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1화 - 온풍 (穩豊) (5)
근자에 들어 윤은 매일 같이 교태전을 찾아 그곳에서 침수를 들었다.
이러시면 안된다는 임 상선에게 부릅 눈을 치켜뜨며 그의 입을 꾹 다물게 하곤 야장의를 걸친 채 교태전으로 향한 것이 벌써 여러날째였다.
이제는 서화를 제 품 안에 꼭 끌어안고 자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서화의 곁에서 자는 것이 그리 편한 것만은 아니었으니-.
" 전하, 옥체가 미령하신 곳이라도..."
몸을 뒤척거리는 윤이 걱정되었는지 서화가 물었다.
" ...아니오. 과인은 아무렇지 않으니 걱정 마시오."
" 괜찮다 하시면서 어찌 침수를 드시지 못하시는 것입니까."
" ... 과인의 여인을 품 안에 품고도 탐하지 못하여 애간장이 타올라 그러는 것이오."
그제서야 임금께서 그토록 불편해보이신 이유를 알아챈 서화. 뺨이 복숭아처럼 붉게 물들었다.
중전을 품은지가 대체 얼마나 되었던가.
중전과 마지막으로 합궁을 한 지를 세자면 열 손가락이 모자라도 한참 모자랐다.
밤마다 상소문과 서책을 읽으며 이러한 생각을 떨쳐보려 하였으나 무용지물이었다.
중전이 보고싶은 마음에 교태전에 걸음을 하여도 중전의 보드라운 살결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은 참으로 참기 힘든 고문이었다.
" 그리 힘드시면 참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하."
서화가 속삭이자 윤이 한숨을 내쉬며 말하였다.
" 과인도 그러고 싶소만... 뱃속의 용종을 생각하면..."
복중 태아가 안정기에 접어들 때까지 중전과의 합궁은 절대 금해야 한다던 어의의 말이 생각났다.
" 이제는... 그리 하여도 괜찮다 하옵니다."
" 그게... 정말이오?!"
희소식에 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으며 말하였다.
" 왜 진즉 말하지 않은 것이오?"
" 신첩도 오늘에서야 귀띔을 받았습니다."
" 정말 그리하여도 괜찮은 것이오?"
" 조선 최고의 명의가 한 말이니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서화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윤이 그녀의 입술을 파고 들었다.
" 흡..."
오랜만에 자신의 입술을 찾은 지아비의 숨결에 서화도 덩달아 몸이 뭉근히 달아올랐다.
그렇게 두 사람은 오래토록 마음과 몸을 나누며 사랑을 속삭였다.
***
" 전하. 신첩, 감히 전하께 청할 것이 있나이다."
" 중전의 청이라면 무엇이든 어렵겠소. 허심탄회하게 말씀해 보시오."
서화가 궁녀들을 모두 물린 뒤 윤의 조강 단장을 손수 하며 조심스럽게 속마음을 꺼냈다.
서화의 말을 들은 윤은 깜짝 놀라기도 하였다가 고심하는 표정을 짓기도 하더니 과인에게도 생각할 시간을 주시오- 라고 말하였다.
그 후, 며칠 뒤.
윤은 내금위장 홍시운을 어전으로 불러들였다.
" 찾으셨사옵니까, 전하."
" 왔느냐."
" 예."
시운을 바라보는 윤은 착잡함과 아쉬움에 입에 걸쇠라도 건듯 쉬이 말문을 열지 못했다.
" 시운아."
" 예, 전하."
" 과인이... 과인에게 둘도 없는 벗인 그대에게, 그대가 가장 원하는 것을 주고자 하여 이리 불렀다."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이라. 대체 무엇을 주시려 하시기에-.
" 이리 가까이 오라."
" 예."
" 더 가까이."
윤이 시운의 귀에 대고 무언가 귓속말을 하였다.
" 전하! 그건 당치도 않으신 말씀이옵니다!"
" 어찌 그러느냐. 그것이 네가 그 무엇보다도 원하는 것이 아니었느냐."
" ..."
" 너는 언제나 내 곁을 지켜주었다. 벗 이상으로 형제와 같은 네게 내가 무엇인들 주지 못할 것이 있겠느냐."
" ...전하."
" 내게 좋은 생각이 있으니 너는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된다."
밖으로 나온 시운은 어안이 벙벙하였다. 조금 전 임금께서 하신 말씀이 정녕 참일까. 혹 자신을 놀리시려 그러하신 것은 아닐까.
몸 속을 파고드는 바람이 다른 때와는 다르게 어째서인지 춥지 않게 느껴졌다.
또다시 시간이 흐르고-.
세상이 하얗게 물든 날이었다.
궐 안, 서월당 처소에는 곡소리가 쉴새없이 터져나왔다.
" 귀인 마마!! 흐으윽...."
" 마마...!!!....어찌..."
물에 빠졌던 조 귀인은 결국 두 번 다시 눈을 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궐 안엔 슬픔이 번졌으나 서화의 회임을 고려하여 장례는 조촐하고 짧게 치루었다.
" 중전마마, 대체 어디를 가시는 것이옵니까! 홀몸도 아니시온데...!"
" 오늘은 전하와 함께 잠행을 나가는 것이니 걱정 말게."
