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너한테 볼 일이 있으니 가지 말고 제자리에 있도록 해.”
오늘도 하녀장을 꼬리로 달고 있는 사촌 자매, 라일라였다.
“집사는 들어가 봐. 그리고 너, 이게 뭔 줄 아니?”
전혀 반갑지 않은 기분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라일라의 손에 편지 한 통이 들려 있었다.
그녀의 질문은 편지의 내용을 묻는 것이겠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전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모르겠다고 대답하려고 했으나 입을 열기도 전에 하얀색 종이가 눈앞으로 날아왔다.
라일라가 내 얼굴에 편지를 집어 던진 것이었다.
“오늘 오전에 도착한 체스터 가문의 서한이야. 네가 어제 체스터 영식을 찾아가 대단한 결례를 저질렀다며?”
“그게 무슨?”
“편지에는 고용인 관리에 신경 써 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어. 너 제정신이니? 너 때문에 발렌티스 가문이 항의를 받았잖아.”
…맙소사.
또다시 귀를 의심했다. 밀치고 모욕하는 걸로도 부족해 가문의 이름으로 서한까지 보내?
그 편지 한 통으로 내가 무슨 짓을 당할지 귀족인 데이브가 모르지도 않았을 텐데.
그에게는 더 실망할 일이 없을 줄 알았다. 데이브라는 인간의 밑바닥을 본 기분이었다.
“내가 분명 다쳤다고 봐주는 건 끝이라고 했지? 마릴린!”
“예, 아가씨.”
“말귀를 못 알아듣는 하녀는 매로 다스려야지. 앞으로는 네리아가 함부로 나대지 못하도록 제대로 교육해.”
“맡겨만 주십시오.”
라일라는 나를 쓰레기라도 되는 것처럼 쳐다보고는 다시 저택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데이브, 이 망할…….’
전 약혼자였던 그에게 이를 갈았지만 당장에 바뀌는 것은 없다.
내 시선이 자연스럽게 자리에 남은 마릴린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허리 뒤에서 회초리를 꺼내고 있었다. 설마 그걸로 날 때리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말을 듣지 않는 하녀에게는 내가 손수 교육을 해 줘야겠지.”
“교육? 너는 그걸 교육이라고 부르는 게 맞다고 생각해?”
“새벽까지 얻어맞고 싶은 게 아니라면, 앞으로는 말을 할 때도 예의를 갖추는 게 좋겠구나.”
그녀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아픈 건 무섭지 않다.
사지석화증으로 감각이 없어졌던 것보다는 차라리 나았으니까.
데이브를 찾아갔던 건 나의 판단 착오였고, 회초리질을 당하는 것이 실수의 대가라면 반성 차원에서 한 번쯤은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뭐를?”
“하녀장님이 제 어머니가 불륜을 저지르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들었어요. 그 증언이 사실인가요?”
먼저 자리를 떠났던 집사에게도 물어보고 싶었던 말이었다.
“대답할 가치도 없는 질문이구나. 당연히 사실이지 않겠니?”
“목숨을 걸고, 거짓말이 아니라고 신 앞에 맹세할 수 있어요?”
“물론.”
즉답이었다. 마릴린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도 않는 건지 일말의 표정 변화조차 없었다.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나는 그녀의 대답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리아를 괴롭힌 것부터 지금의 거짓말까지,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해 주겠다고 다짐하면서.
“다 끝났으면 시작하자꾸나.”
“안 돼요! 자, 잠깐만요!”
생각지도 못했던 누군가가 마릴린과 나 사이에 끼어들었다.
“넌……?”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제는 꽤 익숙해진 얼굴의 주인은 어제 빵을 같이 나눠 먹은 갈색 머리 소년이었다.
뜬금없는 그의 등장에 내가 의아해하는 동안, 마릴린은 하려던 일을 방해받은 것에 화를 냈다.
“트레스! 걸리적대지 말고 당장 꺼지지 못해?”
“제, 제가 대신 맞을게요……!”
“뭐라고?”
헛소리라도 들었다는 듯이 그녀가 표정을 구겼다.
