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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셀프입니다 (3)화 (3/172)



<3>

4일이 지났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지저분한 하녀 신세였고, 잠을 자고 일어나면 별관의 허름한 방에서 눈을 떴다.

이쯤 되니 싫어도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살고 싶다는 게 이런 의미는 아니었는데 말이지.”

별관 옆, 인적 없는 잔디밭에 드러누워 멍하게 하늘을 바라보았다.

물론, 지난 며칠 동안 가만히 앉아 현실도피만 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상황 파악을 위해 발렌티스 저택의 고용인들을 찾아다녔다.

그들은 네리아를 싫어했는지 나와는 말을 섞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보가 간절했던 내가 그들에게 끈질기게 매달렸고, 다행히도 나에게 이야기를 들려준 몇몇 사람이 있었다.

‘알았어! 말해 줄 테니까 더는 귀찮게 굴지 마!’

먹고 떨어지라는 태도이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덕분에 확실히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여기는 내가 살던 세계와 다르다는 것.

믿기 힘든 일이었지만, 이곳에서의 내 부모님은 정말로 8년 전에 명을 달리했다.

마차 사고라고 했다.

할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급하게 남부로 향하던 중, 빗길에 마차가 추락하여 그대로 목숨을 잃게 된 것이다.

어머니의 배 속에 들어 있던 루이케도 함께였다고 한다.

당시에 독감으로 수도 저택에 남아 있던 9살의 네리아만이 이 끔찍한 변고를 피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곳의 네리아와 나.

똑같이 흘러가던 두 사람의 세계는 부모님의 죽음을 계기로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한다.

아버지의 사망 후, 발렌티스의 차기 가주 승계 문제가 논의될 때.

저택의 고용인 몇몇에 의해 네리아가 아버지의 친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내 어머니인 로즈가 마구간지기 잭과 몰래 사랑을 나누던 사이였다던가?

말도 안 되는 악질적인 누명이었다. 애초에 잭의 연애 상대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으니까.

나도 아주 우연히 알게 된 이후로 잭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 여태껏 비밀로 숨겨 놓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고용인 몇몇은 어머니와 잭이 밀회를 가지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 증언했다고 한다.

‘아마도 백부의 계략이었겠지.’

백작 위의 계승 순위는 큰아버지보다 네리아가 먼저였다.

정상적이라면 네리아가 계승권을 가지고 백부가 후견인이 되는 구도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작위를 차지하기 위해 내 어머니에게 더러운 누명을 씌워 조카인 네리아를 치워 버리고자 한 것이다.

가짜 불륜 상대였던 잭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자살? 과연 그럴까?’

잭은 죽임을 당한 거다. 사람들이 진실을 밝혀낼 수 없도록.

그런 식으로 백부의 계략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갔다.

혼외자 의혹을 받게 된 네리아는 가문의 혈족을 구분할 수 있는 마도구를 이용해 친자 검사를 받게 되었다.

‘그걸 위해 백부가 발렌티스 가문의 긴급회의까지 소집했다지?’

하지만 그가 미리 마도구에 손을 썼던 것인지, 네리아는 아버지의 친딸이 아니라는 판정을 받고 말았다.

“쓰레기보다 못한 인간 같으니라고.”

다리스 제국은 국교의 교리에 따라 엄격한 일부일처제를 채용하고 있다.

그렇기에 사생아는 자녀로 인정받지 못했고, 지위나 재산을 상속받을 수도 없었다.

결국, 9살의 네리아는 한순간에 사생아라는 낙인이 찍혀 모든 권리를 잃어버리게 된다.

더욱이 나에게는 외가라고 부를만한 곳이 없었다.

어린 네리아는 갈 곳이 없었고, 백부는 그런 조카를 수도 저택의 하녀로 삼았다.

당연하게도 그런 백부 가족이 네리아를 친절하게 대해 줄 리 만무했다. 긴 시간에 걸쳐 그들의 괴롭힘이 이어졌고, 네리아는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렸어.’

가엾고 안타깝게도.

“어떻게 큰아버지라는 인간은 여기서나 저기서나 한결같이 못될 수가 있는 거지?”

