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은 셀프입니다 (9)화 (9/172)



<9>

“소피 부인, 안녕하세요.”

“어서 오렴! 네 얼굴을 보니까 내 기분이 다 좋아지는구나. 여기는 어쩐 일이니?”

발렌티스 저택의 약재 보관실.

꼴에 본인의 건강은 잘도 챙기는 백부의 성격 덕분에 다양한 종류의 약재를 구비한 곳이다.

그곳의 책임자인 소피 부인은 밝아진 얼굴로 나를 맞아 주었다. 그녀와는 이미 안면을 튼 바가 있었다.

어느 날 약재실 내부의 책장이 무너졌을 때, 이른 새벽부터 그녀를 도와 책장을 복구한 것이 계기였다.

다음 날 몸살이 났을 만큼 고생이 많았으나 소피 부인과 친분을 쌓게 된 것은 큰 수확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나 역시 웃는 얼굴로 화답하며 그녀에게 종이쪽지 하나를 건넸다.

“부탁드릴 것이 있어서요. 여기 이것들을 얻을 수 있을까요?”

셜리의 약에 들어갈 재료들이다. 종이를 훑어본 소피 부인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재고가 있는 것들이네.”

그녀는 나에게 잠시 기다려 달라 말하고는 서랍 안에서 두꺼운 노트 하나를 꺼냈다.

표지에는 ‘반출 기록서’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이곳에서 약재료를 가져가는 사람의 이름과 약의 이름, 수량을 기록해 두는 장부였다.

나는 노트를 힐끗 쳐다본 뒤, 소피 부인의 손을 은근슬쩍 붙잡아 그녀의 행동을 멈추게 했다.

“부인, 잠깐만요.”

그러고는 비밀 이야기를 하듯이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저는 심부름으로 온 게 아니에요.”

“응? 심부름이 아니라면…….”

“그게 사실은… 제가 개인적으로 필요한 것이어서요.”

흔하거나 값이 저렴한 약재는 상점에서 직접 사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구하기 힘든 마법 약재들이나 가격이 비싼 재료들은 평민인 내가 구입할 방법이 없다.

그랬기에 소피 부인을 찾은 것이었으나, 목적을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적당한 핑계를 대기 위해 불필요한 재료 몇 가지를 더 섞어 다른 용도처럼 보이게 했다.

“어머나, 그러고 보니 월경통에 쓰는 재료들이 보이는구나.”

“네……. 어제는 배가 너무 아파서 잠도 제대로 못 잤거든요.”

일부러 힘든 표정을 짓자, 그녀가 이해한다는 눈빛을 보내왔다.

“이건 아는 분이 알려 주신 처방전이에요. 양도 많지 않은데, 부인의 재량으로 어떻게 안 될까요?”

“으음…….”

기록 없이 저택의 비품을 가져가는 건 엄밀히 따지자면 횡령이다.

하지만 3개월 동안 고용인으로 생활해 본 바에 따르면, 소소한 수준의 물품을 챙기는 것쯤은 눈을 감아 주는 분위기였다.

저택에서 버리려는 물건을 주워가거나, 동료 하녀가 라일라의 간식을 만들고 남은 반죽으로 쿠키를 만들어 먹은 것처럼.

지금도 책임자인 그녀의 선에서 충분히 처리할 수 있는 수준임을 알기에 부탁한 것이었다.

‘게다가 난치병의 치료제치고는 엄청 특이한 재료가 필요한 것도 아니니까.’

“안 될 건 없지, 약재들은 손실분을 고려해서 기록보다 넉넉하게 구비하고 있거든.”

예상했던 대로 소피 부인은 흔쾌히 내 부탁을 수락해 주었다.

“그렇지만 네리아니까 특별히 주는 거야. 알지? 대신 종종 놀러 와서 예쁜 얼굴 자주 보여 줘!”

“그럼요!”

연줄의 중요성은 신분을 가리지 않는 법이다. 역시, 사람들과 사이가 좋아서 손해 볼 일은 없어.