“네놈이 네리아를 대신해서 맞겠다고?”
“네! 제가 대신 맞게 해 주세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네가 뭔데 끼어들어?”
마릴린의 말에 동의하기는 싫지만, 나 역시 같은 질문을 하고 싶기는 했다. 네가 왜?
“그냥 가. 굳이 그러지 않아도 나는 괜찮-”
“방해하지 말고 저리 안 꺼져? 손목을 잘리고 싶어서 나한테 대드는 거니, 트레스?”
“그, 그래도 제가 마, 맞을게요!”
“저택의 쓰레기들이 사이좋게 뭉친 걸 보니 같잖아서, 원!”
마릴린이 눈을 부라리며 위협을 가하는데도 소년은 물러서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뒷전이 되어 버린 나는 이 갑작스러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안 가겠다 이거야? 그래, 좋다! 둘 다 사이좋게 매질을 당해 봐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마릴린이 분노로 씩씩대며 팔까지 걷어붙였다.
갈색 머리 소년이 나를 감싸 주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더는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소년의 팔을 잡아당겨 내 뒤로 보냈다. 괜히 내 편을 들었다가 그에게까지 불똥이 튈 것 같아서였다.
“이 애는 상관없으니까 보내 줘요.”
“서로 감싸 주면 내가 감동해서 용서해 주기라도 할 줄 알았니? 입 다물고 둘 다 처맞도록 해!”
그녀가 나에게 회초리를 휘두르려고 했다. 그렇지만 동시에 소년이 또다시 마릴린과 나 사이에 끼어들었다.
“아니, 왜? 난 괜찮으니까 그냥 가라니까?”
“아니에요. 저, 저는 많이 맞아 봐서 이 정도는 괜찮아요.”
“이것들이 지금 장난해? 어이! 거기, 너! 이것들이 못 움직이게 꽉 붙잡아!”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하인이 마릴린의 명령에 따라 소년과 나를 붙잡았다.
그리고 바로 직후에 눈앞으로 매가 날아왔지만, 소년이 재빠르게 몸을 날려 내 앞을 막아섰다.
“응?”
정식으로 검을 가르쳐도 괜찮겠다- 무심결에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신속한 움직임이었다.
“이게 진짜!”
그에 바짝 약이 오른 마릴린이 회초리를 막무가내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잠깐, 하녀장님! 잠시만요!”
그러다가 졸지에 나와 소년을 붙잡고 있던 하인까지 같이 얻어맞는 등, 내 체벌 현장은 우당탕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아니, 대체 이게 다 뭐야?’
맞는 게 무서운 건 아니었다.
하지만 생전 처음 당하는 매질에 눈물방울 정도는 흘릴 만큼 굴욕적인 시간을 보낼 줄 알았는데.
“하녀장님? 저까지 맞았어요! 팔뚝이 따갑습니다!”
“알 게 뭐야? 그러게 똑바로 잡고 있었어야지!”
다른 의미로 아수라장이 되어 버린 마릴린의 매질 시간은 그녀의 팔 힘이 다하는 것으로 결국 끝이 났다.
***
갈색 머리 소년과 나는 흙바닥에 나란히 앉아 말없이 멍하게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녀장에게 회초리를 맞은 등이나 팔뚝이 따끔거렸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매를 맞은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소년이 내 앞을 막아 준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기분이 들어서였다.
“…….”
나는 고개를 돌려 내 옆에 앉아 있는 소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네?”
“아까 왜 날 도와줬어?”
소년이 내 앞을 막아섰을 때부터 계속 묻고 싶었던 말이었다. 너에게는 그럴 이유가 없잖아?
트레스(쓰레기)라고 불리거나 같은 하인에게 폭행을 당하는 모습을 보며 예상은 했지만, 소년은 저택 내에서 취급이 좋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데 어째서 날 위해 나서 준 걸까? 말단 하인이 하녀장을 거슬러서 좋을 일이 없을 텐데.
“저는…….”
“부탁해. 네 대답이 듣고 싶어.”
나는 내 처지를 그럭저럭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원래 신분을 되찾겠다. 그 목적을 위해 조력자를 만들어야 했지만, 지금의 나는 가진 게 없다.
