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은 셀프입니다 (1)화 (1/172)



<1>

‘네리아 발렌티스’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대부분 호의적이고 명예로운 것들이었다.

‘대부호 발렌티스 백작의 적녀.’

‘제국 최고의 미인이자, 차세대 사교계를 대표하게 될 레이디.’

‘수도의 모든 귀족 소녀들이 동경하는 선망의 대상.’

당사자인 나 역시도 부정하지 않았다. 정말로 나는 ‘완벽’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귀족 영애였으니까.

그런데,

그랬던 나는 바로 지금.

“네리아! 가만히 있지 못해?”

“하녀 따위가 감히 라일라 아가씨께 버릇없이 대들다니!”

낡은 하녀복을 입고, 사촌 자매 앞에서 죄인처럼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것도 내 집에서.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들이야?’

불치병으로 죽은 줄 알았다가 다시 눈을 떴더니,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나에게 벌어지고 있었다.

“놓지 못해? 무릎이 아프잖아!”

이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을 부정하며, 양쪽에서 내 어깨를 짓누르는 하인들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그들은 더욱 억센 악력으로 내 움직임을 구속할 뿐이었다.

도저히 말이 통하지를 않았다. 하기야 내가 상대해야 할 사람은 저택의 하인들이 아니다.

나는 눈앞에서 거만하게 서 있는 내 동갑내기 사촌 자매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라일라!”

“라일라가 아니라, ‘라일라 아가씨’라고 부르랬잖아.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어?”

그녀가 살랑살랑 부채를 흔들며 빈정거렸다.

“네리아, 내가 말했지? 너는 귀족이 아니라 사생아 평민이라고.”

“말조심해! 도대체 누굴 보고 사생아라는 거야?”

화를 내며 라일라의 말을 부정했지만, 그녀는 내 모습을 내려다보며 비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아직도 이해가 안 되니? 얼마나 더 쉽게 설명해 줘야 알아듣겠어?”

그녀가 천천히, 그리고 또박또박 입을 열었다.

“네 친부는 마구간지기 평민이었고, 너는 여기서 8년 동안 하녀로 일해 왔단다.”

“헛소리하지 마!”

라일라의 이야기는 현실적으로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태어나서부터 17년을 발렌티스 가문의 적녀로 살아왔고, 나 스스로도 완벽한 귀족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왔었다.

그런데 그런 내가 무려 8년을 하녀로 일했다고? 장난해? 여기가 무슨 평행세계라도 돼?

“나는 하녀가 아니고, 사생아는 더더욱 아냐! 대체 몇 번을 말해?”

하지만 그녀는 내 항의에도 보란 듯이 한숨을 내쉬며 하인들을 향해 명령했다.

“밖으로 끌고 가. 저게 아무리 머리를 다쳤다지만, 나중에는 싫어도 제 처지를 깨닫게 되겠지.”

“나갈 수 없어! 나는 네리아 발렌티스야. 여기는 내 집이라고!”

“정신 차려. 넌 발렌티스가 아니고, 여기는 네 집도 아니란다.”

그녀가 오만한 미소를 지은 채, 접힌 부채의 끝으로 내 뺨을 툭툭 내리쳤다.

“하루빨리 네 주제를 깨닫는 게 좋을 거야. 거지꼴로 쫓겨나기 싫으면 말이야.”

그 말을 끝으로 나는 하인들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의해 저택 밖으로 질질 끌려 나갔다.

“거짓말이야. 전부 거짓말이야!”

정말이지 정신이 나가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내가 지금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건가?

아니, 그보다 애초에-

‘내가 살아 있는 게 맞기는 해?’

하인들에게 뒷덜미를 잡혀 강제로 끌려가는 동안, 나는 내가 죽었던 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

다리스 제국력 489년 3월 13일.

그날은 내가 17살이 되는 생일날이었는데도 저택 안이 어둑하고 우울한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네르, 죽으면 안 돼! 제발!”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침대 머리맡에서 서럽게 울고 있는 남자아이를 바라보았다.

“루이.”

나보다 아홉 살이 어린 남동생은 어찌나 많이 울었던지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귀여운 루이케. 가끔은 얄밉지만 그래도 사랑스러운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의 양쪽 팔은 이미 움직일 수 없게 된 지 오래였다. 그랬기에 나는 대신 상냥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루이, 편식하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해야 해. 너는 발렌티스의 차기 가주가 될 거니까. 누나랑 약속해 줄 수 있지?”

“나 약속 꼭 지킬게! 그러니까 네르도 죽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해 줘. 응?”