엄연한 양반집 여인의 차림을 한 서화가 한사코 나가서는 아니된다는 박 상궁과 한 상궁의 만류에도 기쁜 표정을 지으며 교태전을 나섰다.
" 하오면 소인도 함께..!"
" 자네들은 교태전을 지키게. 오늘은 전하와 함께 가는 것이니 지아비와 지어미의 애틋한 시간을 방해말게."
서화는 윤과 만나기로 한 곳으로 바삐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도착하였을 때, 윤의 사대부 복장 차림을 발견하곤 서화의 눈이 초승달처럼 부드럽게 휘었다.
" 전하."
" 오시었소."
" 곤룡포가 아닌 도포도 참으로 잘 어울리십니다."
" 중전께서도 참으로 곱구려."
두 사람은 함께 밤길을 걸어 어디론가 향하였다.
" 오셨사옵니까, 전하. 그리고 중전마마."
그들이 향한 곳은 다름아닌 윤의 숙부인 봉성대군의 저택이었다.
" 숙부님."
"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 예."
상석에 윤이 앉자 서화와 봉성대군도 함께 자리를 잡으며 앉았다.
" 이리 힘든 청을 들어주셔서 참으로 고맙습니다, 숙부님."
" 아닙니다, 전하. 자식없이 처와 쓸쓸히 살아가던 소신에게 자식을 내려주신 것은 전하가 아니십니까. 이제는 그도 모자라 며느리까지 보게 되었으니... 제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며느리를 맞이하게 될 줄은 참으로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장가를 가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소신이 전하께 참으로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 준비는 다 된 것입니까."
" 예, 남들의 눈을 피해 하는지라 급히 신방만 차려놓고 합환주를 넣어놓았습니다. 아, 지금 이리 오라 이르겠습니다."
이윽고 문이 열리자 머리에 사모를 쓰고 저고리와 바지, 단령을 입고 각대까지 갖추어 입은 신랑과 원삼을 입고 족두리와 화관을 쓴 수줍은 신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 참으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구나."
" ...전하."
신랑이 윤과 서화를 보자마자 삼배를 올렸다.
" 행복하거라."
" ...전하..."
시운이 바닥에 납작 엎드려 눈물을 흘렸다.
" 인경아..."
서화가 곱게 치장을 한 신부를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 중전마마..."
서화를 바라보는 인경의 눈빛도 물기를 가득 머금고 하염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 부디 행복하게 살아야 해."
" 중전마마... 그리고 전하... 두 분의 하해와 같으신 성은에 소인, 당장 죽는다 해도 아무런 여한이 없나이다."
" 새색시가 첫날밤도 치루지 않고 죽어서야 되겠는가."
윤이 농을 던지자 방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눈물을 그렁그렁 단 채 웃음을 터뜨렸다.
죽은 몸이 되어 궐에서 나온 인경. 그러나 그것은 인경을 궐 밖으로 내보내기 위한 서화와 윤의 계략이었다. 최 숙의와 달리 인경의 아비의 관직은 미미하였기 때문에 인경의 얼굴을 아는 이도 그리 많지 않았다.
인경과 시운의 애끓는 사모를 외면할 수 없었던 서화는 임금께 두 사람의 어긋나는 인연을 부디 이어달라며 간청하였다.
몇 날 며칠을 고심한 윤도 결국 자신의 친우의 행복을 위해 기꺼이 놓아주는 길을 선택하였다. 혹 이 일이 발각될 것을 염려하여 시운은 임금을 그림자처럼 보필하였던 자신의 관직을 내려놓고 도성을 떠나 멀리 가게 되었다.
" 과인에게도 그대를 살필 수 있는 기회를 달라."
윤은 이제 시운이 제 몫의 행복을 찾기를 바랬다. 서화 역시 같은 마음으로 진정한 마음을 나누었던 벗을 기쁜 마음으로 보내주기로 하였다.
" 자! 이것들을 받으라!"
인경의 두 손 위에 올려져 있는 넓직한 하얀 천 위로 윤이 밤과 대추를 한웅큼 집어 던졌다. 서화 역시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밤과 대추를 던져주었다.
" 허전하십니까?"
" 그럴 것이 무에 있겠소. 과인에겐 중전이 있거늘. 중전이야 말로 아쉬운 표정이구려."
은은한 달빛을 벗삼아 궐로 돌아오는 길, 윤의 표정이 조금 쓸쓸해 보이는 듯 하여 서화가 묻자 윤이 빙긋 웃으며 답하였다.
" 아닙니다. 두 사람이 행복하게 되었으니 신첩은 기쁘고 전하께 감사한 마음 뿐이옵니다."
" 진정 과인에게 감사한 것이오?"
" 예. 전하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입니다. 헌데 전하께서 이리 신첩의 청을 들어주시어 감격스럽고 백골난망이옵니다."
" 허면 과인이 적적하지 않도록 아이를 많이 낳아주시오."
" 예?"
" 궐에서 많은 이가 떠나가질 않았소. 그러니 중전께서 대군과 공주, 가리지 않고 많이 낳아주시오. 과인도 최선을 다하리다."
윤의 말엔 진심이 묻어있었다. 이에 서화가 수줍은 듯 고개를 아래로 떨구자 윤은 그러한 그녀가 사랑스럽다는 듯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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