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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셀프입니다 (6)화 (6/172)



<6>

다음 날, 나름의 결의를 다지기 위해 옷장 안에서 가장 깨끗한 옷을 꺼내 입었다.

‘다 똑같은 하녀복이긴 하지만.’

검은색 치맛자락에 묻은 먼지를 무심하게 털어 내며, 어젯밤에 고민했던 문제를 떠올렸다.

나의 진짜 신분을 증명할 방법에 관하여.

하지만 고민이라는 표현이 무색할 만큼, 나는 이미 확실한 해결책을 알고 있었다.

바로 발렌티스 가문이 소유 중인 마도구, 레드 스톤을 사용하는 것이다.

“다만 그 과정이 어렵고 복잡하기는 하겠지.”

그래서 좀 더 편한 길을 찾고자 데이브를 만났으나 결과는 최악의 실패였다.

‘그러니 내가 살 길은 내가 직접 찾아야 해.’

내 인생의 구원자는 바로 나 자신뿐. 창문 너머의 포효하는 사자상을 바라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

‘레드 스톤’이란 사람의 피를 넣어 만든 마도구이다.

가주 계승식에서 새로운 가주의 피를 레드 스톤에 떨어트리는 의식이 필수로 들어갈 만큼 중요한 물건이기도 했다.

사용 방법은 매우 간단한데, 그냥 손에 들고만 있으면 된다.

외부인에게는 평범한 돌이나 마찬가지이나, 가주와 피가 이어진 사람이 레드 스톤을 손에 쥐면 보석에서 붉은빛이 나기 때문이었다.

특히 현 가주와 관계가 가까울수록 보석이 내뿜는 빛이 밝아진다.

그렇기에 출생이 불분명한 아이의 친자 유무를 가려내는 데 유용하게 사용되기도 했다.

‘바로 나 같은 경우를 말해.’

8년 전에도 레드 스톤을 사용한 판별이 있었다. 그런데도 네리아는 사생아라는 결과를 받았다.

그때는 과연 백부가 어떤 속임수를 썼던 걸까? 대책을 세우기 위해서는 좀 더 자세한 상황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잠깐! 너는 들어갈 수 없어.”

저택의 본관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안쪽에 있던 하인 두 명이 내 움직임을 막아섰다.

“너는 당분간 본관 출입 금지라고 했잖아. 벌써 잊었어?”

“알아. 그래도 들여보내 줘. 나는 백작님을 만나러 온 거니까.”

“뭐라고? 네가 가주님을?”

내 말을 들은 하인들이 배를 잡아 가며 폭소를 터트렸다.

“그분이 네 친구라도 되는 줄 알아? 만나고 싶으면 만날 수 있게?”

“그래도 꼭 백작님을 뵈어야 해. 중요하게 드릴 말씀이 있단 말이야.”

“네가 머리를 제대로 다쳤구나? 가주님은 네가 원한다고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란다. 당장 꺼져.”

“너희들, 내가 말하려는 게 뭔지나 알고 날 막는 거야?”

“뭐?”

“머리를 다치면서 어렸을 때의 기억이 섞인 건지… 갑자기 발렌티스 가문에 대한 중요한 정보가 떠올랐거든.”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는 듯이 진지하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가주님도 아셔야 할 문제야. 말씀을 전하지 못해서 문제라도 생기면, 너희가 책임질 수 있겠어?”

하급 고용인을 움직이게 만드는 효과적인 방법은 그들에게 책임 소재를 들먹이는 것이다.

“그, 그건…….”

역시나 하인들은 덩달아 심각한 얼굴이 되더니 그들끼리 수군수군 귓속말을 시작했다. 그러고는 한 명이 본관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남아 있는 하인에게 모르는 척 다시 말을 걸었다.

“어쩔 거야? 그냥 이대로 돌아갈까? 그래도 괜찮겠어?”

“잠깐 기다려 봐. 방금 들어간 녀석이 웃전에 보고하러 간 거니까.”

“그래?”

서로 못마땅한 기색으로 서 있기를 수분 뒤, 저택 안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올라간 콧수염이 특징적인 중년 남자는 발렌티스 백작가의 현재 집사였다.

“이 멍청한 놈들 같으니라고! 고작 저런 거짓말에 휘둘려 나를 찾아와?”

“집사님, 하지만 네리아도 나름대로 백작가의 딸이었던 시절이 있고…….”

“그런 말에 속으니까 네놈이 멍청하다는 뜻이야! 저딴 것에게 가주님께 드릴 만한 중요한 정보가 대체 뭐가 있겠느냔 말이다!”

