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피는 궁궐의 봄-79화 (79/83)

제 79화 - 온풍 (穩豊) (3)

최 귀인과 조 귀인의 처분에 대한 생각을 임금께 조심스레 전하였음에도 윤은 좌의정만큼은 그 죄의 무게가 너무도 무거워 결국 최 귀인의 품계를 종일품 귀인에서 두 품계 아래인 종이품 숙의로 강등되었다. 숙의가 된 최 귀인은 처소 또한 동월당에서 더 작은 규모의 영와헌 (影臥軒)으로 옮겨야 했다.

그림자 영 (影), 엎드릴 와 (臥).

그림자처럼 엎드려 살라는 윤의 무언의 경고였다.

한편, 이번 일에 큰 공을 세운 대사성과 내금위장에겐 어주와 함께 비단 스무필을 하사하여 이들의 노고를 크게 치하하였다. 윤이 가장 아끼는 친우들인 만큼, 이들에게 중전의 회임 소식을 알리며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

또한 파사국 재상인 세르샤를 궐로 불러들여 고마움을 표하며 어주를 하사하였다.

" 그대 덕분에 과인이 큰 곤경에 빠지지 않고 사악한 무리들을 처단할 수 있었다. 과인과 이 나라가 그대에게 빚을 졌군."

" 당치 않으신 말씀이십니다. 제 나라의 사람이 조선의 땅에서 감히 헛된 꿈을 꾸어 전하께 참으로 크나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럼에도 저희 상단을 내치지 않으시는 것은 물론, 도리어 저를 궐로 불러들이시어 이리 융숭하게 대해주시니, 그저 송구할 따름입니다."

" 헌데 이제...그대는 어찌할 생각인가? 단주도 없는 상단인데... 다시 파사국으로 돌아가는 것인가?"

" 저는 파사국의 황제 폐하께 돌아갈 생각입니다. 그리고 조선에 있는 파사국 상단은... 전하께서 윤허하여 주신다면 제 측근을 이곳 조선에 남겨 상단을 이끌어나가게 하고싶습니다."

세르샤는 아르샨을 파사국 상단의 새로운 단주로 삼을 생각이었다.

" 굳이 과인의 윤허가 필요할 까닭이 무에 있겠는가. 좋다. 허면 이것을 받으라."

윤이 세르샤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정갈하게 접힌 종이. 이를 펼친 세르샤의 눈이 점차 커지더니 윤과 종이를 번갈아가며 물었다.

" 전하. 정녕 파사국의 상아 전매권을...!"

" 그렇다. 그대에게 진 빚이 있으니 과인 또한 그대의 상단을 위해 준비한 것이다."

그 안엔 임금이 파사국 상단의 상아 전매권을 윤허한다는 내용과 함께 옥새가 찍혀있었다.

이 전매권은 파사국과 조선을 더욱 친밀한 관계로 만들어줄 토대가 될 것이었다.

" 이곳을 떠나기 전, 과인과 함께 잠시 걷겠는가. 그대가 만났으면 하는 이가 있다. 대사성, 내금위장 그대들도 함께 가겠느냐. 오늘은 추운데도 햇볕이 참으로 따사롭구나."

윤의 말에 의아함이 든 세르샤. 자신이 보아야 할 이가 대체 누구란 말인가.

호기심에 윤의 뒤를 따라 나선 세르샤. 시운, 영후와 함께 어깨를 맞추어 걸으며 몇 개의 문을 지나고 아름다운 연못이 있는 후원에 들어서자 비로소 윤의 걸음이 느려졌다. 이에 덩달아 천천히 걸으며 윤이 응시하는 곳을 무심코 쳐다본 세르샤는 저 멀리서 보이는 이를 보고 걸음을 우뚝 멈추고 말았다.

" ...향..."

" 향은 중전을 모시는 상궁의 이름일세. 그리고 그대가 아는 향은 이 나라의 중전이다."

조선의 임금이 자신에게 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멀리서 걸어오고 있는 두 여인. 한 여인은 금사로 용의 문양이 수놓아진 흉배가 있는 당의를, 그 옆의 여인은 흉배가 없는 당의를 입고 있었다. 분명 자신이 알고 있는 향이건만, 그 여인은 상궁의 옷차림이 아닌 내명부의 수장이 입는 흉배가 달린 당의를 입은 채 윤과 세르샤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 전하. 어...그대는..."

세르샤를 마주한 채 어색한 표정을 짓는 서화에게 윤이 소곤거리며 말하였다.

" 파사국의 재상이 곧 본국으로 돌아간다 하니 그 전에 작별인사와 함께 중전의 정체도 밝혀야 하지 않겠소?"

어찌 임금께서 자신이 중전의 신분을 숨기고 세르샤에게 향이라 말한 것을 알고 계신단 말인가!

윤이 잠시 두 사람을 위해 자리를 비켜주었다. 대사성이 이전에 세르샤와 중전의 관계를 귀띔해주었던 터라 윤은 세르샤가 모든 오해와 미련 없이 이 땅을 떠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 ... 중전마마셨습니까."

