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그게 무슨 헛소리야?”
일말의 고민도 없이 레비의 말을 부정했다.
내가 지붕에서 뛰어내렸다니.
그럴 리 없다. 애초에 나는 사지석화증으로 몸을 움직일 수도 없는 상태가 아니었던가.
“휴즈! 휴즈를 데려와. 내 손가락이 부러졌다고! 지금 당장!”
하지만 레비는 내 말은 듣지도 않은 채 길길이 날뛰며 누군가를 불러 대고 있었다.
저택 안이 순식간에 어수선해졌다.
고용인들은 아닌 척하면서도 소동이 일어난 곳을 주시하고 있었고, 그 사이로 키가 작고 통통한 남자 한 명이 헐레벌떡 나타났다.
“도련님! 손을 다치셨다고요?”
“그래! 저게 감히 내 뼈를 부러트렸단 말이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레비가 의사로 보이는 남자에게 진료를 받는 동안 나는 재빠르게 주변을 살펴보았다.
아래층에서 나에게 손가락질을 하고 있던 하녀와 눈이 마주쳤다. 모르는 얼굴이었다.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려보았다. 짐을 나르고 있던 하인은 나를 보며 혀를 차고 있었다.
물론, 그 하인 역시도 내가 알지 못하는 자였다.
시야에 담을 수 있는 고용인들 모두를 살펴보았으나 내가 아는 얼굴은 아무도 없었다.
발렌티스 저택은 고용인들이 바뀌는 일이 거의 없고 평균 근속 기간이 긴 편이다.
그러니 내가 이 정도나 되는 숫자의 사람들을 전부 모를 리가 없을 텐데도.
‘설마 내가 의식을 잃었던 기간이 체감 이상으로 길었고, 그사이에 가문에 큰 변화가 있었다든가?’
열린 문 너머로 보이는 달력을 뚫어질 것처럼 응시했다.
일력에 표시된 검은색 숫자는 내가 착각할 수 없을 만큼 크고 선명했다.
<다리스 제국력 489년 3월 23일>
내가 죽은 줄 알았던 올해 생일 이후로 고작 열흘밖에 지나지 않은 날짜였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겨우 10일 만에 저택의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이 바뀔 수가 있다고?
어렴풋이, 무언가가 잘못되고 있다는 예감이 머릿속을 스쳤다.
“다행히 골절은 아니고 근육이 놀란 것뿐입니다. 조금 뒤에 회복하실 수 있을 겁니다.”
“뭐? 내가 다쳤는데 다행?”
“제 말뜻은 그런 게 아니라……!”
레비가 의사에게 말도 안 되는 억지 트집을 잡고 있었으나 거기에 신경 써 줄 여유가 없었다.
당장 부모님을 만나 이게 어떻게 된 일들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복도를 벗어나기 위해 자세를 바로잡으려던 때였다.
“무슨 소란이야?”
또각거리는 구두 굽 소리와 함께 반대편에서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레비, 제발 적당히 하지 그래? 이러다가 의사가 또 그만두겠어.”
“신경 꺼, 라일라. 그렇게 되면 새로운 의사를 데려오면 되는 걸 가지고 뭘.”
“…됐어. 너랑 말이 통할 리가 없지.”
하늘색 드레스를 입은 예쁘장한 소녀를 말문이 막힌 채로 쳐다보았다.
한심하다는 얼굴로 레비에게 핀잔을 주고 있는 그녀는 내 사촌 자매인 라일라 발렌티스였다.
무언가가 잘못됐다- 그랬던 예감은 곧 확신이 되었다.
그렇지 않다면 올해 초에 유학을 핑계로 외국으로 떠났던 그녀가 벌써 수도에 돌아와 있을 리 없을 테니까.
“곧 아버지가 오실 시간이니까 적당히 정리하는 게 좋을걸? 그리고- 어머나, 너?”
마침 고개를 숙이던 라일라와 우연히 눈이 마주쳤다.