집사가 하인에게 호통치는 모습을 바라보며 입가에 냉소를 머금었다.

‘이것 참, 오랜만이라고 해야 좋을지.’

발렌티스 가문의 가주가 아버지에서 백부로 바뀌었을 때, 저택의 고용인 대부분이 물갈이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남아 있는 사람이 극소수 존재했는데, 바로 집사와 하녀장 마릴린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지금, 저택의 최상위급 관리자가 되어 있었다.

원래는 그저 그런 하급 고용인이었던 자들이 여기까지 출세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들은 백부를 위해 내 어머니가 불륜을 저질렀다는 거짓말을 했고, 그 보상으로 높은 자리를 꿰찬 것이다.

‘둘 외에도 말을 보탠 사람이 한 명 더 있다고 들었지만.’

하지만 그는 다른 가문으로 소속을 옮겨 부집사가 되었다고 한다. 이 더럽고 비겁한 기회주의자들 같으니라고.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어디 들어나 보자. 네리아?”

어느새 집사는 거드름을 피우며 내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가주님께 전한다는 정보가 뭐지? 당연하지만, 네깟 것이 가주님을 뵐 수는 없다.”

물론 그렇겠지. 나도 내가 백부를 대면할 수 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내가 만나려던 사람은 바로 눈앞의 남자, 집사였으니까.

만약 하인들에게 처음부터 집사를 만나게 해 달라고 말했다면, 그들은 내 요청을 대수롭지 않게 취급하며 무시했을 터였다.

가주씩이나 되는 인물을 거론했기에 내 용건이 중요하게 취급되었고, 고용인 중에서 급이 높은 집사에게 이야기가 전해진 것이다.

“그럼 집사가 백작님께 전해 줄래? 나는 사생아가 아니라 전대 가주인 카터 발렌티스의 친자가 확실하다고 말이야.”

“…설마, 그딴 걸 중요한 정보랍시고 내뱉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 설마가 맞는데?”

중요한 거 맞잖아?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더니 집사의 얼굴이 울긋불긋해지기 시작했다.

“네놈이…….”

그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나를 향해 노성을 내질렀다.

“감히 날 상대로 장난질을 쳐-! 머리를 한 번 더 다쳐야지 제정신을 차릴 테냐?”

“장난이 아니야. 그러니까 나한테 발렌티스 가문의 레드 스톤을 줘. 그러면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거 아냐.”

“레드 스톤? 믿는 구석이 고작 그거였어?”

그렇게 반문하는 집사의 얼굴에 비웃음이 걸렸다.

“미안하지만 레드 스톤을 이용한 확인은 이미 8년 전에 끝났다. 그걸 위해 가주님께서 긴급회의를 소집했을 정도였지. 아직도 그날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나는구나.”

오호라, 그렇단 말이지?

기대했던 대로 집사에게서 그 당시의 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좀 더 구체적인 정황을 캐내기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난 그런 기억이 없는데? 그럼 내가 보석을 손에 쥐었는데도 빛이 나지 않았다는 말이야?”

“당연히 그랬으니 네가 사생아라는 판결이 난 것이겠지?”

“거, 거짓말! 그럴 리가-!”

없지. 원래 세계에서 14살 즈음이 되었을 무렵에 호기심으로 레드 스톤을 만져 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손끝이 닿은 것만으로도 보석이 환한 빛을 뿜어냈는데, 여기라고 해서 다를 리가 없었다.

“못 믿겠어! 네가 직접 본 것도 아니잖아? 그때 회의에 참여했던 분을 만나서 네 말이 사실인지 확인해야겠어!”

흥분한 듯 과장된 자세로 발을 옮기려는데 집사가 나를 붙잡았다.

“그럴 필요 없다. 나 역시도 회의실에서 그 장면을 직접 목격했으니 말이다.”

“뭐? 정말이야?”

집사 역시도 불륜의 증인 자격으로 그 자리에 동석했을 거라는 추측 정도는 했었다.

하지만 모르는 척 되묻자, 그가 코웃음 치며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긍정의 의미였다.

“…그러면 레드 스톤에서 정말 빛이 나지 않았다는 거구나.”

나는 날뛰던 것을 멈추고 일부러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그러고는 체념한 듯이 입을 열었다.

“그럼 회의 때 상황이 어땠는지 말해 줄 수 있어? 내 기억엔 없으니까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그래.”

불쌍한 척, 눈가에 눈물 한 방울도 매달았다.

