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내가 집사님한테 혼나서 기분이 많이 안 좋거든? 얌전히 있는 게 좋을 거다.”
“토, 토드!”
“왜? 분풀이 상대로는 네놈이 제격이잖아. 안 그래? 이 쓰레기야!”
퍽, 퍽. 누군가에게 주먹질과 발길질을 하는 소리도 함께였다.
무슨 일이지?
소동이 벌어지는 곳으로 조용히 다가가서는 나무 뒤에 숨어 상황을 지켜보았다.
얼굴에 주근깨가 있는 남자가 갈색 머리의 소년을 몇 번이나 걷어차고 있었고, 그 옆에는 빵 하나가 흙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보아하니 평범한 싸움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가해지는 구타였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고용인이 저택 안에서 이런 짓을 벌이다니. 내 부모님이 있는 저택에서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어……? 저 남자애는?’
그러다가 폭행을 당하고 있는 갈색 머리 소년이 눈에 익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분명, 어제 잔디밭에 누워 있던 나에게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이다.
차라리 모르면 몰랐지. 이 상황을 발견한 이상, 못 본 척 지나갈 수는 없었다.
‘주근깨 남자의 이름이 토드라고 했지?’
나는 일부러 크게 발소리를 내며 그들의 앞으로 다가갔다.
“저기, 토드? 아까 집사님이 널 찾으시는 것 같았어.”
“뭐라고?”
지어낸 말이었지만 효과는 좋았는지 남자가 화들짝 놀라며 갈색 머리 소년에게서 몸을 떨어트렸다.
“집사님은 한시도 날 가만히 안 두네. 트레스, 운 좋은 줄 알아라. 그리고 너!”
토드가 내 쪽을 향해 씩씩대며 걸어왔다. 그러고는 나를 위협하듯 손바닥을 쳐들었다.
“네리아 주제에 건방지게 나한테 먼저 말을 걸어?”
주제는 무슨. 약한 사람만을 골라 괴롭히는 토드의 비겁한 태도가 우습게 느껴졌다.
그러나 괜한 시비로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일부러 무서운 척 몸을 움츠렸다.
“앞으로 조심해라.”
토드는 내 어깨를 거칠게 밀치고는 본관이 있는 곳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한심하게 바라보며 혀를 찼다.
“…그런데 넌 괜찮아?”
상처가 생겼을 소년의 안부를 묻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갈색 머리 소년은 몸을 일으키고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빵을 주워 들고 있었다.
폭행을 당하고도 무덤덤해 보이는 모습을 보니,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닌 것 같았다.
“괘,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소년은 어느새 빵에 묻은 흙을 털어 내고는 입 안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나는 다급하게 그를 말렸다.
“잠깐! 설마 그거 먹을 거야?”
“네…….”
“떨어진 거잖아?”
“그래도 먹을 수 있어요.”
굳이? 다시 고용인 식당으로 가서 새 빵을 가져오면 되잖아?
잠깐 그렇게 생각했으나 곧, 소년이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식당까지 가다가 또 토드를 마주쳐 폭행을 당할 수도 있다.
떨어진 빵을 주워 먹는 것이 소년에게는 그나마 나은 선택이었던 것이다.
안쓰러움을 느끼며 내가 들고 있던 빵을 두 덩어리로 나눴다.
“줄게. 그건 버리고 이거 먹어.”
“그, 그렇지만…….”
내가 입을 대지 않은 쪽을 건네자, 소년은 머뭇거리며 빵을 받아 들었다.
“…고맙습니다.”
“별거 아냐. 그런데 너, 이름이 트레스(쓰레기)인 건 아니지?”
또다시 눈살이 찌푸려졌다. 어떻게 사람을 그따위 멸칭으로 부를 수 있는 거지?
소년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그냥 이대로 가 버리자니 말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는 모습이 괜히 신경 쓰였다.
‘잠시만 있다가 가도록 할까?’