나를 발견한 그녀는 명백하게 아랫사람을 보는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 투신 사건이 열흘 전의 일이던가……? 혼수상태라더니 생각보다 일찍 일어났나 보네. 눈떴으면 너도 가서 일이나 해.”
나는 투신 같은 거 한 적 없다.
그녀야말로 제국에는 언제 돌아왔는지, 그리고 너희 남매가 왜 우리 집에서 주인 노릇을 하는 건지, 라일라에게 물어보고 싶은 말이 많았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가장 먼저 튀어나온 질문은 바로 이것이었다.
“라일라, 네가 왜 우리 엄마의 귀걸이를 하고 있어?”
그녀의 연갈색 머리카락 사이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파란색 장미 귀걸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푸른색 산호석으로 조각해 만든 장미 귀걸이는 수도의 유명 보석상이 내 모친에게 헌정한 것으로, 어머니가 무척이나 아끼던 보석이었다.
딸인 내가 갖고 싶다고 졸라도 20년 뒤에나 물려주겠다고 못을 박았던 물건이건만.
“하녀장, 쟤 왜 저래?”
그러나 라일라는 나에게 대답하는 대신 그녀의 뒤를 따라오던 중년 여성에게 말을 걸었다.
자연스럽게 내 시선 역시도 그녀의 뒤쪽으로 향했다.
‘마릴린?’
라일라의 뒤에서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있는 중년 여성을 보며 완전히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녀는 백작가의 돈을 훔친 것이 발각되어 진작에 저택에서 쫓겨났던 하녀다.
그런데 그 마릴린을 보며 평범한 고용인도 아닌 하녀장이라니.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 아이가 깨어났다는 소식은 아직 저도 듣지 못했던 터라…….”
“내가 알아. 저거 지금 제정신이 아니야. 떨어져서 머리를 다쳤잖아.”
마릴린의 말이 끝나자마자 레비가 으스대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들은 나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정작 당사자인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뿐이었다.
이래서야 복도에 더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발걸음을 옮겨 자리를 벗어날 생각이었다.
그러나 레비에게 거칠게 손목을 붙잡혀 가던 길을 강제로 멈춰야 했다.
“버릇없이 뭐 하는 짓이야? 내가 지금 말하는 중이잖아.”
“너나 방해하지 말고 손 치워. 나는 부모님을 만나러 갈 거니까.”
레비를 뿌리치기 위해 내뱉은 말이었다.
하지만 세 사람은 못 들을 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동시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쟤가 방금… 부모님이랬어?”
그러나 그것도 잠시, 라일라를 시작으로 그들이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심지어 레비는 나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숨이 넘어가기라도 할 것처럼 꺽꺽댔다.
아주 모욕적이며, 불쾌했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말없이 그들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세 사람은 내 반응에는 아랑곳없이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아직도 웃음을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
“어떡해! 네 말대로 쟤가 진짜 머리를 다친 게 맞나 봐. 휴즈!”
“예, 라일라 아가씨.”
“이 상황에 관해서 의사인 네 소견을 말해 볼래?”
“추측으로는 외부 충격에 의한 정신착란이나 기억상실이 아닐까 합니다. 떨어졌던 높이에 비해 외상이 적다 싶었는데 아마도 그 충격이 고스란히 내상으로…….”
의사의 덤덤한 목소리 속에 희미한 동정심이 섞여 있었다.
물론, 그의 진단과 달리 내 기억이나 정신 상태는 지극히 정상이었다.
하지만 라일라는 그 설명에 모든 것을 이해했다는 듯,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랬구나. 불쌍한 너를 위해 내가 하나씩 친절하게 설명해 줄게.”
“뭐를?”
“네리아.”
라일라의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녀는 마치 죄인에게 선고라도 내리는 듯 거만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네 부모님은 8년 전에 죽었어.”
“웬 헛소리야?”
그녀의 정신 상태가 염려될 정도로 되지도 않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라일라는 진지한 얼굴로 말을 계속 이어 나가고 있었다.
“네 부친인 카터 숙부님이 죽고 다음으로 발렌티스 백작 위를 승계한 사람이 우리 아버지란다.”