친척이라는 인간의 행태에 분개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차남이었던 아버지가 장남을 제치고 가주가 된 것은 두 사람의 능력 차이가 워낙 컸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무능한 주제에 욕심만 많은 백부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해 야비한 방법으로 아버지를 공격하고는 했다.

물론 그게 통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세상일은 아무도 모른다더니.”

여기서는 발렌티스 백작이 된 큰아버지의 비열한 얼굴을 떠올리며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은 심란한 내 기분과 달리 평화롭기만 했다.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한 것은 한 가지가 더 있다.

원래의 나는 죽었고, 이제부터는 이곳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팔다리라도 멀쩡한 게 어디야. 그러니 뭐든 대책을 마련해야 해.”

어째서 이런 곳에 와 버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죽은 네리아와 다르다.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식으로 지낼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할 요량으로 잔디밭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런데 며칠 동안 식사를 제대로 못 했기 때문일까, 현기증이 생겨 한 번에 일어나기가 어려웠다.

다음에는 맛없는 음식이라도 제대로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몸을 어기적거리던 때였다.

“저, 저기.”

눈앞으로 불쑥 누군가의 손이 뻗어 왔다. 누구지?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나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는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갈색 머리에 지저분한 하인 옷을 입고 있는 소년이었다.

“나한테 무슨 용건이라도?”

“그게…….”

“혹시 날 일으켜 세워 주려고 한 거야?”

그가 쭈뼛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의외라는 듯이 눈을 깜빡였다. 그동안 네리아에게 먼저 친절을 베푸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눈치를 보아하니 네리아와 친한 사이도 아닌 것 같건만.

어쨌거나 이곳에서는 처음 받아 본 호의였다. 나는 흔쾌히 그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고마워. 덕분에 쉽게 일어났어.”

소년에게 감사 인사를 하며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완전히 선 자세가 되자, 자연히 좀 더 가까운 거리에서 그의 모습을 마주할 수 있었다.

남자치고는 곱상한 얼굴이었다.

맑은 금색 눈동자가 유독 인상적이기도 했다. 마른 체격에 키는 나보다 약간 더 큰 정도인가?

무심결에 소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전에 만난 적이 있었던가?’

처음 보는 낯선 얼굴인데도 묘하게 익숙한 느낌이 든 것이었다.

“저기, 혹시-”

이름을 물어볼 생각이었건만, 소년은 고개를 홱 돌리더니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그냥 가 버렸네.”

어차피 소년의 이름이 그렇게까지 궁금한 것도 아니었기에 그를 붙잡지는 않았다.

닮은 사람을 봤던 거겠지. 그렇게 대충 수긍하며, 나 역시도 별관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네리아의 방에 도착한 뒤로는 얼굴을 찌푸린 채로 고민했다.

“그 마도구만 있으면 사생아 누명은 곧바로 벗을 수 있겠지만.”

‘레드 스톤’이라는 이름을 가진, 네리아가 친자 검증을 받을 때 백부가 손을 써 두었을 바로 그 물건.

하지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말단 하녀가 감히 가문의 보물에 접근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심지어 첫째 날의 소동으로 본관의 출입조차 금지당한 것이 내 처지이지 않던가.

슬프게도 지금의 나로서는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도움이 필요했다.

누군가 나를 도와줄 사람이-

“…데이브.”

곧바로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데이브 체스터. 예전 세계의 내 약혼자였다.

***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자마자 하녀용 세안실로 향했다.

한여름에도 미온수로 목욕을 해 왔던 나에게 찬물에 몸을 씻는 행위는 썩 기꺼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선택권이 없었고, 그보다 큰 문제가 있다면.

“아직도 그대로라고?”

아무리 물로 헹궈 내도 얼굴에 묻어 있는 까만 검댕이 사라지지 않는 것이었다.

“이쪽의 네리아는 대체 얼굴에 뭘 묻히고 다닌 거야?”

반복되는 마찰에 피부가 따끔거렸으나 세안제 없이는 이 정도가 한계인 것 같았다.

