 그러고 보니, 그레이 아저씨는 어떻게 되었나요? 저택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았거든요.’

‘가주님을 따르기 싫다고 자진해서 수도 밖으로 파견을 나갔습니다. 마수 제거 작업이라던가요……. 하지만 네리아 님의 소식을 전한다면 기꺼이 수도로 돌아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일단은 만나 보고 싶네요! 그레이 경에게 연락을 보내 주세요.’

그레이 경은 아버지가 발굴한 평민 출신의 기사로, 굉장히 출중한 실력의 소유자이다.

그는 아버지께 은혜를 입고 후원받은 것에 감사를 표시하고자, 본인의 요청으로 발렌티스 가문과 종신 계약을 맺었다.

자신의 가치를 알아준 사람에게 그의 인생을 바치겠다면서.

그러나 그것이 그레이 경의 발목을 잡았다. 부모님의 사후에도 백작가를 떠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백부의 호위 기사가 되지 않겠다고 버텼다고 한다.

‘저, 그레이의 주인은 돌아가신 카터 님과 로즈 마님뿐입니다!’

당장 빈손으로 쫓겨나도 이상하지 않을 불충한 태도였다.

그렇지만 백작가에서 계약을 파기하면 그가 다른 곳으로 가 버릴 수도 있다. 강한 기사인 그를 원하는 귀족 가문은 차고 넘쳤으니까.

‘차라리 소속이라도 발렌티스 가문에 두는 것이 낫다.’

그렇게 판단한 백부는 결국, 그레이 경의 요청을 수락해 그를 수도 밖으로 보내 주었다고 한다.

‘그레이 아저씨. 감사하게도 의리를 지켜 주셨어.’

어머니에게 불륜 누명을 씌워 단단히 한몫을 챙긴 하녀장이나 집사와는 다르게 말이다.

게다가 그는 부모님이 마차 사고로 죽었던 날. 병에 걸려 호위로 따라가지 못했는데, 그 사실을 죽을 만큼 후회했다고도 한다.

찡한 감동이 밀려왔다.

‘내가 부탁하면 나에게 힘이 되어 줄지도.’

안 그래도 믿을 만한 기사가 필요했다.

우선은 그레이 경을 직접 만난 후에 판단할 문제였지만, 그는 데이브와 다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의 내가 기사인 그에게 성가시게 들러붙는데도 귀찮은 내색 없이 같이 놀아 주던 분이다.

게다가 백부의 호위가 되면 돈도 명예도 잃지 않았을 텐데, 그게 싫다고 수도를 떠나지 않았던가.

심지어 다른 기사들이 꺼리는 마수 제거 작업까지 자진해서 맡아 가면서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별관 근처로 들어서려던 때였다.

“역시! 스트레스 해소에는! 네놈이 최고구나! 아주 속이 풀리네!”

수풀 너머에서 둔탁한 타격음이 들려왔다. 안 봐도 안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알 것 같다.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이 타격감! 트레스 네가 최고야! 나는 너 없으면 어떻게 사냐?”

역시나 그곳에서는 어떤 남자 하인이 듀이에게 일방적인 폭행을 가하고 있었다.

듀이는 남자에게 저항하지도 못하고 팔로 얼굴을 가리고만 있었다.

내가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듀이의 얼굴이 밝아 보여서 몰랐는데, 아직도 이런 짓이 벌어지고 있었다니.

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수풀을 헤치고 안으로 발을 들였다. 남자의 이름이 분명 토드였지?

“토-”

“오늘도 재밌었다! 야, 트레스. 나 먼저 간다.”

토드에게 뭐라고 말이라도 해 줄 생각이었건만, 그는 내가 말을 걸기도 전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듀이!”

나는 토드를 쫓는 대신 곧바로 잔디밭에 쓰러져 있는 소년에게로 다가갔다. 듀이는 여전히 팔로 얼굴을 가리고 바닥에서 일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괜찮아? 일어설 수 있겠어?”

“…괜찮아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였다. 서둘러 듀이의 몸을 부축해서 세웠는데, 그의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맞은 곳이 아프기보다는 얻어맞은 모습을 나에게 들킨 것에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저번과 다르게 지금은 친구가 된 사이니까.

나는 흙이 묻은 듀이의 상의를 툭툭 털어 주며, 일부러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런 애들 꼭 하나씩 있지? 나도 당해 봐서 알아.”

“…….”

“약 바르러 가자. 연고 있거든.”

“…아니에요. 저는 일이 바빠서 먼저 가 볼게요!”

듀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반대편으로 쌩 도망가 버렸다. 나는 그런 소년의 뒷모습을 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너도 토드에게 맞서서 싸워!’라는 무책임한 말은 할 수 없었다. 듀이는 이곳에 있는 다른 고용인들과는 처지가 다르니까.

나는 그가 떠난 자리에 가만히 서서 일전에 다른 동료 하녀들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넌 왜 트레스랑 어울리는 거야?’

‘트레스가 아니라 듀이. 다들, 앞으로는 듀이라고 불러 줬으면 해.’

‘듀이? 트레스가 원래 이름이 아니었어? 아무튼 왜 그런 애랑 같이 다녀? 찝찝하지 않아?’

‘찝찝하다니, 왜? 듀이가 착하고 성실한 건 다들 알고 있잖아?’

‘그럼 뭘 해? 도둑인데. 걔가 내 물건까지 훔쳐 가면 어떡해?’

듀이가 도둑이라고?

의아해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누군가가 자세한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네리아는 기억상실이라서 몰랐을 수도 있겠다. 그 애가 발렌티스 저택에 들어온 것도 백작가의 목걸이를 훔친 게 들통나서였거든.’

‘평민이 귀족의 재산을 훔치면 벌로 손목이 잘리잖아? 그 애는 처벌을 받는 대신 여기서 무보수로 일하고 있는 거야.’

…그런 일이 있었어?

듀이의 과거나 그걸 빌미로 사람을 공짜 노예로 삼은 백작가 등.

생각해 볼 부분이 많았지만, 일단은 듀이에 대한 다른 동료들의 인식을 바꾸는 게 먼저였다.

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듀이가 저택에 들어와서도 똑같은 일을 벌인 적이 있어?’

‘아니, 그렇지는 않지만…….’

‘그렇다면 듀이의 바뀐 모습을 봐 주면 안 될까? 너희는 내가 변한 모습도 인정해 줬잖아.’

‘너랑 걔는 다르지! 트레스, 아니. 듀이는 범죄자란 말이야!’

‘살다 보면 다들 실수는 해. 그런 일이 또 생긴다면 나도 같이 책임질게. 난 듀이를 믿거든.’

‘…알았어. 네리아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그날의 대화는 그렇게 정리되었지만, 이야기를 들은 덕분에 알게 된 바가 있긴 했다.

듀이는 왜 저택의 사람들에게 미움받는 걸까? 그리고 왜 같은 고용인들에게도 존댓말을 쓰는 걸까?

예전부터 이유가 궁금했었다. 그런데 듀이가 백작가의 물건을 훔친 일이 있었다니.

하지만 나는 듀이를 비난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가 도둑질을 했다면, 거기엔 생계 문제라든가 어떤 절박한 사정이 있지 않았을까. 같은 행동이라도 사람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는 건 당연했다.

‘토드 같은 인간이 도둑질을 했다면 나도 같이 비난했겠지만.’

어쨌거나 듀이를 도울 방법이 없을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