“뭐……?”
“나는 우리 아버지께서 뒤늦게야 원래의 위치를 찾은 거라고 생각해. 나랑 레비도 그렇고.”
애초부터 작위는 장남인 제 부친이 가졌어야 할 자리가 아니었냐며, 라일라가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유감스럽지만 하나 더. 죽은 네 어머니, 로즈 숙모님이 생전에 평민 남자와 간통을 저질렀었거든. 너도 몰랐겠지만.”
“…….”
“네가 숙모님의 혼외 자식이라는 사실이 뒤늦게야 밝혀졌지 뭐야? 다시 말해서 넌, 카터 숙부님의 친딸이 아니라는 말이야.”
산 넘어 산이라던가.
라일라의 발언에 대답해 줄 말이 없어 그냥 입을 다물었다.
우리 부모님이 무려 8년 전에 돌아가신 데다, 백작가의 현재 가주가 너희 아버지고, 나는 어머니가 바람을 피워 낳은 아이라니.
헛소리도 정도껏 해야 박자를 맞춰 줄 수 있는 법이다.
“어쩐지 너랑 숙부님은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잖아. 카터 숙부님도 참 불쌍해. 평민의 아이를 9년이나 친딸처럼 키우셨다니.”
“라일라, 그만. 농담이 과해.”
장난치고는 지나치게 악의적이다.
레비에게 손목을 잡히는 바람에 복도에 머무르고는 있었지만, 더는 이들과 어울려 줄 가치가 없었다.
괜한 시간 낭비를 했다고 생각하며 그들에게서 벗어나 복도를 달려 나갔다.
뒤에서는 ‘그냥 놔둬.’라고 말하는 라일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냥 안 놔두면 뭘 어쩌려고?’
속으로 트집을 잡으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고, 모퉁이를 돌아 커다란 거울 옆을 지나갈 때였다.
또다시 느껴지는 위화감에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분명, 이곳에 있는 것은 오래됐지만 깨끗한 전신 거울이었다.
그런데-
“너 누구야?”
거울 속에 누더기 하녀복을 입은 낯선 소녀가 서 있었다.
자세히 보니 내가 맞기는 했다.
수도에서 분홍색 눈을 가진 사람은 단 2명, 나와 어머니인 로즈 발렌티스뿐이었으니까.
그렇지만 한순간이나마 나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을 만큼 눈앞의 소녀는 더럽고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언제나 황금빛으로 물결치던 긴 머리카락은 제멋대로 엉켜 산발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얼굴에는 숯검정이 덕지덕지 묻어 제국 최고라고 칭송받던 아름다운 외모를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나는 병으로 침대 신세를 지고 있던 동안에도 하녀들의 도움으로 청결한 상태를 유지해 왔었다.
그런데 왜 내가 이런 꼴이 되어 있지?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부정하며 뒷걸음질 쳤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들이 도저히 끝나지 않았다. 그래서 힘껏 복도를 내달렸다.
‘빨리 어머니를 만나야 해.’
바닥이 무너질까 걱정이 될 정도로 큰 소리가 울렸지만 나는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어머니의 방 앞에 도착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노크할 시간조차 아까워 어머니의 허락도 없이 문을 열어 버렸다.
“어머니!”
“마님. 일찍 오셨… 잠깐, 마님이 아니라 네리아잖아?”
어머니의 방 안에서 이불을 정리하고 있던 하녀와 눈이 마주쳤다.
“말단 하녀가 허락도 없이 마님의 방에 함부로 들어오다니!”
이름 모를 하녀가 나를 향해 삿대질하며 언성을 높였으나 무시하고 내부를 둘러보았다.
내 어머니는 로즈라는 이름처럼 유독 장미를 좋아해, 사계절 내내 방을 장미꽃으로 꾸며 두고는 했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는 침대 옆 테이블에 튤립 한 송이가 꽂혀 있는 것이 전부였다.
“장미 향기가 나질 않아…….”
허망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여긴 어머니의 방이 아니다.
