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7화 - 온풍(穩豊) (1)
" 좌의정, 그대의 죄를 그대가 알렷다. 그대의 죄를 이제 온 천하가 다 아느니!"
좌의정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그저 제가 아끼는 여식에게 최고의 자리를 주고 싶었을 뿐이었거늘. 세상에서 천도 빼고 온갖 진귀한 것에 둘러싸여 자라온 자신의 여식에게 어울리는 자리는 임금의 옆자리 뿐이라 생각했다.
" 최 귀인 마마는 소신이 한 짓을 모르옵니다. 그러니 부디...자비를 베푸시어 최 귀인 마마만큼은 지금처럼 살 수 있게 해주십시오."
자신과 집안에서 전전긍긍 기다리고 있을 처 박씨는 이미 살 만큼 살지 않았던가. 자신의 죄로 인해 여식의 발목을 붙잡고 싶지 않았다.
비록 버림받은 후궁의 신세를 면치 못하겠지만 목숨을 잃는것보다, 유배되거나 사사되는 것 보다야 낫지 않겠는가 싶은 아비의 마음이었다.
" 읏.."
혀를 세게 깨물은 좌의정이 신음소리와 함께 피를 내뿜으며 자리에서 쓰러졌다. 이에 놀란 관군들이 좌의정의 곁으로 우르르 다가가 그의 상태를 살폈다.
" 아직 숨은 붙어있사옵니다, 전하."
한 관군이 다급한 목소리로 고하였다. 그러나 윤은 이에 개의치 않고 서릿발과 같은 차디찬 눈빛으로 단주를 응시하였다.
" 파사국 상단의 단주라 하였느냐."
" ..."
설매와 좌의정의 무너지는 모습을 한치도 빠짐없이 지켜본 단주의 눈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서려있었다.
" 그대는 파사국에서도 역모를 꾀하다 버려진 신세가 되었다지. 그런 자가 감히 과인의 나라에서, 과인의 머리 꼭대기 위에 앉아 과인을 조종하려 들다니. 이는 과인은 물론이요, 이 나라를 우습게 본 것이나 진배없는 일이 아니더냐?"
" ..."
" 이는 그 어떠한 형벌로도 씻을 수 없는 대역죄임을 그대도 모르지는 않겠지."
단주는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윤은 삼엄한 목소리로 시운에게 말했다.
" 좌의정과 파사국 상단의 단주를 능지처사(陵遲處死)에 처한다. 처형은 진시 (辰時, 오전 7시-9시)에 행하여 만 백성이 죄인들을 볼 수 있도록 하라. 또한 이들의 목을 광화문 밖에 걸 것을 명하는 바이니 내금위장은 이를 따르도록 하라."
" 예, 전하! 분부 받들겠사옵니다."
***
참으로 길고도 긴 하루였다. 윤은 지친 몸을 이끌고 몸을 씻어낸 뒤 금사가 수놓아진 새 야장의를 입고 교태전으로 향했다.
" 전하!"
연신 좌불안석이던 서화가 윤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맞이하였다.
" 중전."
" 전하."
서로의 눈을 마주한 두 사람. 참으로 길고 고단한 여정의 끝. 그간 이 말갛고 해사한 웃음을 짓는 여인이 얼마나 그리웠던가.
윤이 서화를 덥석 끌어안았다.
" 전하!"
" 잠시...잠시만 이렇게 있고 싶소."
서화의 어깨에 윤이 지친 표정이 역력한 얼굴을 파묻었다.
' 전하께선... 이리 힘드신 자리에 계신 것입니까.'
서화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임금의 등을 끌어안으며 자신의 온기를 나누어주는 것 뿐이었다. 지친 지아비를 위해 서화는 팔에 더더욱 힘을 주며 윤을 꽉 끌어안았다.
" 참으로 그리웠소, 중전."
그렇게 한참의 포옹 끝에 윤이 등을 다시 꼿꼿하게 펴며 서화를 바라보았다.
" 신첩도... 그리웠나이다."
윤의 마음에 서화도 수줍게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었다.
" 중전께서 이 나라를 살리셨소."
" 신첩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모두가 전하의 뛰어나신 성총과 혜안 덕분이 아닐런지요."
" 그 장부가 무슨 내용인지 읽어보시었소?"
" 아니 읽었습니다. 전하께서 신첩에게 내리신 명은 적합한 이를 찾아 장부를 번역하라 하신 것이었기에 그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기만 하였을 뿐, 읽진 않았나이다."
중전은 이런 여인이었다. 눈이 있어도 없는 척 하며 늘 주변을 헤아리고 살피는 그런.
영후가 윤에게 장부를 가지고 왔던 날, 윤은 영후에게 은밀히 명을 내렸다.
' 이 장부를 교태전으로 가져가라. 그대는 중전의 글스승이니 별다른 의심 없이 드나들 수 있을 게 아니냐.'
' 예? 이 장부를 중전마마께 맡기시려는 것입니까?'
' 그리고 중전께 사역원에서 쓸모있는 자를 물색하여 그 장부를 비밀리에 번역하라 전하라. 또한 과인이 교태전에 기별을 넣을 때까지 반드시 이 장부를 잘 간수하여야 한다 전하라.'