어쩔 도리가 없으니 씻는 것은 여기서 끝내기로 했다. 그나마 처음보다는 검은 자국이 옅어진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꾀죄죄한 꼴로 데이브를 찾아가도 되는 걸까, 잠깐 고민했으나 그냥 감행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데이브는 외모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다. 게다가 이런 모습이 되레 그의 동정심을 살 가능성이 컸다.

“좋았어. 그럼 갈까?”

그렇게 결심한 것과 동시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울렸다.

“…….”

약혼자를 만나러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배를 채우는 것도 중요한 법. 우선은 끼니부터 해결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발렌티스 저택의 고용인들에게는 정해진 식사 시간이 따로 없다. 일꾼마다 근무 시간이 제각각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별관의 고용인 전용 식당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음식이 놓여 있는 선반으로 향했다.

하지만 귀족의 식사와 평민 하녀의 식사는 같지 않다.

차마 요리라고 부를 수도 없을 법한 조악한 음식들을 보고 있으니 절로 쓴웃음이 지어졌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먹을 것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내키지 않는 기분으로 수프를 뜨고 커다란 빵 한 덩어리를 들고는 식탁에 앉았다.

딱딱한 빵은 씹자마자 입 안에서 가루가 되었고, 식어 빠진 감자 수프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났다.

‘맛없어.’

굶을 수는 없으니 먹고 있지만, 도저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정말이지 원래의 내 세계가 그리웠다.

“그거 알아? 쟤, 며칠 전에 수프 뜨다가 냄비를 엎었다?”

빵을 한 입 더 베어 물었는데, 먼저 식당에 와 있던 하녀들의 목소리가 귓가로 날아들었다.

“나랑 씨씨가 그걸 치우느라 고생 좀 했었지. 그런데도 정작 일을 벌인 쟤는 옆에서 멀뚱멀뚱 서 있기만 하더라. 웃기지 않아?”

“새삼스럽지도 않네. 원래 그런 애잖아. 더럽고 무기력하고, 있어 봐야 별로 도움도 안 되지.”

그녀들은 들으라는 듯이 내 이야기를 떠들고 있었다.

실수로 냄비를 엎은 건 국자를 사용하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다.

정리하는 사람들 옆에서 서 있기만 한 것은 내가 수습하려 할수록 바닥이 더러워졌기 때문이었다.

나름대로 노력은 했지만, 이런 일을 해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들의 입장에서는 나 때문에 일이 늘어나 성가셨겠지.

변명의 여지가 없었기에 반박하지 않고 조용히 수프를 마저 떠먹었다.

“먹기는 또 잘도 먹네. 네리아가 자살 시도했던 거, 진짜긴 할까?”

“일하기 싫어서 그런 시늉만 했던 거 아냐? 지금도 다쳤다는 핑계로 빈둥빈둥 놀고만 있잖아.”

“진짜 짜증 나. 급료는 똑같은데 누구는 놀고, 누구는 일하고.”

드르륵, 의자를 끌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의 비난은 이곳 네리아에 관한 평가의 연장이었다. 그러니 딱히 내가 상처를 받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면전에서 나를 비방하는 사람과 같이 있는 것이 썩 유쾌한 일도 아니었기에, 나는 빵 덩어리를 손에 들고는 식당을 벗어났다.

‘가면서 먹어야겠어.’

별관의 후원을 가로지르며 빵을 꿀꺽 삼켰다.

걸어 다니면서 음식을 먹으면 안 된다는 어머니의 잔소리가 떠올랐으나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보다 체스터 저택에는 어떻게 가지?”

입을 우물거리며 당장 눈앞에 닥친 고민에 눈을 찌푸렸다.

가는 길이야 눈에 훤하지만 가문의 마차를 쓸 수는 없다.

돈이 없어서 사설 마차를 이용할 수도 없으니 남은 건 걸어가는 방법밖에.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다리가 아파 오는 기분이 들었다.

짤막한 스트레칭이라도 할 생각에 잠시 걸음을 멈췄을 때였다.

“야, 트레스(쓰레기). 너 오늘 나한테 좀 맞아야겠다.”

후원의 수풀 너머에서 사람들이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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