“죄송하다고 말하지 않고 뭘 하는 거야? 반성하기 전까지 식사는 없는 줄 알아!”
하녀가 소리를 질렀지만 대꾸하지 않고 정신없이 걸음을 옮겼다.
다음으로 향한 장소는 아버지의 집무실이었다.
집무실에는 문고리가 잠겨 있었지만, 손잡이를 계속 돌리며 반대쪽 손으로 문을 두드렸다.
“아버지, 저 네리아예요.”
아버지를 부르며 계속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처음부터 비어 있었는지 안에서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
‘두 분 다 외출이라도 하신 걸까? 루이까지 같이?’
그렇게 생각하며 무심결에 뒤를 돌아본 순간이었다.
“어?”
저택에서 또다시 부자연스러운 무언가를 발견했다.
집무실이 있는 복도 벽면에는 발렌티스 가문의 역대 가주의 초상화를 차례대로 걸어 둔다.
그러나 초상화는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하나가 더 많았다.
“어째서……?”
좀 더 확실하게 확인하기 위해 뚜벅뚜벅 걸어가 그림 앞에 섰다.
그리고 허무하게 눈을 깜빡였다.
아버지의 초상화 바로 옆에 백부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던 것이다.
10일. 내가 정신을 잃었던 날이 고작 10일이다.
그런데 그 짧은 사이에 가주가 큰아버지로 바뀌었다고? 내가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이건 제도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혼란스러운 눈동자로 백부의 초상화를 쳐다보고 있었더니, 어느새 라일라가 부채를 흔들며 내 옆에 다가와 있었다.
“다 봤어? 이제 네 처지가 어떻게 된 건지 감이 좀 와?”
듣지 못한 척, 미동 없이 서 있었으나 라일라는 개의치도 않고 나에게 계속 말을 걸어왔다.
“제국에서 혼외 자식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는 너도 알지? 우리가 은혜를 베풀어 고아가 된 너를 하녀로나마 거둬 준 거야.”
말없이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을 마주했다.
“그러니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똑바로 처신하렴. 머리를 다쳤다고 봐주는 건 여기까지야.”
“…….”
“이 시간 이후로 주제 모르고 또 기어오르면 가만히 안 놔둔다?”
나를 보는 라일라의 얼굴에 멸시와 업신여김이 가득했다.
***
나는 당연히 그녀의 말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었고, 부모님을 찾겠다며 한참을 날뛰었다.
그러다가 고용인들에게 붙잡혀 라일라의 앞에 무릎을 꿇렸고.
“난 하녀가 아니고, 사생아는 더더욱 아냐! 대체 몇 번을 말해?”
“하루빨리 네 주제를 깨닫는 게 좋을 거야. 거지꼴로 쫓겨나기 싫으면 말이야.”
그 뒤에는 하인들에게 뒷덜미를 잡혀 끌려 나갔던 것이었다.
정신을 차리니 처음에 내가 눈을 떴던 별관의 허름한 방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나는 딱딱한 침대에 걸터앉아 얼빠진 얼굴로 눈을 깜빡거렸다.
“내가 죽은 게 아니라는 건 확실한 것 같은데.”
하지만 저택을 한참이나 휘젓고 다녔는데도 부모님과 루이케의 흔적은 찾을 수조차 없었다.
“그래, 좋아. 전혀 믿기지는 않지만, 이게 현실이라고 가정하면.”
문득,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가지 가능성이 있었다.
여기는 내가 살던 세계가 아닌, 또 다른 내가 존재하는 장소일지도 모르겠다는.
“이런 걸 소설에서는 평행세계라고 부르던가……?”
‘나’는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자란 귀족 영애였지만, 평행세계의 나는 그렇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잃고, 사생아라는 누명을 써 평민 신분의 하녀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바로 지금, 나는 그 네리아가 되고 말았다.
“-라는 꿈을 꾸고 있는 거겠지?”
어이없이 중얼거리며 철썩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볼을 내리쳤다.
“…아프잖아.”
꿈이 아님을 증명이라도 하듯 뺨에서 홧홧한 통증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