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피는 궁궐의 봄-80화 (80/83)

제 80화 - 온풍(穩豊) (4)

" 중전마마!!!"

풍덩-. 서화가 연못을 빠지는 것을 보자마자 영후가 냅다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 중전마마!!!"

교태전 상궁들도 서화를 구하기 위해 당의와 치마를 벗어던지며 연못에 몸을 담갔다.

" 중전!!!"

윤 또한 다급하게 소리치며 연못으로 몸을 던지려 하자 임 상선이 이를 말렸다.

" 전하! 부디 고정하시옵소서. 지금 이 찬 물 속으로 들어가시면 고뿔에 걸리시옵니다. 부디 옥체가 상하시지 않도록..."

" 닥치거라! 지금 과인이 고정하게 생겼느냐? 중전이 저 차디 찬 물 속에 빠졌단 말이다!! 더욱이 홀 몸도 아닌데 무슨 변고라도 생겼다간...!"

윤 또한 임 상선의 만류에도 연못으로 몸을 던졌다.

풍덩-.

" 전하!!!!!!!"

임 상선의 절규가 공중에 울려퍼졌다.

살이 에이는 듯한 차가운 물 속.

살기 위해 본능적으로 몸을 허우적 거리며 움직였으나 역부족이었다.

몸을 휘감고 있는 치맛자락이 점차 무거워짐을 느꼈다.

' 전하...'

서화는 그렇게 의식을 점차 잃어갔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가 서화의 어깨를 낚아채어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 중전!!! 정신 차려 보시오, 중전!!!"

윤이 다급히 서화의 몸을 흔들며 깨워보지만 미동조차 않는 서화를 보며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 임 상선!!! 당장 어의를!!!"

서화에 이어 어느새 물에 뛰어들었던 내금위장이 최 귀인을 구해내어 연못 밖으로 끌어냈다.

그리고 제일 먼저 뛰어들었던 영후는 조용히 물 밖으로 나왔다.

윤의 품 안에 안긴 서화와 제 빈 손을 물끄러미 번갈아가며 바라보던 그는 교태전 상궁들이 벗어던진 옷가지를 보곤 숨을 고르기가 무섭게 몸을 다시 물속으로 던져 두 상궁을 구했다.

***

" 중전은!!! 중전의 상태는 어떠한 것이냐!!!"

교태전에 서화를 눕히고 어의가 진맥을 끝내기가 무섭게 윤이 물었다.

" 중전마마께서도, 아기님의 맥도 모두 약하옵니다. 추운 날씨에 차가운 물 속에 빠지시는 바람에..."

서화의 안색은 죽은 사람처럼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 한 상궁! 불을 더욱 세게 때워라!"

" 예, 전하!"

한 상궁도 울먹거리며 부리나케 밖으로 나갔다.

" 중전... 정신 좀 차려보시오... 과인만 두고 가면 안되오... 그러니 어서 눈을 떠 보구려...제발..."

애가 타다 못해 재가 되어버릴 지경이었다.

중전에게 후원으로 오라고 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이대로 중전이 눈을 뜨지 않는다면...

이제서야 겨우 행복에 가까워졌는데...

이 세상에 아쉬울 것이 없고 가지지 못한 것이 없는 윤에게 이 상황은 너무도 가혹하고 견디기 힘들었다.

그 시각-.

교태전 밖에서 물에 홀딱 젖은 관복을 차마 벗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서 있는 인영이 있었다.

반드시 일어나셔야 합니다, 중전마마..

마마를 감히 마음에 품었다 하여 소신을 이리 벌하시는 것입니까.

전하의 여인인 마마를 미천한 소신의 눈동자에 감히 담았다 하여... 소신을 질책하고자 이리 고통을 주시며 질책하시는 것입니까.

서화가 물에 빠졌을 때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당장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연못 안으로 뛰어들었다.

축축하게 젖은 소매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언젠가 서화가 땀을 닦으라며 건네주었던 나비가 수놓아진 손수건.

그 손수건을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그러쥔 채 얼굴을 파묻었다.

부디 무탈하여 주십시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소신의 이 못난 마음을 떨쳐버리겠습니다.

감히 중전마마의 모습을 두 눈으로 쫓았던 그 죄 또한...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우리 전하의 마음을 슬프게 하지 말아주십시오.

찬 바람에 손발이 꽁꽁 에이는 와중에도 미동도 않고 서 있는 친우의 모습을 본 내금위장은 씁쓸하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발소리를 죽인 채 왔던 길을 되돌아나갔다.

수라도 거른 채 서화의 곁에서 한 시도 쉬지 않고 손을 꼭 붙잡고 있기를 꼬박 하루를 채웠을 때, 어의에게서 그토록 오매불망 바라던 소리가 들려왔다.

" 중전마마의 숨소리가 고르신 것으로 보아 진정이 되신 듯 하옵니다. 또한 아기씨의 활맥이 느껴지시는 것을 보니 고비는 넘긴 듯 하옵니다, 전하."

그제서야 방 안 곳곳에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나왔다. 윤 역시 불안했던 마음을 내려놓으며 핼쑥한 서화의 볼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

그 날 밤-.