데이브를 당장 만나야 하는 것도 아니니까.
그렇게 결정하고는 소년의 옆에 나란히 앉아 자리를 잡았다.
“같이 먹자.”
울창한 나뭇잎 그늘 아래, 조용한 침묵 속에서 두 사람이 우물우물 빵을 씹는 소리가 울렸다.
나는 맛없는 가루 덩어리를 삼키며 곁눈질로 소년을 살펴보았다.
그의 금색 눈동자에 무심코 시선이 갔다. 대체 어디서 봤더라?
내가 살던 세계의 저택에서도 이런 하인이 있었던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한참 뒤에야 소년이 입을 열어 대답을 내놓았다.
“트레스라고… 사람들은 다들 저를 그렇게 불러요.”
“그 말은, 진짜 이름이 따로 있다는 뜻이네.”
“…….”
“나는 네리아야. 네 이름이 뭔지 물어봐도 될까?”
하지만 소년은 입을 우물거리기만 할 뿐, 이번에도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혹시 내가 실례되는 질문을 했던 걸까? 나는 더 이상 소년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짧지만은 않았던 시간이 흐른 뒤, 옷에 묻은 부스러기를 털며 일어났다.
“다 먹었네. 같이 먹어 줘서 고마워. 혼자서 식사하기 심심했거든.”
“저, 저도 고맙습니다……!”
그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서는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에 있다 보면 적어도 몇 번은 더 마주칠 수 있을지도.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등 뒤로 느껴지는 소년의 시선은 내가 후원을 벗어날 때까지도 사라지지 않았다.
***
나와 데이브 체스터는 태중 약혼으로 맺어진 사이였다.
발렌티스 백작가와 체스터 백작가의 우호적인 관계를 위한 정략적인 결정이었지만, 당사자인 나도 거기에 불만은 없었다.
데이브는 누구에게나 신사적이며 친절한 사람이다.
게다가 내 아버지인 발렌티스 백작과 함께, 가난한 평민을 위한 구호 활동을 펼칠 만큼 선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데이브를 싫어하기가 더 어렵지 않았을까.
내 병으로 인해 이어질 수는 없었지만, 만약 우리가 결혼한다면 좋은 동반자가 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다시는 파혼 같은 말 꺼내지 마. 마지막까지 약혼자로서 네 옆을 지킬 수 있게 해 줘.’
팔다리를 움직일 수 없어 침대에만 갇혀 있을 때, 데이브는 나에게 그런 말을 해 주었다.
미안하면서도 고맙고, 얼마나 많이 감동했었는지.
그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솔직히 기쁘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네리아가 사생아라는 누명을 썼으니, 두 사람이 파혼하고 관계가 끊어지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8살의 나와 데이브는 이미 누구보다 친한 단짝이었다.
과거의 인연을 기억하는 그라면 내 사정을 듣고 도움을 줄 것이 분명했다. 데이브는 좋은 사람이니까.
그렇게 확신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체스터 가문의 저택 앞에 도착하게 되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담벼락 너머의 푸른색 벽돌집을 바라보았다.
내가 있던 곳에서는 십여 년이 넘게 드나들던 곳이다.
발렌티스 저택만큼이나 친숙한 장소를 보고 있으니 절로 반가움이 밀려왔다.
‘그렇지만 같은 자리에 너무 오래 서 있으면 경비가 이상하게 생각하겠지?’
이미 문지기가 수상하다는 눈길로 내 쪽을 힐끔대고 있었다.
‘원래라면 내 얼굴만 보고도 문을 활짝 열어 주는 곳이었는데.’
하지만 지금의 나는 발렌티스 백작가의 영애가 아니다. 오늘따라 체스터 저택의 대문이 유난히 견고해 보였다.
나는 지나가던 길인 척 자연스럽게 마저 걸어 문지기의 눈이 닿지 않는 저택 모퉁이 너머로 몸을 숨겼다.