서화를 한동안 말 없이 응시하던 세르샤의 입에서 헛웃음 섞인 말이 흘러나왔다.

그제서야 동명골에서 재회했을 때 서화가 다른 여인들과 대사성까지 대동하였던 것이 이해가 되었다.

그렇지, 상궁의 바깥 출입에 높은 관직의 대사성이 함께 할리가 없지. 그렇게 늦게나마 둔한 제 눈치를 탓하였다.

" 신분을 속여 미안합니다. 그러나 함부로 밝힐 수 없었던 나의 처지를... 이해해 주십시오."

" ...괜찮습니다."

" 헌데 그대도 파사국의 재상이란 사실을 밝히지 않았으니... 결국 같은 셈입니다."

서화의 말에 세르샤가 잔잔한 웃음을 내뱉으며 대답하였다.

" 듣고보니 그도 그렇군요."

" ..."

" 중전마마의 존함이 무엇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 윤...서화라 합니다."

윤서화... 서화...라...

" 파사국으로 돌아가신다 들었습니다."

" 예. 제 주군이 계신 곳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 부디, 살펴 가십시오. 그리고... 그대에게 받았던 크나큰 도움들은... 잊지 않겠습니다."

이젠 정말 작별인 것인가.

" 중전마마께서도 부디 강녕하십시오. 그리고... 왕자 전하의 탄생을 기원하겠습니다."

후원까지 거닐며 오는 길에 영후에게서 중전마마의 회임 사실을 전해들었던 터였다. 그 때는 그저 향이 모시는 중전께서 회임을 하신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자신이 마음을 품은 여인이 다른 사내의 지어미이자 뱃속에 아이를 잉태하고 있다는 사실에 그녀를 보고있기 괴로웠다.

세르샤는 서화에게 허리를 숙여 예를 갖췄다. 그러자 서화 또한 그에게 목례를 하며 작별을 고했다.

궐 안의 모든 이와 작별을 하고 궐 밖을 나서는 세르샤의 마음은 한 가운데에 커다란 구멍이 난 것처럼 휑하고 시렸다.

첫 만남부터... 그대를 잊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상궁이라 하여... 중전마마를 모시는 이라 하여... 전하께 그대를 제게 달라 청해볼까 생각도 하였습니다.

감히 이 나라의 국모이신줄도 모르고 말입니다.

이제는 그대를 추억 속에 가두어놓는 것조차도 해서는 안되는 것이겠지요.

부디 행복하십시오.

추억을 가져가는 대신 중전마마의 행복과 순산을 기원하겠습니다.

***

세르샤가 떠나고 후원에 남겨진 임금과 중전, 영후와 시운 그리고 조 귀인.

윤이 교태전에 기별을 넣어 이번 일에 공을 세운 이들과 함께 후원으로 갈 것이라 하였을 때, 서화는 서월당으로 가 싫다는 인경을 어르고 달래어 함께 후원으로 나왔다.

아비의 불충으로 임금을 뵈올 낯이 없다는 인경. 그러나 서화는 그 동안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슬픔에 빠져있던 인경에게 잠시라도 시운과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시운을 발견한 인경의 두 눈빛은 아련함으로 물들어 하염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또한 인경을 바라보는 시운의 모습도 애처로워 보였다.

그 때였다.

" 어머, 이것이 누구이십니까. 이 나라의 지존이신 주상전하와 내명부의 수장이신 중전마마, 거기다 조 귀인. 아, 이제는 조 귀인 마마라 불러드려야 한다는 것을 미천한 소첩이 잊고 말았습니다."

가채머리는 온데간데 없이 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소복 차림을 한 최 숙의가 휘청거리며 나타났다.

" 최 숙의. 과인이 분명 최 숙의의 처소에서 근신하라 명하였거늘, 과인의 명을 어긴 것이냐?"

윤이 진노한 목소리로 최 숙의를 질책했다.

" 소첩이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전하! 그러니 소첩의 목숨도 어서 거두어 가시지요. 소첩, 전하를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이 목을 내어놓을 준비가 되어있사옵니다!"

보다 못한 서화가 최 숙의에게 다가가 말리려 하였다.

" 정신 차리게, 최 숙의. 어딜 감히 전하의 안전에서 이리 경거망동 하는 것인가! 그만하고 자네의 처소로 돌아가게."

그러자 최 숙의가 서화의 팔을 밀치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 내 몸에 손 대지 마라!!! 네년 따위가 감히 함부로 손을 댈 수 있는 몸이 아니란 말이다!"

최 숙의가 패악질을 부리며 난동을 피우자 보다못한 서화와 인경이 최 숙의의 양 팔을 붙잡고 자리에서 일으켰다. 그러자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최 숙의가 품 속에서 단도를 꺼내들더니 뾰족한 단도의 칼 끝을 서화를 향해 찌르려 달려들다 그만 중심을 잃고 서화와 함께 연못으로 풍덩 빠지고 말았다. 그 옆에서 말리려던 인경도 덩달아 함께 연못으로 빠져버렸다.

풍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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