과연 하녀 신세인 내가 저택에서 어떻게 내 편을 만들 수 있을까?
나를 돕는다고 해도 당장 지불할 수 있는 대가가 아무것도 없는데.
돈도 권력도 외모도, 처음부터 전부 가지고 있었던 나에게는 굉장히 어려운 고민거리였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벌써 내 편이 되어 준 사람이 있었다.
왜였을까? 그 이유가 나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어제, 저한테 빵… 나눠 주셔서.”
빵? 고용인 식당에 가면 아무 때나 먹을 수 있는 그 맛없는 빵?
“저번에 잔디밭에서는 저한테 고맙다는 말도 해 주셨고…….”
소년의 이야기를 들으며 며칠 전의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를 말하는 건가? 내가 잔디밭에서 일어서지 못하고 있으니까 그가 손을 내밀어 줬던.
“겨우 그게 뭐라고? 도움을 받았으니 인사를 하는 건 당연한 거야.”
“그, 그렇지만 저는 그런 인사를 들어 본 적이 처음이어서… 기뻤어요.”
쑥스러운 듯, 소년의 양쪽 뺨이 붉게 변해 갔다.
“그래서… 어떻게든 보답하고 싶었는데 저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그가 고개를 아래로 푹 숙였다.
“저는 대단한 건 못 하니까 맞는 거라도 대신…….”
“…….”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지 몰라 잠깐 침묵했다.
고작 그런 것들 때문에 하녀장을 거스르면서까지 나를 위해 나서주다니.
“…고마워.”
이런 상황이었는데, 어쩐지 입가에는 미소가 지어졌다.
“실례가 안 된다면 다시 물어볼게. 네 진짜 이름이 뭐야?”
소년은 낯선 세계에 떨어진 내가 처음으로 사귄 인연이었다. 그런 그를 쓰레기 따위의 호칭으로 부르고 싶지 않았다.
“…듀이.”
한참을 우물거리던 소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듀이라고 해요.”
“그렇구나. 도와줘서 고마워.”
손을 들어 그의 손을 붙잡았다.
난데없는 접촉에 소년이 몸을 움츠렸으나 나에게서 손을 빼지는 않았다.
“듀이, 내 친구가 되어 주지 않을래?”
“네?”
갑작스러운 권유에 그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하지만 곧, 소년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네……! 친구가 될게요!”
어쩐지 듀이는 친구라는 말에 무척이나 기뻐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보며 나도 함께 웃었다.
“고마워, 정말.”
덕분에 알게 되었다. 타인의 마음 얻는 데는 꼭 물질적인 대가가 필요한 게 아니라는 것을.
‘귀족이 아니라도 괜찮아.’
어쩌면 작은 호의나 도움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다.
‘우선은 동료 하녀들과 친분부터 쌓아야겠지?’
근거 있는 자신감이 생겨났다. 앞으로의 계획이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
발렌티스 저택의 하녀들은 네리아를 비난하며 그렇게 말했었다. 있어 봐야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그럼, 내가 도움이 된다면?’
사람들은 일을 잘하는 사람을 싫어하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의 본분인 하녀 업무를 제대로 해내자. 적어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그들에게 보여 주자. 그렇게 다짐했다.
그런데 원래 세계에서도 완벽을 추구하던 성격이 여기라고 바뀔 리 없었기 때문일까.
‘사자는 토끼를 사냥할 때도 최선을 다해.’
하녀 일도 예외가 아니었다.
귀족의 자존심을 버린 게 아니었다. 허드렛일마저 완벽하게 해내는 것이 나의 자존심이었다.
처음 결심했던 것 이상으로 새로운 일에 몰두해 버리고 말았고, 그리하여 3개월 뒤.
펄럭-
빨랫줄에 걸어 놓은 침대 시트에서 유독 새하얗게 빛이 났다. 훌륭한 결과물이었다.
근처에서 이쪽을 지켜보던 동료 하녀 엔은 감탄사까지 내뱉고 있었다.
‘나, 하녀 일에도 재능 있는 거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