서화의 손가락이 까딱거리며 움직였다. 이윽고 눈꺼풀이 천천히 올려지더니 시야에 들어온 익숙한 공간을 알아차리곤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였다.

" 아직 몸이 성치 않으니 누워 있으시오."

" ...전...하?"

윤의 얼굴은 투박한 나무껍질처럼 거칠었다. 이에 걱정이 된 서화가 손을 뻗어 윤의 뺨을 만졌다. 뺨에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자 윤은 자신의 얼굴에 머물러있는 서화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 다행이오... 중전께서 과인을 영영 떠나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였소."

그제서야 최 숙의와 함께 연못에 빠졌던 것이 생각났다.

' ...아기.'

서화가 급히 손을 배로 가져갔다. 그러자 윤이 웃으며 말하였다.

" 복중 태아는 괜찮소. 그러나 어의 말로는 좀 더 쉬며 안정을 취해야 한다 하였소."

" ...최 숙의는..."

" 멀쩡하오. 당장이라도 사지를 갈갈이 찢어죽이고 싶을 만큼. 헌데 조 귀인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 하여 내의를 그리로 보내었소."

인경까지 함께 물에 빠진 줄 몰랐던 서화는 아비의 일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았던 인경이 걱정되었다.

" 조 귀인이 많이 다친 것입니까?"

" 더 두고 보아야 할 것 같소. 그러나 중전, 지금은 중전과 복중 태아의 안위만을 생각하시오. 큰 일을 겪었으니 용종 또한 많이 놀랐을 것이오."

윤이 서화의 배 위에 자신의 손을 살포시 올려놓았다. 자그맣게 볼록 솟은 서화의 아랫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자신의 온기를 조금씩 나누어주자 안정이 되는지 서화는 곧 깊은 잠에 빠졌다.

***

서화가 차츰 안정을 되찾자 궐 안엔 중전마마의 회임 소식이 널리 퍼졌다. 이 소식을 들은 대비와 대왕대비는 한달음에 교태전을 찾아 서화의 손을 꼭 붙잡으며 축하의 말을 건넸다.

" 참으로 장하십니다, 중전. 이제 이 할미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 이리 무탈하여 참으로 다행입니다. 혹 먹고 싶은 것이 있다면 말씀하세요. 이 어미가 다 해드리겠습니다."

대비와 대왕대비의 융숭한 대접에 서화는 몸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서화의 회임 소식은 흐르고 흘러 영와헌 처소에 꼼짝없이 갇힌 최 숙의의 귀에도 들어왔다.

중전을 죽이지 못한 것이 분통하고, 또 분통하였다. 더 빠르게, 세게 찔렀어야 하는 것을.

' 결국 그 요망한 계집이 회임을... 내 숨통을 조이는구나.'

연못 밑바닥까지 가라앉아 정신을 잃은 최 숙의는 내금위장에 의해 제일 나중에 구해졌다. 그럼에도 질기고 질겼던 목숨. 결국 또 이리 살아남아 훨훨 날아다니는 민들레 홀씨만도 못하게 되었다.

그때였다.

" 죄인 최 씨는 당장 밖으로 나와 어명을 받들라."

처소 밖에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끝인 것인가. 눈물 대신 헛웃음이 나왔다.

" 죄인 최 씨는 영와헌에서 근신하라는 명을 무시하였음은 물론, 용종을 잉태한 중전을 음해하려 하였으며 귀인 조씨의 목숨 마저 위태롭게 하였다. 그 죄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으니 사사되어도 마땅하나 왕실의 큰 경사로 인해 죄인 최 씨의 죄를 감형하고자 하니 종2품 숙의의 품계를 거두고 선원록 (왕실족보)에서 삭제함은 물론 양인신분을 박탈하여 강원도 감영의 노비로 삼고자 한다. "

목숨을 잃진 않게 되었으니 웃어야 하나, 아니면 부모의 원한을 갚지 못하였으니 울어야 하나.

소단을 비롯한 최 귀인을 모시던 궁녀들이 땅바닥에 주저앉아 통곡을 하였다.

그러나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는 최 숙의.

끝으로 치닫고 나니 그토록 포기가 되지 않았던 것들이 속절없이 환영처럼 사라졌다.

외로웠었다. 무엇하나 아쉬울 것 없이 살아온 좌의정의 여식인 제가 궐 안에 후궁으로 들어와 지아비인 임금의 눈길 한 번 받지 못하며 산 그 세월 속에서 외로움을 떨쳐버리기 위해 야멸차지고 더욱 표독스러워져야 했다.

혼인을 하여 이 세상 최고의 사내의 여인이 되었으나 너무나 가슴 시리도록 외로웠던 곳.

이젠 다 놓아버리련다.

죽어서나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던 이 궐을 살아서 제 발로 걸어나갈 수 있게 되었으니 그것으로 위안 삼으련다.

소단이 최 숙의를 따라 나서려 했지만 군관들이 이를 막아섰다.

최 숙의는 허름한 가마도 없이 누추한 모습으로 거센 겨울 바람에 뒤섞여 궐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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