“이야기를 듣다 보면 다시 기억이 날지도 모르잖아? 그것만 가르쳐 주면 나도 납득하고 더는 귀찮게 굴지 않을게. 부탁이야.”

“크흠.”

집사가 성가시다는 기색으로 콧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러나 더는 귀찮게 굴지 않겠다는 내 말에 금방 결정을 내린 듯했다.

“좋아, 알려 주지.”

됐어! 집사의 승낙을 들으며 말없이 환호했다.

“그래, 그날은…….”

그가 지난 일을 회상하듯 띄엄띄엄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나는 집사의 목소리에 집중하고자 쫑긋 귀를 세웠다.

“백작가의 원로님들과 가신들이 모인 자리였다. 나는 가주님의 명령을 받아 대회의실에 레드 스톤을 가져갔었지.”

거기까지 듣고는 집사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만 눈을 찌푸렸다.

그때의 직책은 집사가 아니었을 텐데, 일개 하인에게 그런 중요한 역할을 맡기다니.

한마디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그의 이야기를 방해할 수는 없었기에 일단은 계속 들었다.

“그리고 그걸 회의장 중앙에 서 있던 너에게 건네주었다. 그러나 네 손에 들린 레드 스톤에서는 아무런 빛이 나지 않았지.”

“…….”

“그렇게 너는 사생아라는 결과를 받아 회의장에서 쫓겨났고…….”

“잠깐! 그게 다야?”

집사의 말을 끊어 버렸다. 설마 그게 끝이라고?

“혹시 회의장에 마법사가 있어서 마도구의 활성을 방해했던 건?”

“마법사……? 마법사가 백작가의 회의엔 왜 와? 그런 일은 없었다.”

집사가 딱 잘라 부정했다.

순간적으로 보였던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보아, 마법사가 없었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 듯했다.

‘집사의 이야기를 토대로 추측해 보자면…….’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생각에 잠겼다.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백부가 무슨 속임수를 썼던 것인지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레드 스톤이 가짜였군.’

백부가 보통 하인이었던 그에게 운반을 맡긴 이유가 있었다.

발렌티스 가문의 피가 섞인 사람이 레드 스톤을 건드렸다면 가짜인 게 들통났을 테니까.

게다가 집사는 다른 사람을 거치지 않고 레드 스톤을 나에게 직접 건넸다고 했다.

‘상식적으로 마도구의 진품 여부를 확인하는 게 먼저 아니야?’

검증 과정 자체에 허점이 있었다. 가문의 중대사와 네리아의 인생이 걸린 일을 저렇게 허술하게 처리하다니.

‘가문의 원로와 가신들은 그걸 보고만 있었어?’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으나 그들의 심정을 아예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백작가의 실세가 아버지에서 백부로 바뀌었고, 어린 네리아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굳이 문제를 지적해 백부의 눈 밖에 나고 싶지 않았겠지.

‘중요한 건 진실이 아니니까.’

입 안에서 씁쓸함이 느껴졌다.

그렇지만 집사에게 이야기를 들은 덕분에 확실한 목표를 세울 수 있기는 했다.

‘우선은 진짜 레스 스톤을 찾아야 해.’

찾아서, 내가 발렌티스 가문의 피를 이었다는 사실을 공식적인 자리에서 증명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사생아라는 오명을 벗고 진짜 신분을 되찾을 수 있다.

머릿속으로 몇 가지 시나리오를 그려 보았다. 하지만 그 과정들이 말처럼 간단하지는 않았다.

‘계획 없이 섣불리 움직여서는 안 돼. 나 혼자서는 불가능할 거야.’

그러니 나에게 협조해 줄 같은 편을 만들어 놓을 필요가 있었다.

백작가의 정보를 넘겨줄 수 있는 가신이나 무력을 가진 기사, 내 손발이 되어 줄 하녀와 같은.

…그렇지만 순순히 내 편이 되어 줄 사람이 있을까?

지금의 나는 귀족이 아니다.

곁에 두어 이득 될 게 없는 빈털터리를 굳이 도와줄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나를 보는 사람들의 적대적인 시선들이 떠올라 한숨을 삼켰다.

“얌전히 있는 걸 보니 다행히도 내 말을 이해했나 보군.”

집사는 내 침묵을 아예 다르게 해석했는지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제 네 입장을 깨달았을 테니 슬슬 꺼지도록 해라.”

“잠깐 기다려, 네리아.”

시키지 않아도 별관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집사의 축객령을 거두며 나타난 사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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