평민 하녀의 신분으로는 귀족가의 저택에 출입할 수 있는 정상적인 방법이 없다.
들여보내 달라 부탁해 봤자 체스터 가문의 기사와 문지기에게 붙잡혀 쫓겨날 것이 분명하다.
그렇기에 나는 데이브가 대문을 지나갈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기사나 고용인을 거치는 것이 아닌, 데이브 본인을 직접 노리는 것이다.
문제점이 있다면 그가 언제 나타날지 알 수 없다는 점. 아무리 지루해도 기약 없이 무작정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다른 선택지도 없었기에 나는 순순히 수긍했다.
그렇게 제자리에 서 있다가 쭈그려 앉기도 하며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던 때였다.
모퉁이 너머로 마차가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대문을 향해 슬그머니 얼굴을 내밀었다.
“데이브 도련님, 오셨습니까!”
마차 안에서 한 귀족 영식이 모습을 드러냈다.
단정하고 기품 있는 자세는 내가 몇백 번이나 봐 온 사람의 것이었다.
‘드디어 데이브가 왔어!’
반가움을 느낄 새도 없었다. 데이브가 저택 안으로 발을 들이기 전에 그를 붙잡아야 한다.
나는 재빠르게 몸을 움직여 그를 향해 달려갔다.
“데이브!”
절박한 심정으로 그 어느 때보다 큰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그가 걸음을 멈추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 움직임에 데이브의 녹색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오랜 시간 동안 봐 온 익숙한 눈동자였다.
“…네리아?”
잠깐의 정적 뒤에 데이브의 입에서 내 이름이 흘러나왔다.
역시 데이브가 나를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지!
마음 같아서는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었으나 꾹 참고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미안해.”
저택의 문지기와 경비병들은 그런 나를 경계하며 표정을 굳혔다.
그들은 하녀 옷을 입은 불청객을 당장이라도 내쫓고 싶은 눈치였다.
하지만 가문의 후계자인 데이브가 나에게 알은척을 하고 있었기에 함부로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역시, 데이브 본인을 직접 찾아오는 것이 정답이었어. 나는 내 판단에 만족해하며 천천히 그를 향해 걸어갔다.
“오랜만일 텐데도 날 알아봐 줘서 고마워.”
“…분홍색 눈을 가진 사람은 흔하지 않으니까.”
“그래도 고마워. 그동안 잘 지냈어?”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는 그는 내 등장이 반갑다기보다는 뜻밖이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멀뚱멀뚱, 데이브와 나 사이에 적막이 흘렀다.
나는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두 팔 벌려 환영해 주기까지를 바란 건 아니었으나 조금 정도는 반겨 줄 줄 알았는데.
하기야 잘 생각해 보면, 그로서는 몇 년이나 교류가 없던 전 약혼녀가 뜬금없이 나타난 것이니 의아할 법도 했다.
‘뭔가 분위기를 풀어 줄 만한 방법이 없을까?’
이런 상황에서 다짜고짜 부탁의 말을 내뱉을 수는 없다.
무난하게 대화를 틀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며 고개를 돌리다 보니, 데이브의 셔츠 깃에 달린 작은 사파이어 브로치가 눈에 들어왔다.
‘저건……?’
체스터 가문에서 후계자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보석이잖아?
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좋아, 저걸 활용해야겠어.
경직된 분위기를 풀기 위해서는 공통의 추억을 언급하며 친밀감을 높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잘 지냈다니까 기뻐! 그리고 저 사파이어 브로치도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
“브로치?”
“셔츠 깃에 달아 놓은 거. 너도 기억나? 우리가 어렸을 때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다가 잃어버릴 뻔했었잖아.”
“맞아, 그런 일이 있었지…….”
역시 어린 시절의 일화를 언급한 것이 효과가 있었던 걸까. 데이브가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순간, 나에게도 환한 웃음이 지어졌다.
“나도 기억나. 그런데 넌 어쩐 일로 여기까지 왔어?”
“너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