대답 대신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아무리 상대가 어린 동생이라 해도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할 수는 없어서였다.

‘나는 이제 죽어.’

눈동자를 아래로 내리깔며, 석상처럼 굳어 버린 손끝을 바라보았다.

사지석화증.

과거에는 비슷한 사례가 없었기에 어떤 의사가 처음으로 명명한 내 병명이었다.

처음 발병이 시작된 것은 1년 전의 일이었다.

손끝과 발끝이 돌처럼 굳기 시작하더니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환부가 넓어져 갔다.

부모님은 가문의 인맥과 엄청난 액수의 거금을 들여 치료법을 찾고자 했다.

내 병을 고쳐 주는 자에게는 발렌티스 가문의 재산 절반을 내어 주겠다는 파격적인 보상까지 내걸 정도였다.

이에 제국의 내로라하는 의사와 약사, 마법사들이 치료법을 찾겠다고 덤벼들었으나 성과는 없었다.

가문의 전폭적인 투자 덕분에 의학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져 몇몇 난치병의 해결책들이 개발되기도 했지만, 그 행운이 나에게는 찾아오지 않았다.

사지석화증의 완치는커녕 병세를 늦출 방법조차 알아내지 못한 것이다.

결국, 2개월 전부터는 팔다리가 완전히 마비되어 침대 밖을 벗어날 수도 없게 될 정도였다.

‘그리고 지금은-’

석화가 몸속 장기까지 진행되어 더는 목숨을 연명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 슬픈 일이었다.

“네르, 왜 대답이 없어? 조금만 더 버텨 줘. 그러면 내가 훌륭한 기사님이 되어서 네르의 병을 물리쳐 줄게!”

“루이의 우상인 힐더 할슈리트 경이 온다고 해도 내 병을 물리칠 수는 없을걸?”

“그럼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힐더 경보다 더 강한 기사가 될게!”

…루이케가 노력해도 은발 금안의 그 천재 소년 검사보다 강해질 수는 없을 텐데.

그러나 나는 굳이 그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낼 만큼 차가운 누나가 아니었다.

성장하는 아이에게 꿈과 희망은 무엇보다 중요한 법이니까.

“그래. 루이는 분명 제국에서 제일 강한 기사가 될 거야. 그러니까 공부도 훈련도 열심히 해야 해.”

“응!”

울면서도 큰 목소리로 대답하는 루이케를 격려하며 이번에는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네르, 소중한 내 딸.”

그녀가 하얀 두 손으로 내 손을 꼭 붙잡고 있었지만, 나에게는 아무런 감촉도 느껴지지 않았다.

팔다리의 감각이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이 오늘따라 유난히 서글프게 느껴졌다.

“미안해. 엄마가 네르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너무나도 미안해.”

어머니의 고운 분홍색 눈동자에 눈물방울이 맺히고 말았다.

“그렇지 않아요. 어머니는 제게 모든 걸 다 해 주신걸요. 그러니 그런 말씀 마세요.”

“네리아, 내 아가!”

결국, 어머니는 참고 있던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버지가 그런 어머니의 어깨를 감싸며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사랑하는 나의 딸, 네리아. 17번째 생일을 축하한단다.”

“고마워요, 아버지.”

“네 존재가 우리에게는 기쁨이고 행복이란다. 네가 태어나던 날이 아직도 눈에 선명하건만…….”

나에게는 언제나 의연하고 굳건한 모습만을 보여 주던 아버지의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살고 싶어.’

부모님과 루이케의 얼굴을 눈에 담으며 진심으로 소망했다. 하지만 이미 정해진 결말을 거스르는 것은 불가능했다.

“네리아,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때도 우리의 아이가 되어 줄 수 있겠니? 더 좋은 부모가 되겠다고 약속할게.”

“두 분은 이미 좋은 부모님인걸요. 세상에서 제일이요.”

점차 좁아지는 시야 속에서 가족들의 얼굴이 유독 선명하게 보였다.

“사랑해요. 저, 언제나 부모님께 자랑스러운 딸이 되고 싶었어요. 다음 생이 있다면 저야말로 꼭-”

아득해지는 의식 너머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했기에, 비록 짧지만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17살의 어느 봄날, 그렇게 나는 영원히 눈을 감았다.

***

…분명 그랬었다.

가족들과 눈물의 이별식을 끝낸 후, 분명 죽은 줄 알았는데.

“내가 살아 있다고?”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처음 정신을 차린 것은 머릿속에서 울리는 누군가의 비명 때문이었다.

‘내가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해?’

‘나는 이렇게 태어난 내가 싫어. 차라리 누가 날 대신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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