보관함에서 재료를 꺼내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지난 3개월간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고 홀로 자부심을 느꼈다.

“자, 여기 있다. 가져가렴.”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약을 받아 간 건 비밀로 부탁드릴게요.”

“당연하지. 비밀로 하지 않으면 내가 더 곤란해. 그런데 여기 적힌 ‘그늘에서 말린 무지개 도롱뇽의 꼬리 가루’ 말인데.”

소피 부인이 사람 좋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건 햇빛을 받으면 안 되는 약이라서 저택의 후문 지하실에 보관해 놨어. 거긴 지키는 사람이 없으니까 가서 가져오면 된단다.”

“알려 주셔서 감사드려요!”

싹싹한 태도로 소피 부인에게 인사한 뒤 약재실을 빠져나왔다.

이제 남은 재료는 하나뿐.

‘그런데 하필 후문 지하 창고라니.’

걸음을 멈추고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다지 가고 싶지 않은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안 갈 수도 없고.”

어쩔 수 없지. 한숨을 내쉬며 어딘가로 발을 옮겼다.

***

하지만 내가 도착한 장소는 후문이 아닌 저택의 마구간이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마구간 안쪽을 바라보니, 그곳에서 듀이가 말에게 여물을 나눠 주고 있었다.

“열심히 하고 있네.”

말은 듀이와 사이가 좋았는지, 그의 팔에 머리를 비비고 있었다.

“어? 네리아 님?”

그러다가 소년이 나를 발견했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내가 있는 쪽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 반동으로 듀이가 들고 있던 자루에서 건초가 줄줄 떨어졌지만, 많은 양이 아니었기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안녕, 듀이.”

내 앞에 도착해 헤실거리는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쩐지 친동생인 루이케보다 더 동생 같다.

“부탁이 있어서 왔어. 잠깐 시간 괜찮아? 15분 정도면 돼.”

“네! 마침 말한테 먹이 주는 일도 다 끝났거든요. 이것만 넣어 놓고 올게요.”

듀이가 마구간 옆의 창고로 달려가더니 이번에는 빈손이 된 상태로 다시 돌아왔다.

“어떤 부탁이세요?”

뭐든 시켜만 달라는 의욕적인 모습에 웃음을 터트렸다. 이래서야 친구가 아니라 부하 같잖아?

그래도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하면 비교도 안 될 만큼 밝아졌다.

‘그때의 듀이는 말을 더듬거리고 대화를 길게 하지도 못했으니까.’

듀이 역시 네리아와 다름없는 저택의 외톨이였다. 제대로 된 대화 상대가 없으니 말을 버벅댈 수밖에.

그래서 나는 듀이와 함께 아침 식사를 먹으며 일부러 그에게 말을 많이 시키고는 했었다.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사귄 친구를 계속 외톨이로 놔두고 싶지 않아서였다.

덕분에 지금은 많이 발전했지. 뿌듯해하며 웃다가 입을 열었다.

“필요한 물건이 있는데, 그게 후문 지하 창고에 있거든. 나랑 같이 가 줬으면 해.”

“무거운 물건을 들고 오는 건가요? 저 힘쓰는 일은 자신 있어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마구간에서 후문까지는 거리가 있다. 나는 듀이와 나란히 걸어가며 침울하게 어깨를 늘어트렸다.

“내가 후문 지하실에 못 들어가. 안 좋은 기억이 있어서.”

“안 좋은 기억이요?”

“응, 어릴 때 거기서 무서운 걸 봤었거든.”

8살인가, 9살 무렵이었던가.

저녁 식사 시간에 부모님이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네리아, 후문 지하실에는 절대 들어가면 안 돼. 알겠지? 약속해!’

하지만 부모님과의 약속을 고분고분 지키기에는 세상에 궁금한 점이 너무나 많던 나이였다.

어린 나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했고, 그 앞을 지키던 경비병에게 설사약을 먹이고 몰래 지하실 안으로 들어갔었다.

‘정작 거기서 뭘 봤는지는 기억도 안 나지만.’