' 예, 전하.'
이러한 명을 전해들은 서화는 그녀의 아비에게 도움을 청하여 사역원의 우직하고 입은 물에 젖은 솜보다 더 무거운 이를 알게되었다. 그이를 몰래 교태전으로 불러들인 서화는 장부를 내밀며 은밀히 번역해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자,
'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중전마마. 파사국 언어라면 소신보단 제 누이동생이 더욱 능통하옵니다.'
' 판관 대감의 누이 동생 말입니까?'
' 예. 제 누이동생은 파사국어 뿐만 아니오라 토번국(오늘날의 티베트)어에도 막힘이 없는 아이오니 중전마마께서 곁에 두시고 부리시는 것이 더 나을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그리하여 소혜가 교태전으로 드나들게 된 것이었다. 은밀히 번역을 해야 하는 일이었기에 번역에 관한 것이 모두 교태전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하였고 소혜가 퇴궐을 하면 서화는 자신이 자는 금침 밑에 이를 숨겨놓았다.
" 이리 중전의 고운 얼굴을 이토록 마음껏 볼 수 있다니, 참으로 감격스럽소."
서화를 바라보는 윤의 눈빛은 한없이 다정하였다.
" 전하. 신첩, 전하께 아뢸 말씀이 있사옵니다."
" 무엇이오? 혹, 갖고 싶은 것이 생긴 것이오? 그런 것이라면 무엇이든 말씀만 하시구려. 과인이 중전께서 원하시는 것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갖게 해주리다."
" 그런 것이 아니오라..."
막상 이야기를 하려니 설레임과 긴장감이 뒤섞여 쉽게 말문이 트이지 않았다.
" 대체 무엇이기에 그리 뜸을 들이시는 것이오? 혹, 또 어디가 아픈 것이오?"
혹 자신의 여인이 아픈 것은 아닐까, 지난 번처럼 또 쓰러진 것은 아닐까 하여 금세 안색이 어두워진 윤의 얼굴을 바라보며 윤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신첩... 회임을 하였나이다."
서화의 말에 윤의 얼굴엔 그 여느때보다도 기쁜 화색이 돌았다. 그리고는 서화의 두 손을 꼭 잡으며 말하였다.
" 드디어 과인에게 말해주었구려."
" 예?"
임금께서 기뻐하시리라 생각했던 서화는 마치 다 알고 있었다는 듯 말하는 윤에게 저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다.
" 혹, 아시고 계셨던 것이옵니까?"
" 이 궐 안에 과인이 모르는 것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오?"
" 어찌 아셨습니까?"
" 어의는 중전의 사람이기 이전에 과인의 사람이오. 과인이 대역죄인들을 뿌리속까지 처단하기 위해 교태전에 일부러 걸음을 하지 않을 적, 어의가 과인을 찾아왔었소."
" ..."
" 중전께선 회임중이라며 지아비인 과인이 교태전에 자주 들어 중전께서 불안하지 않도록 다독여야 한다 간청을 하더군. 제 목을 내놓아도 좋으니 부디 중전께 드나들며 복중의 용종과 중전께서 평안할 수 있도록 해달라며 말이오."
어의는 교태전을 찾지 않는 임금으로 인해 중전께서 마음을 다치시어 귀한 왕실의 핏줄에 해가 될까 싶어 안절부절이었다.
" 중전께서 회임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찌나 교태전으로 달려오고 싶던지. 과인을 능멸한 자들을 추포하기 위해 폐비 강씨 행세를 하는 그 기생을 궐로 들이며 혹 중전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아닌지 그 동안 내내 좌불안석이었소."
죄인들을 덫 안에 넣기까지 모든 것을 내팽겨치고 교태전으로 달려와 품 안에 중전을 품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하루에도 열두번씩, 앉으나 서나, 자나 깨나, 같은 궐 안에 있으면서도 그저 교태전을 먼 발치에서 훔쳐보듯 바라보아야 했던 윤의 속은 그리움에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 전하..."
" 오늘에서야 모든 일이 갈무리 되어 이렇게 온 것이오. 허나 피비린내 나는 아비의 손을 뱃속의 용종이 원치 않을 듯 하여 깨끗히 목욕재계까지 하고 온 것이오."
오늘 자신의 손으로 처단한 목숨이 몇 개던가. 차마 그대로 교태전으로 발걸음 할 수 없었다. 혹, 오늘의 나쁜 기운이 복중 태아에게 전해질까봐.
" 그리고... 중전의 회임을 알고 시기하는 이가 생기면 그것이 살이 되어 중전께 향할까 싶어 할마마마와 어마마마께 아직 알리지 못한 것은 물론, 마음껏 드러내놓고 좋아하지도 못하였소."
" ..."
" 그리고 최 귀인의 거취가 정해질 때까진 중전의 회임 사실을 다른 이에게 알리고 싶지 않소."
귀하게 얻은 자식을 지키고 싶은 아비의 마음이었다. 그것을 어찌 서화가 모를 수 있을까.
서화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말했다.
" 전하의 하해와 같으신 어심을 신첩이 어찌 다 이해할 수 있을까만은 신첩, 그저 전하께서 하시는대로, 하라시는대로 따르고 믿을 것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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