너무 무서운 나머지 기억에서 지워 버렸던 것 같다. 후문 지하실이라는 장소 자체에 트라우마가 생겼을 정도였으니.

더욱이 약속을 어기고, 친절한 경비병에게 이상한 약까지 먹였다는 죄책감에 일주일을 앓아눕기까지 했다.

‘…혼날 것 같아서 부모님께는 말하지도 못했지.’

크게 반성하고는 그 뒤로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듣는 아이로 변모하는 계기가 되었던 일이었다.

“어릴 때 받은 충격은 오래가니까요. 앞으로 그쪽에 볼일이 생길 때는 제가 대신 갈게요!”

“말만으로도 고마워. 지하실에 가면 ‘그늘에서 말린 무지개 도롱뇽의 꼬리 가루’를 가져와 줄래?”

“이, 이름이 기네요.”

“그렇긴 하지? 참고로 꼬리 가루가 어떻게 생겼냐면.”

듀이에게 약재의 외관적인 특징을 자세하게 알려 주었다.

성실하게 설명을 들은 듀이는 착오 없이 한 번에 목표물을 가져왔고, 덕분에 나는 마지막 재료를 무사히 획득할 수 있게 되었다.

***

셜리는 엄마의 부재로 외로움을 느껴서였는지, 종종 부친을 따라 발렌티스 저택에 방문하고는 했다.

그리고 그건 이 세계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셜리 아가씨, 어서 오세요!”

저택에 귀여운 6살 꼬마 아가씨가 등장하자 하녀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다들 안녕! 오늘도 잘 부탁해!”

셜리가 씩씩하게 인사했다.

얼굴을 뒤덮은 검은 반점 따위는 신경도 안 쓰일 만큼, 셜리는 여전히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비비, 오늘은 그림을 그리고 놀자!”

“아쉽지만 오늘은 다른 사람이 셜리 아가씨랑 같이 있을 거예요.”

“다른 사람? 누구?”

아이가 주변을 두리번대는 동안 나는 비비의 손짓에 맞춰 아이의 앞으로 걸어 나갔다.

“셜리 님, 처음 뵙겠습니다. 제 이름은 네리아랍니다.”

“꺅?”

하지만 아이는 나를 보자마자 팔짝 뛰어오르더니 비비의 뒤로 도망가 버렸다.

비비의 치마 뒤에서 셜리가 빼꼼 얼굴을 내밀었지만 나와 눈이 마주치자 다시 숨어 버렸다.

“우리 아가씨가 왜 도망가신 걸까요? 낯설어서 그러신 거예요?”

“네리아 예쁘다! 진짜 예쁘다!”

“부끄러우셨던 거네요.”

비비가 숨어 있던 셜리를 안아 들고는 나에게 넘겼다.

“꺅!”

내 품에 안긴 아이가 힘껏 눈을 감았지만, 떨어지기는 싫다는 듯 팔을 내 목에 꼭 두르고 있었다.

“저랑 같이 그림 그리러 갈까요?”

힘겹게 웃음을 참으며 셜리를 저택 안으로 데려갔다.

비비가 알려 준 놀이실에는 이미 귀족 여아 전용 놀이 도구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스케치북과 어린이용 펜을 가져와 아이의 앞에 두었다.

“셜리는 뭘 그릴 거야?”

근처에 다른 사람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옛 생각이 났던 건지. 순간적으로 편한 말투가 나와 버렸다.

“네리아 그릴래! 네리아는 란타나 님처럼 예쁘니까!”

하지만 다행히도 아이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슥슥. 하얀 백지 위에 내 얼굴이 그려졌다. 나는 이번에도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아야 했다.

‘작년에 나한테 그려 줬던 그림이랑 거의 똑같잖아?’

사지석화증으로 누워 있을 때, 셜 리가 병문안을 온 적이 있었다.

본인도 병을 앓아 아프면서, 내가 아프면 안 된다고 얼마나 서럽게 울던지.

선물로 그림을 그려 달라는 내 부탁에, 작은 손으로 꼬물꼬물 열심히도 내 초상화를 그려 주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